저자 장덕진(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사회발전연구소장)보도일 2017.02.01

요 약
김우창, 송복, 송호근 교수의 '더 나은 한국사회를 위한 사유와 제언’을 여러 나라의 경험적 증거에 견주어 그 정당성을 증명하고 있으며, 주요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GDP) 추이와 가치관의 변화를 비교한 결과를 공개해 김우창, 송복, 송호근 학자들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목 차
세계문화지도로 본 요지부동의 한국인
왜 요지부동인가─공민(共民)의 부재에 대한 증거들
좋은 질서는 무엇인가─사회의 질적 발전
무엇을 할 것인가─의식, 제도, 그리고 그것의 통합
의식의 해법: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불안사회’
제도의 해법: 사회민주화와 복지정치
통합의 해법: 심미국가와 현실의 예비 작업
정치와 거버넌스의 공간
글을 맺으며
내 용
[2016 연구논문]데이터로 본 한국인의 가치관 변동:김우창, 송복, 송호근의 양적 변주
장덕진(서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사회발전연구소장)
처음 이 책의 기획을 듣고 필진 참여를 권유 받았을 때 필자는 쉽사리 수락할 수가 없었다. 김우창, 송복, 송호근. 한국의 대표적인 석학들과 함께 작업한다는 것은 분명 명예로운 일임에 틀림없지만, 동시에 학자로서 스스로의 부족함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일이 될 것이었다. 고심 끝에 동의하였지만, 이런 이유로 인해 이 글의 성격은 다른 세 편의 글들과는 차이가 있다. 세 필자의 원숙한 사상과 통찰력에서 나오는 주장들을 다양한 경험적 증거들과 비교해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이러한 형태의 글을 쓰게 된 것은 물론 다른 세 분의 석학들과 견줄 수 있는 사상과 통찰력을 스스로 갖추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지만, 여기에는 다른 부차적인 이유도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학문적 세대의 차이이다. 물론 세 분을 하나의 세대로 묶고 필자를 별도의 세대로 분류하는 것은 물리적 연령 차이만을 놓고 보면 적절치 않다. 김우창 선생과 송복 선생은 동세대이지만 송호근 선생은 이 두 분과 20여 년의 차이가 있고, 오히려 송호근 선생과 필자의 차이가 10여 년 남짓하다. 김우창 선생과 송복 선생은 인문적이고 역사적인 사유에 익숙한 세대이고, 그 분야에서 경지에 도달한 분들이다. 두 분의 자식뻘인 필자는 소위 실증적이고 분석적인 학문의 세례를 본격적으로 받았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인문학적 상상력과 역사적 통찰력이 부족함을 절감하는 세대이다. 송호근 선생은 양쪽의 영향을 모두 받은 세대에 속하지만 여러 노작에서 드러나듯이 윗세대의 덕목인 문·사·철(文·史·哲)을 섭렵한 보기 드문 학자이다. 그러니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여러 경험적 자료를 분석하여 다른 세 필자의 주장과 견주어 보는 것일 뿐이다.
세계문화지도로 본 요지부동의 한국인
세 분의 원고를 읽으면서 내내 떠올렸던 경험적 연구는 로날드 잉글하트(Ronald Inglehart)를 중심으로 한 세계가치관조사(WVS: World Values Survey) 자료와 그 자료로부터 만들어진 세계문화지도(Cultural Map of the World)였다. 세계가치관조사의 기본 아이디어는 근대화론(modernization theory)에서 나온다. 산업화와 경제성장이라는 사회구조적 변화와 더불어 사람들의 가치관도 체계적으로 달라질 것이라는 이론적 예측이 그 바탕에 있다. 한때 근대화론은 철 지난 구시대의 유물처럼 취급당한 적도 있었지만, 세계문화지도에서 보듯이 지금의 근대화론은 탄탄한 경험적 증거와 예전보다 훨씬 세련된 이론적 주장으로 무장해 있다. 세계가치관조사는 1981년 미시건 대학의 정치학자 로날드 잉글하트의 선도적 제안에 수십 개 국가의 학자들이 응답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 조사는 공통의 질문지를 가지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회조사를 실시함으로써 사람들의 가치관을 비교할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준다. 어떤 나라들은 참여하고 싶어도 조사를 수행할 수 있는 연구비의 부족으로 못 하기도 하고, 어떤 나라들은 정치적 규제 때문에 못 하기도 한다. 따라서 한 번 조사를 할 때마다 참여국의 수는 조금씩 달라지는데, 지금까지 그 수는 수십 개 국가에서 100여개 국가에 이른다. 세계적인 규모의 조사이다 보니 같은 해에 모든 나라가 조사를 수행한다는 것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2~3년 정도의 차이가 나더라도 가급적 비슷한 시기에 조사를 하는데, 그렇게 수행된 각각의 조사를 ‘웨이브(Wave)’라고 부른다. 1981년 첫 번째 웨이브 이후 지금까지 여섯 번의 웨이브가 완료되었고 2016~2018년 기간 동안 일곱 번째 웨이브가 진행 중이다. 자료에 근거한 경험적 연구를 하는 사회과학자에게 이러한 자료의 존재는 흥분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 보라. 이제 우리는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비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반세기 전 사람들의 생각은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변화해서 오늘날의 세계를 만들었는지 추적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림 1: 2015년 세계문화지도>
<그림 1>로부터 시작해보자. 이 그림은 가장 최신 자료인 <웨이브 6> (2010~2014년 조사)을 사용하여 2015년에 만들어진 세계문화지도이다.
잉글하트와 웰젤은 사람들의 가치관을 묻는 여러 질문들에 대한 요인분석(factor analysis)을 통해 전세계 사람들의 가치관을 크게 두 개의 축으로 해석할 수 있음을 알아냈다. 이와 관련한 수십 편의 논문과 단행본들이 있지만 두 사람의 공저로 2005년에 출판한 『근대화, 문화변동, 그리고 민주주의: 인간 발달의 순서』라는 저서가 가장 잘 정리하고 있다. 이들이 말한 두 개의 축이 바로 <그림 1>의 가로축과 세로축이다. 세로축은 전통적 가치 대 세속합리적 가치의 긴장을 보여준다. 전통적 가치는 종교, 부모와 자식 간의 유대, 권위와 전통적 가족가치에 대한 존중 등을 중시한다. 이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이혼, 낙태, 안락사, 자살에 반대하는 경향이 강하고 이런 가치관이 지배적인 나라들은 국가적 자부심과 국가주의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세속합리적 가치는 그와 정반대이다. 세속합리적 가치가 강한 사회에서는 종교나 전통적 가족가치, 권위 같은 것들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이혼, 낙태, 안락사, 자살 등을 더 너그럽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가로축은 생존적 가치 대 자기표현적 가치의 긴장을 보여준다. 생존적 가치는 경제적이고 물리적인 안전을 중시하며, 자민족중심주의(ethnocentrism) 경향이 강한 편이어서 신뢰와 관용의 수준은 낮다. 그 반대인 자기표현적 가치는 환경보호, 외국인이나 성적 소수자에 대한 관용, 양성평등 등을 중시하며, 정치적·경제적 영역의 의사결정에서 참여의 요구가 높아진다. 이 축은 심리학자인 에이브러햄 매슬로우(Abraham Maslow)의 욕구단계론(hierarchy of needs)과 맞닿아 있기도 하다. 매슬로우에 따르면 인간의 욕구는 다섯 개의 단계를 거치며 발달하는데, 생리적 욕구·안전에 대한 욕구·애정과 소속감에 대한 욕구·존중의 욕구·자기실현의 욕구가 그것이다. 사회학의 근대화론이 사회의 단계적 발전을 말하고 있다면 매슬로우의 이론은 인간 발달의 단계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잉글하트는 일찌감치 1970년대에 매슬로우의 이론을 받아들이면서 산업화 및 후기산업화와 더불어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했으니, 그것이 바로 ‘탈물질주의(post─materialism)’의 등장이다. 잉글하트는 서구의 선진국들을 중심으로 점점 늘어나는 풍요로 인해 사람들은 물질적 욕구에서 해방되어 차츰 탈물질주의적 가치관을 습득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였다. 물질주의적 가치란 경제적이고 물리적인 안전, 즉 생존과 직결된 것들을 중시하는 가치관이다. 당연하겠지만, 물질주의자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살았던 사람들 중에 훨씬 더 많고, 이들은 경제성장, 권위주의적 정부, 애국심, 크고 강한 군대, 법과 질서를 선호한다. 반면 탈물질주의적 가치란 개인의 발전과 자유, 정책결정에 대한 시민의 참여, 인권과 환경을 중시하는 가치관이다. 대체로 이들은 이미 생존이 문제가 되지는 않을 정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한 상태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많다. 일단 성인이 되고 나면 가치관은 별로 변하지 않기 때문에 잉글하트는 물질주의에서 탈물질주의로의 변화는 연령효과(ageing effect)보다는 세대교체에 의한 코호트효과(cohort effect)에 의해 더 크게 초래된다고 보았다.
다시 <그림 1>로 돌아가 보면, 여기에 표시된 국가들은 모두 9개의 문화권으로 묶여 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문화권을 염두에 두고 한 분석이 아니라, 일단 분석을 해놓고 나서 문화권을 묶어보니 비슷한 문화권에 속한 나라들이 그림으로 묶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놓여 있었다는 점이다. 또 이 문화권의 구분은 새뮤얼 헌팅턴이 『문명의 충돌』에서 구분한 문명들과도 거의 일치하기도 한다. 이것은 두 개의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이 분석이 상당한 타당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분석해놓고 보니 같은 문화권끼리 가까이 놓여 있다든가 다른 학자의 문명권 구분과 일치하는 ‘우연’이 일어날 확률은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작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전세계 사람들의 가치관을 결정짓는 데에 ‘문화’의 중요성이 크다는 점이다. 같은 문화권에 속하는 나라들이 하나로 묶지 못할 정도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는 없다.
<그림 2: 65개 국가들의 경제력과 가치관>
출처: Ronald Inglehart and Wayne E. Baker. 2000. “Modernization, Cultural Change, and
the Persistence of Traditional Values.” American Sociological Review 65(1): 19~51.
