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김우창(문학평론가,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보도일 2017.02.01

요 약
우리 사회가 보다 인간적인 사회가 되고 사회적 안정을 위해서 필요한 교육과 문화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에 대한 논리 정연한 사고를 전개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사회학자답게 정치, 경제, 사회를 넘나드는 넓은 안목과 데카르트, 제논, 플라톤, 공자를 넘나드는 사색을 통해 교육, 문화의 인문학적 사유를 들려준다.
목 차
Ⅰ 음악 없는 프롤로그─문제적인 삶의 요소들
Ⅱ 인간의 이념
Ⅲ 인간성 완성, 이성, 심미적 이성
Ⅳ 삶의 테두리
Ⅴ 글의 전개 방향
Ⅵ 경계 없는 정보의 세계
Ⅶ 인털루드─수면과 음악의 시공간/복합적 전체성의 테두리
Ⅷ 이성적 자아─데카르트의 이성과 윤리
Ⅸ 사고의 방법 너머─데카르트, 제논, 플라톤
Ⅹ 존재의 진리─플라톤의 동굴의 신화, 하이데거의 해석
ⅩⅠ 기술 시대의 사고와 삶의 틀
ⅩⅡ 물음─소크라테스/공자
ⅩⅢ 에필로그─음악이 드러내는 존재의 기초
ⅩⅣ 결론을 대신하여
내 용
[2016 연구논문]성찰적 의식: 이성과 존재─보다 나은 미래사회를 위하여
김우창(문학평론가,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삶의 세 가지 요소
우리 사회가 보다 인간적인 사회가 되고, 그러한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무엇이 필요한가, 더 간단히 말하여 살만하고 좋은 사회가 되는 데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소략한 대로 생각해보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사회 질서는 총체적으로 볼 때, 정치 질서로 집약된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경제에 의하여 뒷받침되는 것이어야 한다. 생존을, 또 한걸음 더 나아가, 생명의 번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니면 어떠한 질서도 인간다운 질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경제는, 적어도 초보적인 의미로는, 생명 유지와 번영을 위한 물질적 기초를 마련하는 데 관계된다. 그러나 좋은 질서는 정치와 경제를 포함하면서, 인간성 실현의 요구에 답하는 것이라야 한다. 이 실현의 가능성에 대한 생각을 그 무정형의 전체 속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정치나 경제의 의의 그리고 정당성은 이 세 번째의 요청에 대응하는 데에서 찾아진다. 인간성의 요청 또는 인간성에 대한 이해를 이미 이루어진 대로 내장하고 있는 삶의 근본적 틀이 문화이다. 경제나 정치는 그 틀 안에서 행해지는 인간행위이다.
정치 경제의 인간적 의의에 대한 물음
이와 같이 정치, 경제, 문화는 상호작용의 관계에 있다. 문화 속에 내재하는 인간성 실현의 요구는 준거의 기점(基点)이면서, 동시에 정치와 경제로부터 자라나온 결과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요구는 인간 존재 그리고 존재 일반의 깊이에서 나온다. 이 기반으로부터 분출하여 확산되어 나오는 힘이 모든 인간 행위의 기본이 된다. 그것은 무의식적 전제일 수도 있고 보다 적극적으로 의식화되어 반성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잠재적으로 존재하던 인간 이해가 특별한 시점에서 또는 전문적 작업에서 대상적으로 의식화되는 것이다.
정치와 경제도 인간의 구성물인 만큼, 그 목적과 결과에 대한 의식 속에서 움직인다. 그러나 그 의식은 전문 분야 고유의 요청에 한정되는 것이기 쉽다. 서열적으로 구분된 인간 행위에서 각 단계는 그 나름의 목적과 검증의 기준을 갖는다. 가령 관료조직의 여러 부분이 맡고 있는 작업에서 이것이 두드러진다. 그리하여 그것은 주어진 작업을 넘어 그 작업을 규정하는 전체적인 목적을 철저하게 고려할 여유를 갖지 못한다.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삶 전체에 대한 이해 그리고 거기에 성립하는 인간성의 실현이라는 목표에 이어지지 않는다. 이 전체적인 목표가 물음의 대상이 될 때, 의식은 보다 반성적인 성격을 띈다. 이 반성은 부분적일 수도 있고 전체적일 수도 있다. 그러한 의식이 주제가 되면, 경제나 정치 영역에서도 그 영역에서의 어떤 행위가 인간의 좋은 삶 그리고 참다운 삶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를 물을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보다 철저하게 묻기 위해서는 인간성의 존재방식에 대한 전체적인 물음이 있어야 한다. 물론 이러한 반성적 물음이 늘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 물음은 문화 속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가지 요청으로 시사되어 있다. 그러면서 사회가 가지고 있는 교육의 계획에서 그것은 의식화되고 삶의 지침이 된다.