주: 화살표는 필자가 더한 것임.
그러면 사람들의 가치관은 문화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일까? 그럴 리가 없다. 앞서 말했듯이 잉글하트의 연구는 근대화론의 전통에 서있기 때문이다. 근대화론은 경제성장과 더불어 사람들의 가치관도 체계적으로 변화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가치관은 문화뿐만 아니라 경제성장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잉글하트가 웨인 베이커(Wayne Baker)와 공저한 논문에서 가져온 <그림 2>는 이 점을 실증하고 있다. <웨이브 6>을 사용한 <그림 1>과 달리 2000년에 출판된 논문에 제시된 이 그림은 <웨이브 1>(1981~1982년), <웨이브 2>(1990~1991년), <웨이브 3>(1995~1998년)의 자료를 사용하여 65개 국가의 약 20년에 걸친 변화를 추적하고 있다. 이들 국가들의 국민총생산(GNP)을 분포시켜 보면 <그림 2>에서처럼 좌하단에서 우상단으로 갈수록 경제력이 높은 뚜렷한 패턴이 발견된다. 가난한 나라일수록 전통적이고 생존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아주 부유한 나라들은 세속합리적이고 자기표현적인 가치관을 가진다. 조금 더 자세히 보면 변화의 방향은 좌하단에서 우상단으로 직선으로 이동한다기보다는 화살표로 표시한 것처럼 일단 위로 이동한 다음 우측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보인다. 2,000달러 미만에서 2,000~5,000달러 영역으로 갈 때에는 자기표현적 가치는 거의 늘어나지 않고 세속합리적 가치만 급격히 늘어나다가, 그 다음 구간인 5,000~15,000달러 영역으로 가야 자기표현적 가치가 늘어나기 시작한다. 특이한 것은 같은 5,000~15,000달러 영역에 있더라도 세속합리성이 강한 국가들은 자기표현적 가치가 별로 늘어나지 않는데 비해 전통합리성이 강한 국가들은 자기표현적 가치가 빠르게 늘어난다는 점이다.
미국, 캐나다, 아일랜드 같은 영미권 자유주의 국가들이 여기에 속한다. 15,000달러를 넘어가면 거의 예외 없이 자기표현적 가치가 강해지고, 북유럽─대륙유럽의 사민주의 국가나 조합주의 국가들은 동시에 세속합리성이 강해지는 반면 영미권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전통적 가치를 유지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제 다시 <그림 1>로 돌아가서 한국의 위치를 보자. 한국은 강한 세속합리성과 강한 생존적 가치의 조합(혹은 강한 세속합리성과 낮은 자기표현적 가치의 조합)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한국보다 현저하게 강한 세속합리성을 갖는 나라는 스웨덴 등 소수의 북유럽 국가들과 일본 정도밖에 없다. 중국이나 일부 발틱 국가들도 한국보다 강한 세속합리성을 보이지만 큰 차이가 아니어서 통계적 검증을 해보면 오차범위 안에 있을 수도 있다. 이처럼 한국은 세로축에서는 상당히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가로축에서는 <그림 2>의 일반적인 경향과 달리 매우 낮은 값을 보인다. <그림 2>에 사용된 <웨이브 3> 자료는 1995~1998년 사이에 수집된 것인데, 이 기간 동안 한국의 GNP는 연도별로 23,432달러, 25,298달러, 19,176달러, 7,355달러였다. 1997년과 1998년에는 IMF 위기에 따른 원화가치의 급락으로 GNP가 낮게 나타나지만 그 직전까지 이미 2만 달러를 넘은 상태였고, 2000년이 되면 다시 19,000달러 선을 회복한다. 가치관이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시기 한국인들은 대체로 2만 달러 수준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림 2>를 보면 15,000달러를 넘어서면 거의 예외 없이 높은 수준의 자기표현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데, 한국만은 예외인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림 2>는 <웨이브 3> 자료에 근거해서 특정 시점의 국가들 분포를 비교하는 것이기 때문에 소득이 늘어남에 따라 정말로 가치관이 변하는지를 정확히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림 3>은 <웨이브 1>, <웨이브 2>, <웨이브 3>에 모두 참여한 33개 국가들을 대상으로 이 기간 동안 각각의 국가들이 어느 방향으로 이동했는지를 보여준다. 그림에서 보듯이 상당수의 국가들은 우상단으로 가거나, 위로 가거나,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우상단으로 이동한 대표적인 나라들은 스웨덴, 일본, 벨기에 등 이다. 오른쪽으로 가지는 않았지만 위로 이동한 나라들은 폴란드, 헝가리 등 구 동구권 국가들이다. 이탈리아, 스페인, 미국 등은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원점을 향해 좌하단으로 이동하거나 아래, 혹은 왼쪽으로 이동한 나라들도 있다. 좌하단으로 옮겨간 벨라루스, 러시아 등이 있고, 아래로 옮겨간 나라로는 중국이 대표적이며, 왼쪽으로 간 경우로는 에스토니아가 있다.
<그림 3: 33개 국가의 가치관 변동, 1981~1998>
<표 1>은 가치관 변화의 유형별로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하는 국가들이 해당 기간 동안 1인당 GDP 변화가 얼마나 있었는지, 그에 따라 <그림 2>를 통해 예측할 수 있는 가치관 변화의 방향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림 3>에서 확인할 수 있는 실제 가치관 변화의 방향은 무엇이었는지를 정리하고 있다. 표에서 보듯이 거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가치관 변화 방향의 이론적 예측과 실제 변화가 일치한다. 예외라고 한다면 기존 소득이 매우 낮은 상태에서 빠르게 증가했기 때문에 위로 움직일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오히려 아래쪽으로 크게 움직인 중국, 1만 달러 이상 소득에서 더 늘어났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움직일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변동이 없었던 핀란드와 한국 정도이다. 중국의 경우에는 기존의 세속합리성이 이미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을 정도로 높은 상태였기 때문에 소득이 늘었다고 해서 더 올라갈 여력이 별로 없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고, 다른 한 가지는 광활한 지역의 특성상 중국에서 신뢰성 있는 전국 단위 사회조사를 한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작업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핀란드는 1981~1996년 기간 동안 두 배가 넘는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가치관 변화가 없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그림 2>와 <그림 3>에서의 핀란드의 위치를 확인해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핀란드는 1인당 GDP가 1만 달러를 조금 넘었던 1981년에 이미 매우 높은 수준의 세속합리성과 자기표현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다. 즉 핀란드는 일찌감치 가치관 변동을 이루었기 때문에 소득이 더 늘어난다고 해서 크게 변화할 여지가 별로 없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실질적으로 한국이 거의 유일한 예외사례가 된다. 한국은 1981~1996년 기간 동안 명목 GDP 상으로 무려 7배 정도의 경제성장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변함없이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81~1996년 기간 동안 한국인의 가치관이 변하지 않은 것은 자기표현적 가치관이 늘지 않은 것에 기인하기보다는 소득이 매우 낮았던 1981년에도 이미 높은 수준의 세속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던 데 기인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1981년의 1인당 GDP는 $1,968로 <그림 2>의 좌하단 2,000달러 미만 구간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 정도의 소득이라면 1981년에 한국은 좌하단에 있다가 1996년까지의 기간 동안 소득증가와 함께 위로 이동해왔어야 정상인데, 한국은 1981년에 이미 매우 높은 수준의 세속합리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별로 변화할 여지가 없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중국이 $317에 불과했던 1990년에 이미 최고 수준의 세속합리성을 가지고 있었던 점이나, 1981년의 일본(이미 1만 달러 이상 소득수준이기는 했지만), <그림 1>에서 대만이나 홍콩 역시 높은 세속합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은 문화권의 영향일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1인당 GDP 13,254달러였던 1996년에서 27,000달러가 넘은 최근까지 자기표현적 가치관도 전혀 늘어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2015년에 만들어진 <그림 1>을 보면 한국은 거의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아무런 변화 없이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다. 1981년의 가치관과도 별 차이가 없으니 30년 세월 동안 가치관 변화 없이 지냈다고도 할 수 있다. 1981~1996년 기간 동안 변화가 없었던 것은 주로 일찌감치 높아진 세속합리성 때문이라고 한다면, 1986~2015년 기간 동안 변화가 없는 것은 자기표현적 가치관이 늘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한국인의 가치관은 오랜 세월 동안 요지부동으로 제자리를 지켜왔다.
<그림 4: 5개국 물질주의자 대 탈물질주의자 비교>
앞서 설명했듯이 자기표현적 가치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경제와 안보를 중시하며 자민족중심주의에 빠진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 된다. 다른 말로 환경보호, 외국인이나 성적 소수자에 대한 관용, 양성평등 등을 중시하는 사람도 적고, 정치적·경제적 영역의 의사결정에서 참여를 요구하는 사람들도 적다는 뜻이기도 하다. 앞서 생존적 가치 대 자기표현적 가치를 나타내는 가로축은 물질주의 대 탈물질주의의 구분과도 관련된다고 했다. 그러니 자기표현적 가치가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겪었던 경험을 중시하고 안보와 성장을 중시하는 물질주의자들이 많다는 뜻이고, 개인의 발전과 자유, 정책결정에 대한 시민 참여, 인권과 환경을 중시하는 탈물질주의자는 적다는 뜻이다.
<그림 5>는 세계가치관조사 <웨이브 5>를 사용해 필자가 직접 계산한 5개국에서 물질주의자와 탈물질주의자의 비중을 보여준다. 한국을 제외한 다른 네 나라에서 강한 탈물질주의와 약한 탈물질주의를 합친 탈물질주의자의 비중은 대체로 45% 근처이다. 국민의 절반 정도가 탈물질주의자이고 나머지 절반 정도가 물질주의자인 것이다. 그러나 미국(47.22%), 일본(42.95%), 스웨덴(51.32%), 멕시코(45.96%)와는 달리 한국에서 탈물질주의자는 14.4%밖에 되지 않는다. 우리보다 소득이 높은 나라들은 물론이고 1인당 GDP $7,000~$10,000를 횡보하고 있는 멕시코조차 우리의 세 배가 넘는 탈물질주의자들을 가지고 있다.
왜 그럴까. 왜 한국에서는 환경보호, 관용, 평등, 참여, 인권 같은 가치에 대한 지지가 늘어나지 않는 것일까. 물론 전쟁의 경험을 빼놓을 수 없다. 탈물질주의적 가치의 대척점에 있는 물질주의적 가치는 성장과 안보를 무엇보다 강조한다. 한국은 끔찍한 전쟁을 겪었을 뿐 아니라 아직도 북한이라는 위험천만한 군사력과 대치상태에 있다. 그러니 안보를 우선시 하는 경향이 강한 것은 이해가 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강의 기적’을 얻은 대신 치러야 할 대가일 수도 있다. 필자는 다른 글에서 1945년 혹은 그 이후에 독립한 국가들 122개의 명단을 나열해 본 적이 있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 국가들의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거나 혹은 어느 대륙에 있는지도 모를 나라들이 대부분이다. 그나마 익숙하거나 한국과 비견할 만한 나라라면 오스트리아, 인도, 이스라엘, 싱가폴 등 4~5개 국가에 불과하다. 그러니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경제성장을 얻은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고 말해야 한다. 하지만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여기에도 대가는 따른다. 빠른 성장은 필연적으로 거품을 동반하는데, 한국의 경우 이 거품은 자산의 80%를 차지하는 부동산으로 주로 몰려있다. 성장이 둔화된다는 것은 거품이 꺼진다는 뜻이고, 거품이 꺼지면 자산의 80%인 부동산이 주저앉는다. 한국인들은 그것이 거품이든 무엇이든 계속해서 성장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장은 안보와 더불어 물질주의적 가치의 핵심축이다.
왜 요지부동인가─공민(共民)의 부재에 대한 증거들
송복 선생은 쿠즈네츠(Kuznetz)를 인용하면서 “어느 나라든 중진국에서 선진국에 이르는 데는 많은 함정들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넘기 어려운 함정은 선진국 바로 문턱에 도사리고 있는 ‘국민의식 전환’이라는 함정이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경제가 수십 배 성장했는데도 변하지 않는 한국인의 가치관, 요지부동의 가치관은 우리가 선진국에 도달하지 못하도록 지금까지 발목을 잡아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변치 않는 가치관의 내용은 무엇인가. 앞에서는 잉글하트의 논의에 기대어 높은 세속합리성과 낮은 자기표현적 가치관(혹은 높은 생존적 가치관)을 지적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한국인의 가치관은 왜 오랜 세월 동안 같은 자리에 멈추어 있는 것일까. 송호근 선생은 국가와 시민사회 양쪽에서 그 기원을 추적한다. 먼저 국가의 차원에서, 그는 “한국에서는 개인의 자유, 주체성의 탐색보다 집단적 민족주의와 성장위주의 국가주의가 시민계층으로 발돋움하던 개별 시민의 텅 빈 마음을 장악했다. ... (중략) ... ‘국민의 과잉’은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자율권을 포박당한 채 빈곤탈출을 향한 근대화·산업화 과제를 동시에 추진해야 했던 한국의 국가적 상황과 국제정치적 위상에서 기인한다”고 지적한다. “20세기 초반, 독일에서는 교양시민과 노동계급의 연대가 만들어졌”지만, 성장이 가장 뚜렷한 성과이자 정치적 정당성의 근거였던 한국의 “지배집단에게 계급적 세계관은 여전히 불온했고, 빈곤층, 노동계급, 저항집단의 절규는 성장저해적 독소로 규정되었다.” 이렇듯 한국의 국가는 성장, 안보, 민족주의(자민족 중심주의)를 끊임없이 주입하면서 그 정당성을 유지해왔다.
그 대척점에 있는 시민사회는 아이러니컬하게도 국가를 닮아간 측면이 있다는 것이 송호근 선생의 해석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적의 척결, 권위주의체제에 도전했던 운동권의 행동양식이 그대로 답습되었다는 뜻에서, 지난 30년 87년 체제하의 민주화의 양식을 ‘운동론적 민주화’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의 한 가지 결과는 “운동에너지가 정당정치와 연결되지 못하고 폭발하거나 거리에서 소멸하기를 반복”해온 것이다. “그리하여 운동론적 민주화가 상실한 것은 바로 ‘시민성’의 본질에 대한 성찰”이라는 것이 그의 관찰이다. 이것은 한국 민주화의 성취와 시민사회를 폄훼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시민의 탄생’이 미처 이루어지기 전에 서둘러 그들을 ‘국민’으로 호명하고, 성장과 안보를─그리하여 그것의 구현자인 국가를─지지하게끔 동원해온 국가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시민사회가, 그리고 민주화가 불가피하게 국가를 닮아오게 된 저간의 사정을 잡아낸 것일 터이다.
국가와 시민사회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불행하게도 더불어 사는 시민, 즉 ‘공민(共民)’의 부재라는 것이 송호근 선생의 진단이다. “보편적 의미의 시민은 푸코의 개념을 빌리면 ‘타인에의 배려’를 내면화한 존재, 공익에의 긴장감을 실행하는 존재를 지칭”하는데, 한국에서 ‘더불어 사는 시민’ 개념은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의 뼈아픈 지적을 다시 인용하면, “부자 동네에서 일어난 저 치졸한 장면은 모두 개별화된 ‘국민’으로만 살아온 탓이다. 국가 명분에 수직적으로 동원된 원자화된 개체인 국민은 수평적 관계에는 한없이 미숙한 존재다.”
그의 관찰이 맞다면, 이제 우리는 왜 한국에서 유독 ‘경제적이고 물리적인 안전’(다른 말로 성장과 안보)이 그토록 중시되고, 물질주의는 그리도 강하며, 신뢰와 관용의 수준은 낮고, 환경보호, 외국인이나 성적 소수자에 대한 관용, 양성평등, 정치적·경제적 영역의 의사결정에의 참여와 같은 민주주의적 가치의 광범위한 확산이 이루어지지 않아왔는지 그 단초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것들은 하나 같이 높은 세속주의와 낮은 자기표현적 가치를 유지하게끔 만드는 가치관의 내용들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경험적 증거들은 송호근 선생의 이러한 관찰을 지지하고 있을까.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가 수행한 연구결과들을 보자.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헌법이란 그것에 근거하여 국가가 성립하는 근본 원칙이자 그 사회에 존재하는 최소한의 합의라고 할 것이다. 그 헌법 중에서도 가장 앞줄을 차지하고 있는 원칙이 바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선언이다. 다른 말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의 두 축 위에 성립한다는 선 언이기도 할 것이다. 불행히도 성인의 과반수가 ‘한국적 민주주의’ 아래에서 교육을 받아온 대한민국에서 민주주의라고 하면 ‘다수결’밖에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고 공화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인용하는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의 저자들은 한국사회의 공공성을 크게 문제 삼으면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에 입각하여 공공성을 네 개의 하위영역으로 나누었다.
민주주의적 요소는 ‘공민성’과 ‘공개성’, 그리고 공화주의적 요소는 ‘공익성’과 ‘공정성’이다. 이들은 이러한 개념구분에 입각하여 OECD 34개 국가들 중 자료가 가용한 30개 국가들의 공공성을 분야별로 평가하고 전체 순위까지 도출하였다.
<표 2: OECD 30개 국가의 공공성 및 하위영역 순위>
<표 2>에서 보듯이, 경험적 증거는 송호근 선생의 관찰을 지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은 30개 국가 중 공공성 순위 30위라는 참담한 결과를 보이고 있다. 하위 영역별로 보아도 공화주의적 가치를 나타내는 공익성과 공정성에서 모두 30위이고, 민주주의적 가치를 나타내는 공민성과 공개성에서도 각각 29위와 28위로 거의 꼴찌에 가깝다. 흥미로운 것은 <표 2>의 공공성 순위와 <그림 1>에 나타난 세계문화지도의 가로축, 그러니까 자기표현적 가치관의 순위가 매우 높은 상관관계를 가진다는 점이다. 독자들도 국가명을 하나씩 짚어가면서 이 두 결과들을 비교해보기 바란다. 공공성 순위가 높은 나라들은 거의 예외 없이 자기표현적 가치가 높은 나라들이다. 공공성 1위에서 10위에 속하는 나라들은 <그림 1>의 우상단에 몰려있고, 공공성 순위가 낮아짐에 따라 점점 더 왼쪽 그리고 아래쪽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왼쪽으로의 이동이 더 두드러진다. 예외라고 할 만한 나라들은 공공성 순위가 21~23위로 낮은데도 불구하고 <그림 1>에서는 상당히 높은 자기표현적 가치관을 보이는 영국, 프랑스, 미국뿐이다. 이러한 결과는 한국의 공공성 수준, 혹은 송호근 선생이 지적하는 ‘공민성의 결여’가, 소득이 높아져도 자기표현적 가치관이 늘어나지 않는 ‘요지부동의 가치관’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리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자기표현적 가치관이 늘지 않는 한, 물질주의를 버리고 탈물질주의적 가치관에 마음을 열지 않는 한, 공공성은 높아지지 않고 ‘공민’도 등장하기 어렵다.