개인과 삶의 복합 체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좋은 사회란 좋은 사회질서를 말하는 것인데, 어떤 목적에 의하여 정의되는 질서란, 그것이 인간 활동의 어떤 부분을 가리키든지 간에, 집단적 기율을 상정하는 것이어서, 자칫하면 전체주의에 이르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자연스러운 삶의 균형으로서의 문화의 의미를 손상하는 일이 된다. 교육의 경우도 그것이 단순히 교조적인 가르침의 주입으로 이해된다면, 인간의 인격 형성─특히 자기 형성의 과정으로서의 교육의 의미를 손상하는 일이 된다. 이러한 기율이 바르게 존재하려면, 그 기율을 포용하고 있는 질서는 전체를 지탱하면서 개인이 자유의지로 선택하고 승복할 수 있는 것을 허용하고 촉진하는 것이라야 한다. 인간의 자기 형성은 스스로의 모습에 일정한 모양을 준다는 것인데, 이것은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원리를 찾아 그 모습을 형성한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개인에 의하여 자유롭게 선택되면서 동시에 사회공동체 구성의 원리가 된다.
어느 쪽이든지 간에, 한편으로 정치와 경제, 다른 한편으로 문화와 교육─이 요인들의 상호관계는 단순한 일대일의 대칭을 이루지 아니한다.
좋은 사회질서는 참으로 많은 요인으로 이루어지는 복합적인 질서이다. 복합적인 질서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한 가지 의도나 설계도로서 만들어질 수 없는 복합체계(complex system)라는 말이다. 질서의 구성에 있어서 잊히기 쉬운 것은 인간 생존의 기초가 개인의 삶에 있다는 사실이다. 개체의 삶은 추상적 구조로 파악되는 사회의 틀에서 영위되면서도, 대체로 생활세계(Life─world) 속에서 현실화되고 개체의 실존 속에서 구체화한다. 그러면서도 삶의 현장으로서의 사회 질서는 일정한 전체성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럼으로써, 그것은 인간의 삶에 대한 규제이면서 동시에 그 전체의 변화의 가능성에 열려 있게 된다. 그리고 개인의 자기 형성의 원리가 된다. 다만 그것은 여러 가지 변주를 허용하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자의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 열림의 기반은 인간의 삶의 전체에 대한 이해이다. 이 이해는 문화에서 온다. 그러면서 그것이 개인의 자기 형성 그리고 상황에 대한 적응 그리고 새로운 가능성으로의 열림을 가진 것이려면, 그 이해는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적 이해─반성적 이해이어야 한다.
인류학적 연구에서 흔히 그러듯이, 한 사회를 종합적으로 말함에 있어서, 문화라는 말이 자주 쓰인다. 그와 관련하여, 문화의 유형(patterns of culture)라는 말이 있지만, 모든 문화는 일정한 행동의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양식이 완전히 굳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고와 정서 그리고 행동의 양식화 공식을 말하는 것이어서 인간 행동의 여러 가능성의 포용과 배제를 정의한다. 이 삶의 가능성의 양식에 대한 정의(定義)는 인간이 부딪치게 되는 사실에 관련하여 성립하는 것이면서 그것을 넘어 일정한 가치를 내포한다. 그러나 문화도 역사적 누적에서 오는 것이니만큼 사실의 무게를 가지고 있다. 그 사실의 밑에 있는 것은 가치에 따른 실천적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선택은 가치와 목적에 따른 선택이다. 살아 있는 문화는 오늘의 현실을 가치와 목적의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하고, 그에 따라 가치 지향을 활성화할 수 있다.
이때 가치와 목적은 물론 주어진 현실 속에서 그리고 보다 넓은 역사적 경험 속에서 갱신되고 다른 한편으로 보다 보편적 인간 이상에 가까이 가는 것이 될 수 있다.
정치, 경제, 환경─인간적 삶의 균형
그런데 오늘날 문화는 거의 전적으로 정치와 경제의 종속변수가 되어 있다. 그 중에도, 경제는, 삶의 모든 면에 삼투하여, 문화도 거의 전적으로 경제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경제성장, 소득 증가와 소득 격차, 그리고 소득 분배의 공평성과 같은 말들은, 지금에 있어서, 사회 문제를 논하는 데에, 소위 키워드들이 되어 있다. 개인적 삶의 차원에서도 말할 것도 없이 이러한 말들의 밑에 있는 동기─소득 또는 부(富)의 축적이 모든 인간활동의 기초 동기가 되어 있다.
다시 말하여, 이것을 사회 전체 또는 국가 전체로 확대할 때. 가장 포괄적인 단어와 개념은 경제성장─그것도 국제적인 비교의 틀 안에서의 경제성장이다. 다만 얼마 전부터는 이러한 개념으로 정의되는 경제성장이 지구 환경과의 관계에서 부정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고, 이 점에 있어서, 인류 전체를 파멸의 막다른 골목으로 몰고 가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즉 인간 생존의 총체적인 틀을 고려하는 데에 있어서 환경의 문제가 가장 핵심적인 준거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커진 것이다. 그리하여 경제를 논하는 데에서도, “성장 없는 번영”(영국의 경제학자 팀 잭슨의 말)과 같은 개념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성장한 경제가 가져오는 부(富)가 참으로 인간적 행복을 증대하는 것인가 또는 인간적 가능성의 구현에 도움을 주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일기 시작했다. 그러나 개체적 삶의 차원에서, 삶의 물질적 기초가 어느 정도의 것이어야 하느냐,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실현될 수 있는 인간적 삶이 어떤 것이어야 하느냐 하는 것에 대한 문화적 해답은 아직은 없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경제 일변도의 세상이 되면서, 보다 순수한 문화적인 추구─반드시 경제와 정치에 종속하는 것이 아닌 문화적 추구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그것은 그러한 추구가 인간 내면의 깊이에서 온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가령, 개인적 구도[求道], 인생철학 또는 처신술[處身術]에 대한 욕구가 강해져 있는 것을 사회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집단적으로도 그렇지만 개체적으로도 환경─그것도 수목과 꽃과 산과 공기와 하늘이 없는 환경에서 좋은 삶은 있을 수가 없다는 깨달음이 생겨난다. 환경의 문제는 단지 인간 생존의 필요에만 관계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은 인간의 정신적 요구이다. 전통적으로 예술이 이야기해 온 것이 이것이다. 구도의 차원에까지 가지 않더라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연 속의 삶─이것이 전통적인 서화(書畵)가 표현해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증후적 행동들이 문화 전체에 대한 반성으로 승화되고, 조금 전에 말한 것처럼, 특히, 그것들을 하나의 질서 속에 거두어들일 수 있는 문화의 정치경제학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절실하게 요청되는 것은 문화정치경제학이다.