생각해보면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더불어 사는 시민’은 타인을 관용하고 모두의 평등과 인권을 생각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송복 선생이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쿠즈네츠의 지적이 옳다면,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필요한 ‘국민의식 전환’의 방향은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좋은 질서는 무엇인가─사회의 질적 발전
김우창 선생은 “좋은 질서는 정치와 경제를 포함하면서, 인간성의 실현의 요구에 답하는 것이라야 한다. 이 실현의 가능성 대한 생각을 그 무정형의 전체 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 문화라고 할 수 있다. …… 인간성의 요청 또는 인간성에 대한 이해를 이미 이루어진 대로 내장하고 있는 삶의 근본적 틀이 문화이다. 경제나 정치는 그 틀 안에서 행해지는 인간행위이다”라는 말로 방대한 논의를 시작하고 있다. 이어서 선생은 “좋은 사회질서는 참으로 많은 요인으로 이루어지는 복합적인 질서이다. …… 개체 의 삶은 추상적 구조로 파악되는 사회의 틀에서 영위되면서도, 대체로 생활세계(life─world) 속에서 현실화되고 개체의 실존 속에서 구체화된다”고 설명한다. 사회과학의 용어로 번역한다면 선생의 ‘문화’ 혹은 ‘사회질서’는 최근 주목을 받고 있는 ‘사회의 질(social quality)’이라는 개념과 상당히 가깝게 있는 것 같다. 이 개념을 처음 제안한 학자들은 사회의 질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사람들이 스스로의 안녕과 개인적 잠재력을 늘려나갈 수 있는 방향으로 공동체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삶에 참여할 수 있는 정도”
이들은 사회의 질을 구성하는 네 개의 조건적 요인(conditional factors)으로 사회경제적 안전(socio─economic security), 사회적 포용성(social inclusion), 사회통합(social cohesion), 그리고 사회적 역능성(social empowerment)을 제시하였다. 앞의 두 개는 시스템의 영역에 해당하고, 뒤의 두 개는 생활세계의 영역에 해당한다. 김우창 선생의 ‘사회의 틀’과 ‘생활세계’에 조응하는 구분이다.
또한 사회경제적 안전과 사회통합은 ‘사회 수준의 발전(societal development)’의 영역이고, 사회적 포용성과 사회적 역능성은 ‘개인 수준의 발전(individual development)’에 해당하는데, 이 또한 김우창 선생의 ‘추상적 구조’와 ‘개체의 실존’에 조응한다고 할 수 있다.
사회의 질에 대한 연구는 사실상 GDP가 과연 사회의 발전을 측정하는 좋은 지표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회의(懷疑)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연구 흐름들과 궤를 같이 한다. 김우창 선생의 지적처럼 “성장한 경제가 가져오는 부(富)가 참으로 인간적 행복을 증대하는 것인가 또는 인간적 가능성의 구현에 도움을 주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 말이다. 삶의 질(quality of life) 연구 의 전통은 말할 것도 없고, 스티글리츠 위원회의 보고서, OECD가 주도해온 ‘GDP를 넘어서(Beyond GDP)’ 이니셔티브와 그 결과로 만들어진 ‘더 나은 삶의 지표(Better Life Index)’ 등이 모두 같은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재열과 장덕진은 사회의 질 개념을 수정·보완하고 경험적 측정을 시도한 연구를 발표한 바 있다. 기존의 사회의 질 개념이 주로 유럽의 문제의식과 상황에 맞추어 만들어졌고, 경험적 연구의 전통을 결여하고 있어서 실제 측정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OECD 국가들 중 자료가 가용한 국가를 모두 포함하고, OECD 회원국은 아니지만 국제적 관심의 대상이거나 과소대표된 지역을 보완하기 위해 4개 국가(중국, 브라질, 아르헨티나, 태국)를 추가해 34개 국가의 사회의 질을 분석하고 국가별 순위는 물론, 수정된 사회의 질 개념과 조건적 요인들을 제안하였다. 분석에 사용된 지표는 모두 19개인데, 요인분석(factor analysis)을 거쳐 다음과 같은 네 개의 요인으로 구분되었다.
<그림 5: 수정된 사회의 질 조건적 요인들>
요인분석에 근거하여 새로 만들어진 사회의 질 조건적 요인들(<그림 5>에 제시)은 앞서 소개한 김우창 선생 논의의 출발점을 더 잘 반영한다. 비록 양적인 분석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선생의 논의가 담고 있던 풍부함이 많이 사상(捨象)되었다는 한계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많은 요인으로 이루어지는 복합적 질서”는 비교적 체계화된 형태로 <그림 5>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분석결과에 근거해 이재열과 장덕진은 원래의 사회의 질 개념을 수정할 것을 제안하는데, 수정된 정의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수정 제안에서, 참여는 주로 생활세계 2(정치적 역능성)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려면 생활세계 1(사회적 역능성)에서 공동체가 살아나야 하고, 이것은 다시 체계 2(복지와 안전망)에서의 안녕과 체계 1(인적자본투자와 회복탄력성)에서의 개인의 잠재력이 증진될 것을 요청한다. 참여가 일어나는 구체적인 공동체의 영역은 다양할 수 있다. 그것은 사회적일 수도 있고(생활세계 1), 경제적일 수도 있고(체계 1), 문화적일 수도 있다(생활세계 2).”
34개 국가 중 19개 지표가 모두 가용한 나라는 26개인데, 이 26개 국가에 대한 평가에서도 한국은 꼴찌에서 네 번째인 23위를 차지해서 앞의 공공성 평가 결과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지면의 제약으로 인해 전체 순위 평가 결과를 여기에 모두 인용하지는 못하였으나, 여기에서도 또 한 번 확인되는 것은 사회의 질과 세계문화지도 사이에 체계적인 관계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사회의 질 순위가 높은 국가들은 거의 예외 없이 우상단에 모여 있는데, 사회의 질 1위에서 18위에 이르는 국가 중에 우상단을 벗어나는 국가는 18위를 차지한 체코 정도이다.
사회의 질 하위로 내려갈수록 국가들은 세계문화지도의 왼쪽 혹은 아래쪽을 향해 퍼져나가기 시작하는데, 역시나 이번에도 주로 왼쪽으로 퍼져나가는 양상을 보인다. 즉 공공성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사회의 질도 주로 생존적─자기표현적 가치관과 높은 상관관계를 보인다는 뜻이다. 이재열과 장덕진은 19개 지표에 대한 집락분석을 통해 사회의 질 유형을 구분하였는데, 그 결과가 <표 4>에 제시되어 있다.
체계의 질과 생활세계의 질을 각각 ‘높음’과 ‘낮음’으로 구분하면 논리적으로는 네 가지 유형이 존재하지만, 실제 분석결과는 체계가 높고 생활세계가 낮은 유형은 현실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세 가지의 유형이 존재하는데, 한국은 두 값이 모두 낮은 Type III에 속한다. 이들 유형들의 전반적 사회의 질 순위는 당연히 Type I > Type II > Type III의 순서로 나타날 텐데, <그림 5>에 제시된 조건적 요인별로 나누어 보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그림 6>이다.
<그림 6: 사회의 질 유형별 조건적 요인별 평균 점수>
그림 6에서 보듯이 Type I에서 Type III로 갈수록 각 조건요인별 사회의 질 평균 점수가 낮아지고 있다. 유형별 평균점수는 국가별 차이를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가운데에는 한국만 분리해서 별도의 마름모 모양으로 표시했는데, 한국은 독특한 모양을 보여준다. 여러 지표를 동시에 고려하여 집락간 거리를 계산하는 집락분석의 특징으로 인해 한국은 Type III에 속하지만, 사회적 역능성은 소속집단의 평균을 크게 웃돌고 회복탄력성도 소속집단 평균을 약간 능가한다. <표 3>으로 돌아가 보면 사회적 역능성을 구성하는 변수들은 언론자유, 정부효과성, 인터넷 사용자 비율, 부패인식지수, 권리의 보장 정도, 젠더 역능성, 일반 신뢰였다. 이것은 많은 한국인들이 느끼는 상황과는 큰 차이가 있을 것이다. 이처럼 상식에 반하는 결과가 얻어진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우리는 우리의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지만 같은 집단에 속한 나라들 중 상당수가 우리보다 훨씬 열악한 상황에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2011년에 출판된 이 연구가 2009년 자료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사회적 역능성을 구성하는 대부분의 지표들은 참여정부 기간 동안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고 그 이후 드라마틱하게 하락했다. 2017년이 된 지금도 여전히 높은 값을 유지하는 지표는 아마도 인터넷 사용자 비율 정도일 것이다. 만약 2016년의 값을 대입하여 다시 계산한다면 사회적 역능성은 <그림 6>보다 크게 후퇴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표 3>으로 돌아가면 회복탄력성을 구성하는 변수들은 여성고용률, 남성고용률, 공교육비 지출, 대학진학률이다. 한국의 여성고용률과 공교육비 지출은 OECD 평균에 비해 낮지만, 실업률이 낮은 편이고 대학진학률이 세계 최고 수준이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얻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유형별로 보았을 때 가장 낮은 Type III에서조차도 현저하게 낮은 복지와 안전망(체계 2), 그리고 역시 크게 낮은 정치적 역능성이다. 복지와 안전망을 구성하는 변수들은 상대빈곤율, 공적사회지출, 노조조직률, 연금의 소득대체율이다. 이것들은 대체로 OECD 꼴찌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지표들이고, 한국인의 삶을 가장 괴롭히는 문제들이고,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이 과거의 가치관을 버리지 못하게 하는 요인들이다. 이것들이 주로 문제를 제공하는 영역이라면 그 해결은 정치적 역능성의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할 터이다. 하지만 그림에서 보듯이 한국은 정치적 역능성 또한 Type III 평균보다도 낮다. 정치적 역능성을 구성하는 변수들은 제도신뢰, 투표율, 총조직참여율, 민주주의 평가이다. 이 변수들은 그 동안에도 늘 지적되어오던 한국사회의 고질적 문제들이지 만, 소위 ‘국정농단’ 사태로 인해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광화문에서 이어지고 있는 ‘촛불’과 ‘맞불’을 생각하면 참담하기 이를 데 없다. 헌법을 수호해야 할 가장 큰 책임을 가진 대통령이 공식 조직이 아닌 비선을 통해 국정을 농단케 하고 사익을 취하려 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고, 그럼에도 송복 선생의 지적처럼 ‘견위수명(見危授命)’으로 ‘수범(垂範)’을 보이기는커녕 법과 제도의 허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기준에서 보면 철면피나 다름 없”는 행태를 이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과연 누가 이 나라의 ‘제도를 신뢰’할 것인지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의 여러 문제들이 주로 ‘복지와 안전망’의 영역에서 오고 있다면 그것을 해결할 열쇠는 ‘정치적 역능성’의 영역에 있다. 그러니 현재의 국가위기를 어떻게 건너느냐에 따라 문제 해결의 열쇠를 찾을 수 있느냐의 여부가 달라질 것이다.
어떻게 건너야 할까. 송복 선생은 “지난 세기 90년대 이래의 민주화시대 첫 30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역사적 동력]은 무엇인가. 국민들은 아직도 산업화시대 성공모델의 관성에 젖어, 대통령 1인의 빼어난 능력이나 형안(炯眼) 정치력 등의 리더십에 기대고 있다. ... [좋은] 헌법 [좋은] 제도, [좋은] 정치인과 [좋은] 국가를 등식화하던 정치낭만주의는 이 시대의 것도, 다음 시대의 것도 아니다. 그런 기대는 일찌감치 접는 것이 좋다. 허망한 기대는 언제나 허망하다”고 말한다.
그렇다. 민주화 이후 한국은 언제나 정당이나 정책이 아니라 대통령 후보 개인에 대한 투표를 해왔다. ‘정당’이나 ‘정책’이 아니라 ‘팬덤(fandom)’이나 ‘캠프’ 중심의 정치가 횡행했다. 그것이 정점에 이른 것이 아마도 2012년 18대 대선일 것이다. 박근혜 후보의 소위 ‘콘크리트 지지층’은 그가 무엇을 하든 상관없이 후보 개인에게 열광했고, 그 열광의 이유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후보의 부친인 박정희라는 또 다른 개인이 나온다. 한국의 산업화를 이끌고 ‘한강의 기적’을 만든 대통령의 딸이니 그도 역시 훌륭한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허망한 기대’는 역시나 허망할 뿐이었다. 그는 기어코 자신의 손으로 박정희 시대의 파국적 종언을 만들어내고야 말았다.
무엇을 할 것인가─의식, 제도, 그리고 그것의 통합
그럼 이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또 한 번의 ‘허망한 기대’를 맞닥뜨리지 않기 위해 두 가지 길을 생각할 수 있다. 송복 선생의 해법은 ‘의식의 전환’에 방점이 있고, 송호근 선생의 해법은 ‘사회민주화와 복지정치’라는 보다 제도적인 차원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 ‘보다 나은 사회란 보다 인간적인 사회’임을 설득하는 김우창 선생의 해법은 여러 지점에서 이 두 가지 해법을 통합하려는 시도라고 생각된다. 먼저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송복 선생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경험적 자료로부터 시작해보자.
의식의 해법: 노블레스 오블리주와 ‘불안사회’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영역의 특성상 이와 관련한 경험적 자료를 찾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된다. 소위 ‘노블레스’라고 불릴 만한 최상위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은 일단 접근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그들의 현황을 파악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나아가 그들을 대상으로 사회조사를 한다거나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필자는 다행히 그들을 직접 대상으로 한 것은 아닐지라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에 대한 한국인의 의식을 조사하고 관련 지표를 개발하는 연구에 참여한 적이 있다.
<그림 7: 언론보도에 나타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의미 네크워크>
<그림 7>은 1990년~2009년 기간 동안 동아일보와 경향신문에 보도된 노블레스 오블리주 관련 기사들을 모두 합하여 자주 언급된 단어들의 의미 네트워크를 분석한 결과이다. 사각형은 ‘노블레스’라고 불릴 만한 집단, 그리고 원은 그들이 하고 있는 혹은 해야 할 ‘오블리주’를 나타낸다. 가장 많이 언급된 ‘노블레스’ 집단은 정치인, 부자, 기업인, 고위관료 등이고 그들이 해야 할 ‘오블리주’는 ‘기부’, ‘준법’, ‘병역’이 가장 크고 그 뒤를 이어 ‘탈세’, ‘사회봉사활동’, ‘탈루’, ‘뇌물’ 등의 단어가 연결되어 있다. 안타까운 것은 ‘기부’와 ‘사회봉사활동’ 정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노블레스 오블리주’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시민으로서의 최저선’들이라는 점이다. 즉 대부분의 기사가 ‘노블레스’가 ‘오블리주’ 하는 미담을 보도하기보다는 법을 안 지키고 병역을 회피하며 탈세와 탈루를 하고 뇌물을 받는 비뚤어진 노블레스에 대한 보도들이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송복 선생이 요청하는 “계속 존경심을 유발”하고 “계속 도덕심을 높여주는” 집단은 적어도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언론 보도를 통해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동안 받아온 ‘공적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나라가 어려우면 내 몸을 바치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내 목숨을 내놓는” 노블레스는 눈에 띄지 않는 것이다.
<그림 8: 노블레스 점수와 오블리주 점수의 분포도>
그런데 이 최소한의 ‘오블리주’조차도 막상 진짜 ‘노블레스’들은 그다지 하지 않고 있다는 평가가 <그림 8>에 제시되어 있다. 같은 보고서는 전문가 AHP(Analytic Hierarchy Process)를 활용하여 집단별 노블레스 점수와 오블리주 점수를 산출하였는데, 그 둘의 분포도가 바로 이 그림이다. 가로축에서 오른쪽에 있을수록 노블리스 점수가 높은 집단, 그러니까 더 ‘핵심적 노블리스’라고 할 수 있고, 왼쪽에 있을수록 노블리스 점수가 낮은 집단, 그러니까 일종의 ‘주변적’ 노블레스라고 할 수 있다. 세로축은 각 집단이 어느 정도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는지에 대한 평가이다. 비록 최소한의 ‘오블리주’일망정 핵심적 노블레스가 더 많이 수행하고 있다면 분포는 좌하단에서 우상단으로 향해야 한다. 그러나 그림에서 보듯이 전문가들의 평가 결과는 거꾸로 좌상단에서 우하단으로 향하고 있다. 가장 핵심적 노블레스인 정치인이나 대기업 최고경영자들은 최소한의 노블레스조차 별로 실천하지 않고, 주변적 노블레스인 시민단체 간부나 노조 간부 같은 사람들이 그나마 어느 정도의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평가한 것이다.
이것은 최상위의 인생을 사는 노블레스에 대한 질투 섞인 평가의 결과일까? <그림 7>과 <그림 8>은 노블레스 본인들에게 물은 것이 아니라 한국의 노블레스 집단들이 얼마나 오블리주를 실천하고 있는지 분야별 전문가들에게 물은 결과이다. 그들 중 일부는 본인들이 노블레스일 수도 있겠으나, 대개는 아닐 것이다. 그러니 노블레스를 인정하지 못하는 시샘 때문에 핵심 노블레스일수록 더 짜게 평가한 것은 아닐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가 <표 5>와 <표 6>에 제시되어 있다.
<표 5: 5개국 학력별 관용성의 차이>
<표 6: 5개국 계층별 관용성의 차이>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가 앞에서 소개한 세계가치관조사 자료를 사용하여 52개 국가의 관용성 수준을 평가했더니, “자녀에게 관용성을 가르쳐야 한다”는 응답은 한국에서 45.3퍼센트로 52위, 즉 꼴찌로 나타났다. 충격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나와 다르거나 나보다 못한 사람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의식을 자녀에게 가르치겠다는 응답이 52개 국가 중 꼴찌라니. 이것은 소득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응답 빈도만 비교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녀에게 관용성을 가르치겠다는 한국인의 비율은 1인당 GDP 1,807달러에 불과한 르완다(56.4%)보다도 낮다.
나는 이 주제와 관련하여 대중강연을 할 기회가 있으면 이 결과를 보여주며 청중들에게 묻는다. “여러분의 고등학생 자녀가 공부를 잘 하는 편인데, 같은 반에 성적이 낮은 초등학교 동창생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녀에게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네가 좀 도와줘라, 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걔랑 놀지 마라, 이렇게 말씀하시겠습니까?” 한국인의 관용성이 르완다보다도 낮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던 청중들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놀지 말라고 말할 것 같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표 5>와 <표 6>을 보자. 두 개의 표는 한국, 독일, 일본, 네덜란드, 미국을 비교하고 있는데, 한국과 미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에서는 교육수준이 높아질수록, 그리고 계층이 상승이동 할수록 관용성이 유의미하게 높아진다. 이것이 우리의 상식이다. 한마디로 ‘먹고 살 만해지면’ 너그러워지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과 미국에서는 그러한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똑같이 차이가 없지만 한국과 미국의 사정은 다르다. 표에서 보듯이 미국은 70퍼센트 대에서 차이가 없다. 즉 미국인들은 교육수준이 낮아도, 계층이 낮아도 어느 정도의 관용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한국은 다섯 나라 중 가장 낮은 40퍼센트 대에서 차이가 없다. 다른 말로 한국인들은 교육수준이 높아져도, 계층이 높아져도 “소용없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결과는 왜 ‘노블레스’가 ‘오블리주’를 하지 않는지를 짐작하게 해준다. 사회적 지위는 높아졌지만, 지위가 낮은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고, 노블레스가 돼봤자 오블리주라는 측면에서는 ‘소용없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지위가 높아지더라도 송호근 선생의 말처럼 “타인에의 배려를 내면화” 하지 않고, 송복 선생의 말처럼 “내가 잘나서, 내가 능력과 경쟁력이 있어서 지금 이 자리에 올라와 있고, 그리고 지금 받고 있는 것은 국가 국민으로부터 받는 [특혜]가 아니라, 내 피와 땀과 눈물의 대가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김우창 선생이 프리드리히 쉴러를 인용하여 말하듯이, “약함은 신성한 것이 되고 고삐 풀린 힘은 수치스러운 것이” 되기는커녕, 고삐 풀린 힘만이 난무한다.