개체와 전체 그리고 보편성
말할 것도 없이, 생명체로서의 인간의 핵심에 있는 것은 목숨이다. 목숨은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밖에서 침범하는 것을 경계하고 그에 대하여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게 한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것을 자신의 이익 확대 그리고 자존감 확대의 자료로 삼을 수도 있다. 특히 경제적 자기 확대가 삶의 안정과 자존감의 기초가 될 때, 그렇다. 물론 이러한 이기심이 삶의 기본적 필요에서 나온다는 사실이 인정되어야 한다. 자기 또는 자아를 떠나서 생명의 뿌리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그리고 사람이 사회적 존재라고 할 때, 자기 확인 그리고 사회관계에서 인정(recognition, Anerkennung)의 획득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기심 일변도로 종용되는 삶은 삶을 왜곡한다. 지나치게 강조되는 윤리와 공적 관심은 억압적 전체주의에 이어질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자아의 기본적 필요와 인정에 대한 요구 그리고 그것의 과정은 그것대로 삶의 온전함, 인간의 온전함을 위한 기본이 된다. 다른 한편으로 무소부지(無所不至)의 이기심은 이 필요를 지탱하여 줄 전체적인 질서의 붕괴를 가져온다. 개체와 전체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원리 그리고 체제의 재확인은 오늘날 가장 절실한 시대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은 개체로 존재하면서 집단의 일부로 존재한다. 집단은 개체적 실존─이기심의 근원이 되는 개체적 실존 이상으로 삶의 필수 조건이다. 이기심 또는 루소가 <사회계약론>에서 구별해낸 중요한 개념으로서 자기애(amour de soi)─자기에 대한 지나친 사랑, 자만심의 사랑(amour propre)에 대하여 자기애를 삶의 기초 원리로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서는 방편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은 예로부터 집단적 삶의 핵심적 관심사였다. 인간에 대한 현대 경제의 이해는 근본적으로 인간이 이기심의 존재라는 가설에 기초한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경제의 결과는 나라의 부(富)로 종합된다고 이야기된다. 어찌되었든 오늘날의 국제 환경에서 나라 전체의 경제 상태는 국민총생산(GNP)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것이 사람들에게 의미를 갖는 것은 개인별 소득(Per Capita Income)이고 더 나아가 이 평균 소득을 다시 쪼갠 개인 소득이다.
전통적으로 개인의 이기적 본능을 극복하는 명분이 되는 것은 국가 그리고 민족에 대한 충성이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여기에도 들어 있는 이기심 또 자기중심적인 의식이다. 집단의 이익은 집단적 명분에 의하여 지양된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경우 개인이익의 집약이 되고 개인이익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이에 추가하여, 이것은 경제적 이익에 추가하여, 또는 그것보다도 사회적 인정과 권위의 관점에서의 이점을 말한다. 집단적 명분은 자기희생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자기를 확장하는 역할을 한다. 모든 권력은 집단적 명분을 가지고 있다. 집단과 개인의 관계에서 권력은 집단의 명분 속에서 확장되는 개인적 추구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완전한 이기심이라고 할 수는 없다. 권력이 내세우는 명분은 그 나름으로 독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가치가 된다. 사람에게는 직접적인 개인이익을 넘어 추상화된 명분에 의한 자기 존재의 정당화를 추구하는 본능이 있다. 개인 존재의 지양을 나타내는 추상화된 이념들의 궁극적인 의미는 신비에 속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견인력을 가지고 있다.
또 이러한 것들에 더하여 흔히 이야기되는 고향이나 출신 지방에 대한 충성, 가문과 가족에 대한 의식, 또는 학연이나 인맥 등도 개인적 이해[利害]와 집단적 정체성의 결합을 나타내는 것인데, 이것은 추상화의 매개를 거치지 않는, 개체와 집단의 보다 직접적인 얼크러짐을 나타낸다. 이러한 현상들은 개체와 그 테두리에 대하여 보다 자세하고 섬세한 분석을 요구한다.
Ⅱ. 인간의 이념
그러나 개인이나 집단을 넘어 보다 넓은 영역을 나타내는 것들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것은 대체로 이념으로 표현된다. 이념들은 어떤 추상 영역을 그려낸다. 그 영역들이 참으로 실재하는 것인가─이것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어쨌든 그것은 인간 행동에 대한 지시를 가지고 있다. 자유나 평등과 인권이나 평화와 같은 것도 그러한 이념에 속한다. 이러한 이념들은 개인들로 하여금 인간과 세계의 넓은 구역을 관심과 코미트먼트의 대상이 되게 한다. 그러한 이념들은 대체로 이성적 요소를 포함한다. 그렇다는 것은, 이념이 많은 것을 일반화하고 많은 것을 하나로 하는 원리는 합리적 사고의 논리가 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성은 하나의 테두리 안에 여러 가지 것을 포용하는 대표적인 인간 능력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래적인 정서에 연결되면, 정서도 확대되어 많은 대상을 포용한다. 그러니까 정서가 이성의 매개로 관심과 코미트먼트를 보편화하는 동인(動因)이 되는 것이다. 