<그림 9: ‘본인이 부자라는 인식’과 ‘부자이기 위한 최소 자산 인식’, 2012~2016>
왜 그럴까. 왜 한국에서는 더 많이 배워도, 지위가 높아져도 너그러워지지 않을까. 필자는 그것이 ‘불안사회’의 징후라고 생각한다. 언론기사를 찾아보니 9급 공무원의 첫해 연봉은 2천만 원 남짓 하고 성과급을 제외하면 한 달에 134만 원 수준이라고 한다. 결코 높다고는 할 수 없는 액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년 수십만 명의 젊은이들이 9급 공무원 공채에 몰려든다. ‘불안사회’에서 ‘안정성’을 희구하기 때문이다. 기업에 비해 연봉이 낮아도 좋으니 안정적으로 살고 싶다는 말이다. 심각한 취업난과 고용불안정성 때문에 장기적인 삶을 계획할 수 없게 된 젊은 세대가 불안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고 하자. 문제는 최상위층도 불안해 한다는 점이다. <그림 9>를 보자.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가 매년 발행하는 『한국부자보고서』라는 흥미로운 책자가 있다. 여기서 ‘부자’는 부동산을 제외한 금융자산만 10억 원 이상 가진 사람들이다. 10억 원이면 대략 미화로 1백만 달러이니 말 그대로 ‘백만장자(millionaire)’를 말한다. 2016년 보고서에서 이 백만장자들을 상대로 “본인이 부자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더니 64.8퍼센트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그나마 2012년 68.0퍼센트에 비하면 조금 줄어든 응답이다. 그러면 “부자가 되기 위한 최소 자산(부동산 제외)은 얼마인가”라고 물었더니 평균값이 70억 원이고, 100억 원 이상 있어야 부자라고 답한 사람이 41.3퍼센트에 달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일반인들에게 물은 것이 아니고 10억 원 이상의 금융자산을 가진 ‘백만장자’들에게 물은 것이다.
경기침체와 더불어 그나마 ‘부자들의 부자 기준’도 많이 낮아진 것이다. 2012년 응답에서는 부자이기 위한 최소 기준의 평균이 100억 원이었고, 그 이상 있어야 부자라고 응답한 부자들이 68.8퍼센트였다.
왜 이렇게까지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일까. ‘불안’하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에는 부자들의 연령에 대한 정보가 나와 있지 않은데, 최대한 젊게 잡아서 한국 부자들의 평균 연령이 40세이고 앞으로 살날이 40년 남았다고 가정해보자. 이 보고서에 따르면 부자들은 자산의 절반 정도를 자녀에게 증여할 계획이라고 한다. 부동산을 빼고 보더라도 부자의 기준이 70억 원이라고 하니 35억 원 정도를 증여하겠다는 뜻이다. 그러면 남은 40년 동안 35억 원을 스스로를 위해서 쓰고 죽는다는 계산이다. 별도의 투자도 하지 않고 이자 한 푼 없이 금고에 쌓아놓은 돈을 꺼내 쓰기만 한다고 가정해도 죽을 때까지 매일 24만원씩 써야 소진할 수 있는 돈이다. 한 달이면 약 750만원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부자들은 은퇴 후 ‘적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생활비를 월 평균 715만 원이라고 응답했다고 하니 얼추 들어맞는 액수이다. 이렇게 본다면 금융자산 “1, 20억밖에” 없는 부자들은 스스로 부자가 아니라고 답하는 것이 맞다. 스스로 생각하는 ‘적정한 삶을 유지하기 위한 기준’에 비추어 보면 아직도 4, 50억은 더 벌어야 하는 것이다.
얼핏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 계산에 빠져있는 것이 있다. 바로 국가와 사회로부터 오는 지원이다. 내가 어려운 상황이 되었을 때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고 나의 문제는 순전히 나 혼자 해결한다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을 각오했을 때에만 이 계산이 성립한다. 2016년의 상용근로자 평균임금은 월 319만 원이었으니, 연 3천8백만 원 남짓하다. 2016년 한국의 저축률은 8.66퍼센트로 OECD 5위를 기록했는데, 그 자체가 저금리에도 불구하고 워낙 노후가 ‘불안’하니 저축이 늘어나는 ‘저축의 역설’이다. 평균 연봉에 저축률을 곱해보면 연간 330만 원쯤 저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미 OECD 5위이니 저축률이 더 높아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모아서 70억 원 자산을 가진 부자가 되려면 2,121년이 걸린다. 한 생에서 50년간 경제활동을 한다고 가정하면 42번 새로 태어나야 한다. 한국에서 부자가 된다는 것은 가히 ‘영겁(永劫)의 목표’라 할 만하다. 부자의 기준이 이처럼 비현실적인 것은 각자도생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삶에는 혼자서 풀어야 할 문제가 있고 함께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 그런데 탈상품화(decommodification)의 영역이 지극히 협소한 한국은 거의 모든 문제를 개인에게 맡겨놓고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백만장자도 불안한 것이다.
불안사회이기 때문에 ‘노블레스’도 ‘오블리주’ 하려 들지 않고, 자신의 자녀들도 각자도생해야 할 것을 알기 때문에 관용을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그러니 ‘의식의 전환’을 위해서는 ‘제도의 전환’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제도의 해법: 사회민주화와 복지정치
이제 ‘사회민주화와 복지정치’라는 송호근 선생의 해법으로 가보자. “시민민주주의의 제도적 조건”을 말하면서 선생은 사회민주화와 복지가 그 조건이라고 주장한다. 인용해 보면, “시민성과 공민을 말하는 데에 왜 갑자기 사회민주화와 복지정치인가? 시민성(공민)은 사회민주화(복지정치)의 전제이고, 사회민주화는 시민성을 강화하는 토양이기 때문이다.……(중략)……사회민주화의 초점은 불평등해소와 격차 줄이기다.” 요약하면, 불평등과 격차가 줄어들면 시민성도 고양된다는 말이 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제대로 된 시민민주주의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림 10: 소득불평등과 공공성의 관계>
<그림 10>은 소득격차를 나타내는 지니계수와 <표 2>에서 제시했던 공공성 점수간의 관계를 보여준다. 지니계수가 커질수록, 즉 불평등이 심해질수록 공공성 점수가 커지는(공공성이 높아지는) 상당히 뚜렷한 관계를 보여준다.
소득 불평등이라는 하나의 변수만으로 공공성 분산의 23퍼센트 이상을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어서 둘 사이의 관계는 상당히 강력하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송호근 선생의 ‘공민’과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의 ‘공공성’이 거의 비슷한 개념이었음을 상기한다면, “불평등과 격차가 줄어들면 시민성이 고양된다”는 주장은 상당한 경험적 지지를 받는다고 할 수 있다.
<그림 11: 공공성과 1인당 GDP간의 관계>
그러나 세계 최고 수준의 물질주의적 가치관을 가진 한국에서, 백만장자도 불안해하는 한국에서, 격차를 줄이면 시민민주주의가 꽃필 수 있다는 말만으로는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필자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세월호 참사를 겪은 이후에도 ‘안전=비용’이라는 인식이 팽배하지 않은가. 공익에 대한 투자는 종종 그것의 경제적 효과를 함께 말해야 공감을 얻는다. 그래서 함께 제시된 것이 <그림 11>이다. 공공성이 높아질수록 GDP도 함께 높아진다. 그림을 보면 한국의 공공성 점수가 4.5에 조금 못 미치는데, 우리가 아직 한 번도 넘어보지 못한 3만 달러의 벽을 넘은 나라치고 공공성 점수 5.5를 넘지 못하는 나라는 하나도 없다. 3만5천 달러를 넘은 나라치고 공공성 점수 6.5를 넘지 못한 나라도 하나도 없다.
왜 그런가. 공공성으로 측정된 사회민주화와 성장 사이에 왜 뚜렷한 관계가 존재할까. 송호근 선생은 “복지=기업경쟁력 강화=일자리 지키기라는 등식”에서 그 답을 찾는다. 한국에서는 복지를 늘리는 것은 재정에 부담을 주고 일자리를 지키는 것은 기업에 부담을 준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둘 다 성장에 저해가 되는 것이기에 복지도 늘리지 말아야 하고 정리해고도 쉽게 해야 한다는 인식이다. 그런데 복지를 늘리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 어쩌면 ‘벚꽃 대선’이 될지도 모를 차기 대선을 앞두고 대선 주자들은 심지어 기본소득제까지 거론하고 있지만, 기본소득은커녕 아무런 복지제도도 새로 만들지 않고 OECD 꼴찌에서 세 번째인 현행 그대로 유지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복지가 늘지 않았으니 재정부담도 늘지 않을까? 세계 최고 속도로 진행중인 고령화를 생각해보면 그럴 리가 없다는 답이 쉽게 나온다. 연금과 의료 혜택을 받아야 할 고령층은 빠르게 늘고 세금을 납부할 경제활동인구는 빠르게 줄어드는데, 현행 복지제도를 그대로 유지한다 한들 재정부담이 늘지 않을 리가 없다. 아무런 정치적·사회적 합의도 하지 못한 채, 따라서 제도적 정비도 하지 못한 채, 고령화와 그에 따른 재정부담만 늘려나간다면 우리의 미래는 최선의 시나리오를 상정하더라도 최악의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남유럽이다. 그러니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서서히 고사(枯死)하기 전에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 송호근 선생의 해법은 ‘복지=일자리 지키기’라는 등식의 가운데에 ‘기업경쟁력 강화’를 끼워 넣어서 ‘복지=기업경쟁력 강화=일자리 지키기’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자리 정치’를 통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고, ‘양보와 헌신의 교환계약’이 가능할 때 비로소 ‘시민성의 발화’도 더 이상의 성장도 가능해진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는 혹여 성장하지 못할까봐 물질주의를 놓지 못하고 있는데, 물질주의를 놓아주지 않고는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는 역설이다. 아들의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화살을 쏘아 맞혀야 하는 윌리엄 텔의 심정을 생각해보자. 제아무리 신궁(神弓)이라 해도 날아가는 새를 쏘는 것과 사랑하는 아들의 머리 위에 놓인 사과를 쏘는 것은 같을 수 없다. 평소 같으면 눈 감고도 맞출 수 있을 사과를 겨누는데, 그것이 아들의 머리 위에 놓여있기 때문에 손이 떨린다.
절대로 실수하면 안 되기 때문에, 반드시 맞춰야만 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실수할 가능성은 그만큼 더 커진다. 이것은 마치 물질주의를, 성장과 안보를 놓지 못하는 한국인의 마음의 길과도 같다. 반드시 성장해야 하기 때문에, 절대 여기서 주저앉아서는 안 되기 때문에, 물질주의를 놓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성장 못할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성장해야 하기 때문에 시민민주주의를 당분간 외면하고, 그렇기 때문에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는 역설이다.
통합의 해법: 심미국가와 현실의 예비 작업
“보다 나은 사회란 보다 인간적인 사회”임을 설득하는 김우창 선생의 해법은 송복 선생의 ‘의식의 전환’과 송호근 선생의 ‘제도의 전환’을 통합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쉴러를 논하면서 김우창 선생은 “이것은 인간 발전─개인적 품성은 물론 국가적 체제 자체가 그러한 것이 될 때 비로소 인간성의 자연스러운 표현이 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성 완성을 사회적 정치적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가치관과 제도가 다른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으로 읽힌다. 다시 쉴러 논의의 연장선에서 선생은 “처음에 성립하는 국가는 ‘힘의 국가’이다. 그것은 힘과 힘의 충돌 속에서 성립한다. (홉스가 말하는 국가가 이러한 것이다.) 그 다음에 진화하여 나오는 것은 ‘윤리 국가’이다. 여기에서 윤리는 개인 의지를 일반 의지에 종속하게 한다. 그러나 심미국가에는 힘과 윤리적 제재를 위한 국가 기구는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집단 질서는 자유 의지와의 조화와 균형 속에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김우창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필자는 힘의 국가도, 윤리적 제재의 국가도 아닌, 자유의지와 집단 질서가 조화된 하나의 사례를 금방 떠올릴 수 있었다. 2014년 여름 베를린에서 필자가 직접 인터뷰했던 클라우스 퇴퍼(Klaus Topfer) 박사로부터 들은 이야기이다. 퇴퍼 박사는 독일 하원 의원이자 환경과 지속가능성 분야의 국제적 거물이며, 무엇보다 2021년까지 독일 내의 모든 원전을 폐쇄하고 신재생에너지로 전환한다는 메르켈 정부의 결정을 이끌어내는 데 핵심 역할을 한 원자력윤리위원회의 공동 의장을 지냈다. 독일의 에너지 전환은 메르켈 정부만의 독단적 결정이 아니라 길게 보면 40여 년 동안 사회운동과 정당정치, 시민사회의 싱크탱크, 에너지 기업들과의 협상, 신재생에너지 산업의 육성, 사회적 합의를 거치며 이끌어낸 결실이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겠는가. 퇴퍼 박사가 들려준 에피소드 하나를 기억나는 대로 재구성해보면 다음과 같다.
“신재생에너지의 가격이 원자력보다 비싸다고 하는데, 그건 나라마다 다릅니다. 독일은 오랫동안 신재생에너지에 투자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원자력보다 싸게 공급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신재생에너지가 비싸던 시절, 독일 일부 지역에서는 집집마다 전기콘센트를 두 종류씩 만들어줬습니다. 하나는 원자력, 다른 하나는 신재생에너지입니다. 돈을 더 내고라도 신재생에너지에 꽂을 사람은 꽂으라는 거였죠. 그런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비용을 감수하고 신재생에너지로 만든 전기를 쓰더라고요.”
여기에는 힘의 국가에 의한 강요도, 윤리국가에 의한 비난도 없다. 국가는 사람들의 자유의지가 발현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줬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의지로 공익에 동참했으며, 그것은 하나의 집단질서를 만들어 에너지 전환이라는 전대미문의 정책실험을 가능하게 했다. 적어도 이 부분에서 독일은 ‘심미국가’의 현현(顯現)을 경험한 것이다. 새뮤얼 콜리지(Samuel Coleridge)와 막스 리히터(Max Richter)에 대한 김우창 선생의 해석은 또 어떤가. 선생이 인용한 콜리지의 구절을 다시 적어본다.
당신이 잠이 들고 잠 속에서 꿈을 꾸고 꿈속에서 하늘나라에 갔다가, 기이하고 아름다운 꽃을 한 송이 꺾었는데, 잠에서 깨어나 보니, 당신의 손에 그 꽃이 들려 있다면, 그렇게 되면?
선생은 “꿈과 현실의 혼융(渾融)은……(중략)……현실의 예비 작업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이것을 더 설명하기 위해 김우창 선생은 막스 리히터를 소환한다. “리히터의 곡은 이에 비슷한 꿈의 창조적 가능성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음악은…… (중략)……상상된 현실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의 현실 경험을 새롭게 창조하게 한다. 그 점에서 음악·리히터의 음악은 창조를 위한 공간─일정한 질서를 가진 공간을 제공한다. 잠도 이러한 의미에서 창조의 공간이다. ……(중략)……잠이란, 그의 생각으로는, 존재와 비존재의 중간에 있는 ‘가사상태(假死狀態) 또는 가생상태(假生狀態)’를 말한다. ……그가 묻는 것은…… (중략)……
음악은 참으로 잠과 의식이 공유하는 창조적 공간인가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사회과학자인 필자에게 이 해석은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들린다. 잠과 의식을 사회과학에 빗대면 현실과 이상, 현재와 미래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은 정치이고 정책이다. 정치나 정책은 현실과 이상, 혹은 현재와 미래가 공유하는 창조적 공간이어야 한다. 에너지 분야에서 독일이 경험한 심미국가의 현현을 우리도 가능하게 하려면 성장하지 못할까봐 부릅뜨고 깨어있는 의식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말처럼 들린다. 잠들어야 하고 꿈꿔야 한다.
‘요지부동의 한국인’들에게 ‘의식의 전환’과 ‘제도의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현실에만 매몰되어서는 요원한 일이다. 더 나은 사회는 ‘상상된 현실’이고, 더 나은 사회를 꿈꾸는 것은 ‘현실의 예비작업’이다. 더 나은 사회는 아직 존재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단정적으로 불가능한 것도 아니어서 “존재와 비존재의 중간에 있는 ‘가사상태(假死狀態) 또는 가생상태(假生狀態)’”이다.
이 가능태(可能態)를 현실태(現實態)로 만드는 것이─마치 음악처럼─정치와 정책이 만들어내야 할 ‘창조를 위한 공간’이다. 정치와 정책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해준다면 “잠에서 깨어나 보니 …… 당신의 손에 그 꽃이 들려”있을 것이다.
정치와 거버넌스의 공간
그렇다면 ‘의식의 전환’과 ‘제도의 전환’을 통합하여 ‘더 나은 사회’로 가는 것은 정치의 영역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고 할 것이다. 김우창 선생이 소개하는 쉴러의 ‘힘의 국가’를 우리는 민주화 이전까지 경험했다. 87년 체제 동안 우리가 겪은 것은 ‘윤리국가’였는지도 모른다. 여기에서는 ‘개인 의지를 일반 의지에 종속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정치체제로 보면 다수제 민주주의와 친화성을 가지고, 대결적 정치를 조장하는 경향이 있으며, 포퓰리즘의 유혹에 취약하다. 한국 유권자의 과반수가 ‘한국적 민주주의’를 배우며 자랐는데, 그때 배운 민주주의의 내용은 다수결밖에 없었다. 한 표라도 많으면 그것이 곧 ‘일반 의지’가 되고, 한 표라도 적은 ‘소수’는 ‘전체’를 위해 ‘다수’에 동의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그 교과서는 당시의 한국 정치가 체육관 선거를 비롯한 수많은 장치들을 통해 그들이 항상 다수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점은 설명해주지 않았다. 한 표라도 많으면 전체를 가지는 승자독식의 제도는 당연히 대결적 정치를 조장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하는 것이다. 이기려면 다수를 유혹하는 정책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곧 포퓰리즘이다. 한국이나 그리스에서 보듯이, 우파나 좌파, 진보나 보수에 상관없이 포퓰리즘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스를 보라. 월 스트리트 저널은 유로존 최악의 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에 대해 “문제의 근원은 ‘승자독식’의 다수제 정치체제에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리스는 다수당에게 의석 300석 중 50석을 덤으로 붙여줌으로써 정치적 안정성을 도모하려고 시도해왔으나,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점이 증명되었다. 실제로 1974년 이래 그리스는 신민당과 사회당이 승자독식을 위해 경쟁적으로 재정지출과 공공부문 고용을 늘려나감으로써 엄청난 국가부채를 쌓았고, 그것이 오늘날 위기의 직접적 도화선이 되었다. 배가 충돌경로로 가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선장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나는 항로를 바꾸지 않겠다”는 이기심의 누적이 오늘의 위기를 만든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을 차지하기 위해, 그리고 지금은 그 자리에서 파면되지 않기 위해, 나라야 어떻게 되든 말든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한국의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다.
적어도 에너지 정책의 영역에서 독일이 경험한 ‘심미국가’는 사실상 합의제 민주주의의 산물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에너지 정책을 놓고 40년을 논의할 수 있다는 점 자체가 우리에게는 놀라울 따름이다. 불과 5년 전 녹색성장은 다 어디로 갔으며, 박근혜정부 창조경제의 운명은 또 어떻게 될지 불을 보듯 뻔하지 않은가. 1972년~2002년까지 30년에 걸쳐 독일 연방하원의 노동사회위원회(이하 노사위)를 거쳐간 의원들의 경력을 분석한 트람푸쉬의 연구에 따르면, 시기별·정당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들은 최소 80개월에서 최대 160개월까지 노사위에 머물렀다. 이렇게 오랫동안 하나의 정책영역에 집중하면서 경총과 노총, 각종 싱크탱크에 이르기까지 노동 관련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친분을 맺고 이익다툼을 조정하는 것이 독일 합의제 민주주의의 미시적 기초이다. 의원들의 경력관리를 위해 4년 임기 동안 최소 한 번 이상 상임위를 바꾸는 것이 기본인 우리 국회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다. 이것이 합의제 민주주의의 미시적 기초라면, 그 제도적 조건은 물론 비례성 높은 선거제도와 연정을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다당제에 있다.
100일이 넘도록 이어지고 있는 탄핵정국에서, 만약 탄핵이 인용될 경우 60일 이내에 대선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대선 전 개헌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물론 개헌이 불가능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불과 얼마 전까지 ‘개헌은 블랙홀’이라던 대통령이 자신의 살 길을 찾기 위해 개헌을 정략적 먹잇감으로 국회에 던짐으로써 오염시켰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염되어서건 현실적인 문제 때문이건 대선 전 개헌이 쉽지 않다는 데에는 동의할 수 있다. 그러면 선거법은 왜 안 바꾸는 걸까?
우리의 선거제도가 많게는 절반 가까운 유권자의 선택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리고, 거대정당에게만 유리하기 때문에 소수파 입장을 가진 국민들을 대표하지 못하며, 현역 의원에게 유리하기 때문에 정치 신인들에게 높은 진입장벽을 친다는 것은 상식이 된 지 오래다. 선거제도 개편의 방향이 무엇이어야 한다는 점도 이미 널리 공유된 상태이다. 그러나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 해법도 안다고 해도, 거대 양당이 국회를 장악한 상태에서는 그들의 이익에 역행하기 때문에 선거제도는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탄핵정국으로 인해 원내진입 정당만 해도 5당 체제가 된 지금이야말로 불합리한 제도를 바꿀 좋은 기회가 아니겠는가. 당장 내각제 개헌을 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개헌을 할 것인지, 만약 한다면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지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정치체제 하에서는 정권교체가 된다 해도 대결적 구도는 반복될 가능성이 높다. 개헌 여부와 무관하게 정치의 합의적 성격을 지금보다 훨씬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어야 하고, 선거제도 개편은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독일 사례 하나만 보고 너무 일반화 하는 것은 아닐까? 합의제 민주주의에 너무 높은 점수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제도가 아무리 좋다한들 누가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 아닐까? 여러 질문들을 해볼 수 있다. 모두 타당한 질문들이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는 1980~2009년까지 30년 기간 동안 노사관계와 복지제도 변화에 대한 자료를 모두 구할 수 있는 20개 OECD 국가들을 대상으로 거버넌스 유형을 구분하기 위한 시퀀스 분석(sequence analysis)을 실시한 바 있는데, 그 결과가 <표 7>에 정리되어 있다.
분석 대상은 20개 국가였지만 <표 7>에는 18개 국가만 제시되어 있다. 왜냐하면 한국과 일본은 다른 어느 나라하고도 비슷하지 않은 독자적 유형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이 두 나라는 아직까지 다른 어느 나라와도 비슷한 안정적인 거버넌스 유형을 만들지 못했다는 뜻이다. 마침 이 분석이 DNA 염기서열 분석에 사용되는 시퀀스 분석 방법이었음을 생각하면, 적어도 거버넌스라는 관점에서 볼 때 족보가 없는 고아가 되어버린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집단 1, 2, 3은 정치체제와 경제체제의 조합만으로 구분이 가능하다. 집단 3 내부에는 두 개의 하위집단이 있는데, 이들은 노사협약에 국가가 개입하는지 아니면 전적으로 노사 자율에 맡기는지에 따라 3-1과 3-2로 나뉜다.
<그림 12: 거버넌스 유형에 따른 불평등, 고용률, 실업률>
그럼 이 세 집단(혹은 세분하면 네 집단)에 속하는 국가들의 성과는 과연 어떨까. <그림 12>는 한국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불평등과 노동시장의 영역에서 이 세 집단의 최근 성과를 비교하고 있다.
먼저 소득불평등은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1집단과 2집단이 높고 3집단이 낮다. 고용률은 1집단이 미세하게 높지만 3집단과 거의 같고, 2집단이 낮다. 실업률은 2집단이 현저하게 높고 그 다음이 3집단과 1집단 순서이다. 정리하면, 불평등이 심하고 고용률이 낮고 실업률이 높은 2집단(다수제 혹은 합의제 + 국가지배시장경제)은 세 부문에서 모두 빨간불이 들어온 상태이다. 1집단(다수제 + 자유시장경제)은 불평등에서 빨간불이 들어왔지만 고용률과 실업률은 파란불이라고 할 수 있다. 3집단(합의제 + 조정시장경제)은 불평등과 고용률에서는 파란불인데, 실업률에서 중간을 차지해 노란불 정도라고 할 수 있겠다. 전반적으로 볼 때 3집단의 성과가 평균적으로 가장 높은 셈이다. 여기에서 도표로 제시하지는 않았지만, 3-1과 3-2로 나누면 노사자율협약을 하는 3-2집단의 성과는 다른 어떤 집단과 비교해도 모든 면에서 현저하게 높다. 그렇다면 앞에서 했던 우려는 너무 크게 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어느 한 나라의 사례를 일반화한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의 30년간 역사적 경험과 최근 5년간의 성과를 종합적으로 평가해도 합의제 민주주의의 성과가 좋은 것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송복 선생은 ‘노블레스’의 의식 전환과 더불어 일반 국민들의 의식 전환도 필요하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문치의식(文治意識)을 재고(再考)’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선생은 “그 문치의식을 계속 지니고 있는 한 우리 정치는 파당정치를 벗어날 수 없다”고까지 단호하게 말한다. 오랜 군치(軍治)와 관치(官治)의 경험 때문에 문치야말로 민주화의 결실이라고 믿는 많은 국민들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말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을 관치와 군치로 돌아가자는 말로 해석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문치의식’을 바꾸자는 선생의 뜻은 관념이 아니라 실제, 비판이 아니라 건설, 부정이 아니라 긍정의 정치를 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의식’의 측면에 초점을 맞춘 송복 선생의 제안에 대해 제도 혹은 질서의 차원에서 그 짝을 찾자면 역시 다수제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보다는 합의제 민주주의와 조정시장경제라 할 것이다. 정치세력들은 상대보다 한 표라도 더 얻어 승자독식 하려는 욕심 때문에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추상적인 관념적 비판을 일삼는다. “우리가 감옥 가면서 민주화 운동 할 때 당신은 무얼 했느냐”는 진보정치세력의 공격이나, 불리하면 무조건 ‘종북’ 타령을 일삼는 보수정치세력의 공격이나, 21세기의 현실과 무관한 관념적 정치이기는 매한가지다. 시민들이 촛불집회에 들고 나오는 손팻말의 글귀가 “이게 나라냐”일 정도로 나라가 파탄 나다시피 한 상황에서, 유력 주자들은 무엇을 ‘교체’할 것인지를 두고 설전을 벌이고 있다. 정권교체인가, 정치교체인가, 시대교체인가. 무엇인가를 교체한다는 것은 과거의 것이 잘못 되었으니 바꾸겠다는 말이다.
즉 시선이 과거를 향해 있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교체한다는 것은 있는 것을 빼내고 내가 그 자리를 채우겠다는 말이다. 어떤 정책으로 어떻게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서 채우겠다는 ‘어떻게(how)’의 약속이 아니라, ‘내가’ 그 자리를 채우겠다는 ‘무엇이(what)’의 약속이기 십상이다. 권력을 독식했던 과거의 승자를 빼내고 내가 새로운 승자가 되겠다는 것은 다수제 민주주의의 발상이다. ‘어떻게’의 약속이 없으면 ‘건설’의 책략을 만들 수 없다. 우리는 그동안 정권마다 수많은 ‘무엇’의 약속들을 경험했고, 그것들은 거의 예외 없이 허망하게 사라졌다. ‘국민행복시대’도, ‘녹색성장’도, 그 이전의 어떤 약속들도 거의 대부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부정’이 아닌 ‘긍정’의 책략은 ‘어떻게’에서 나온다. 그러니 의식의 차원에서 ‘문치의식의 재고’를 가능케 하는 제도 혹은 질서 차원의 짝은 역시 정치의 합의적 요소를 더욱 강화하고 시장의 효율을 살리되 시장이 갖는 야만을 사회적으로 합의된 틀 안에 가두는 데에 있을 것이다.
글을 맺으며
처음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기는 했지만, 써놓고 보니 아뿔싸 분수에 넘치는 글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쓰는 내내 위안이 되었던 것은 김우창 선생의 원고를 통해 알게 된 ‘변주’에 대한 리히터의 설명이었다. “변주곡은, 리히터의 말로는, “동일성, 기억, 그리고 반복(identity, memory, repetition)”을 가지고 자유로운 놀이를 가능하게 한다. …… 이 말들은 동시에 사람의 심리를 말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 즉 자기 정체성, 그것의 기억을 통한 확인, 그리고 (변형된) 정체성의 되풀이─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한국사회에 대한 세 분의 통찰을, 양적 자료를 가지고 변주하는 것이라고 위안을 삼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세 분 중 어느 분의 주장을 논하느냐에 따라 나도 모르게 그분의 생각과 심지어 말투까지 나의 글에서 묻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부족하나마 정리하자면, 실증적이고 분석적인 자료를 가지고 세 분의 사상을 뒷받침하며 나름대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너무 오래 같은 자리에 있다 보니 그 동안 위안거리로 삼아왔던 양적 성장의 신화조차 이제는 그 빛이 꺼져가려 한다. 고령화 속도를 감안하면 변화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은 아주 짧다. 가치관의 측면에서 볼 때 변화의 방향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포함한 자기표현적 가치관을 대폭 확대하는 것이다. 다름을 인정하되 공통의 문제를 함께 풀어나가는 ‘연대’의 의식을 키워나가야 하고 ‘함께 사는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세속적인 도구합리성을 사회적으로 합의된 가치합리성의 틀 안에─송복 선생의 용어로는 ‘합목적적 행동’을 ‘합가치적 행동’의 틀 안에─길들여야 한다.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한국인을 괴롭히는 수많은 문제들이 복지와 사회안전망의 영역에서 발생해서 정치와 참여의 영역에서 풀려야 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최종적으로는 정치의 창조적 가능성을 인정하고 참여해야 한다. 한국사회에 만연한 정치혐오가 아수라 같은 오늘을 만들었다. 정치를 혐오하는 것은 대표자가 아닌 지배자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기는 것이다. 설사 선한 지배자라 하더라도 그를 믿어서는 안 된다. 악한 지배자도 선한 대표자처럼 행동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슈톰카의 말처럼 민주주의는 불신의 제도화를 통해 신뢰를 만들어낸다. 우리를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게 붙잡아온 물질적 성장에의 집착을 떨쳐버려야 더 이상의 성장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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