인(仁), 자비심, 인인애(隣人愛), 생명애(生命愛, biophilia) 등은 보편화된 정서들의 표현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다시 상기하게 되는 것은 개체와 집단 또는 전체가 반드시 모순 관계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궁극적으로 개체와 집단은 그 양자를 일체화하는 전체 속에 통합된다. 사람이 자기의 본래적인모습을 찾고 거기에 이르려 할 때, 그것은 절로 자신이 큰질서의 일부라는 것─단순히 집단적 전체가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는 전체의 일부라는 것 그리고 그 전체와의 원리가 자신의 내면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만 이 원리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창조적 자유에 의한 변용을 허용한다. 그것은 필연의 자유 또는 자유로운 필연이다. 이 관점에서 개체는 보편적 질서 속에 있으면서 그것을 통하여 자기의 가능성을 창조적으로 실현할 수 있게 된다. 이성은 그 핵심 원리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넘어가는 총체적 원리이고 동력이다. 그리고 이 원리는 끊임없는 반성을 통하여 스스로를 넘어 서게 된다. 이 반성의 실현자는 사고하는 개인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표현으로 “보편적 인간(I’uomo universale)”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개체가 진정한 개체성을 찾고 그것을 통하여 보편적 인간 이념의 전형을 구현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것은 참으로 자기실현을 원하는 사람의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연구자들이 이 “보편적 인간”을 구현한 대표격인 사람으로 흔히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1404~1472)를 든다. 그는 건축가이고 시인이고 철학자이고 그 외의 많은 일에 숙달한 사람이었다. 그는 보편적 인간─불가피하게 윤리적 인간을 상정하게 하는 보편적 이상의 인간이기보다는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다재다능(多才多能)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는 위에 말한 여러 인간 활동 분야 외에 음악 물리학 수학 등에도 밝은 사람이었다. 악기 연주도 하고 작곡도 하였다. 야콥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가 그의 르네상스 연구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서 있는 사람의 키를 훌쩍 넘어 뛸 수도 있었고, 성당의 높은 천장을 향하여 동전을 던져 천정에 맞게 할 수도 있었다.
교육과 문화
이러한 것을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그러한 재능의 인간을 따로 떼어 높이 보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이 인간적 온전함에 이르는 데에는 개체와 집단과 전체성의 범주들의 통합이 필요하다. 특히 개체와 집단의 통합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필수적 조건이다. 보편적 인간은 이러한 여러 조건을 자연스럽게 충족시킬 수 있는 이상형의 인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의미가 사회 조화와 통합에만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자체로 인간성의 실현을 의미한다.
보편적 인간 이상은 어떻게 실현 가능한가? 일단 그것은 문화의 이상이고 문화 속에 구현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을 받들어 주는 문화가 있다면, 그것은 저절로 이르게 되는 이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문화는 참된 인간성 실현을 촉진하는 요인들을 지니고 또 그에 대한 문화적 자의식이 형성되어 있는 문화의 경우이다.
문화의 보편적 인간 이상이 구현하려는 가장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노력이 교육이다. 물론 이것은 교육이 그러한 이상을 현실화할 수 있다기보다는 교육의 실천적 계획이 그 이상을 시범할 수 있다는 말이다.
교육의 이상은 인간의 자기 형성─또는 재형성의 지표를 가리키지 않을 수 없다. 그 지표가 문화에서 온다. 그리고 그것에 반영된다. 제일 좋은 상태는 조금 전에 말한바 같이 문화 자체에 인간적 조화가 호메오스타시스(homeostasis)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다양한 재능의 인간, 보편적 인간
위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인간 이상을 말하였다. 이 말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르네상스 시대의 다재다능한 인물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이고 실제 인간의 품성에 그 말을 적용한 것도 알베르티라고 한다. 그 가능성을 조금 달리 생각해보면, 그것은 보편적 인간일 수도 있지만, 다재(多才)의 인간, 또는 전인(全人)으로 번역될 수도 있다. 일단 다재인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한껏 계발 발전시키는 사람이다. 이 재능은 정신에 관련된 것이기도 하고 신체에 관련된 것이기도 하다. 이에 대하여 보편적 인간이라고 할 때, 그것은 폭넓은 관점에서 인간의 능력을 알고 그것을 한껏 계발하여 그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을 말한다고 할 것이다. 18세기 말의 독일 작가들, 괴테나 쉴러를 말할 때, 그들이 인간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이상을 “전인(全人, Der ganze Mensch)”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대체로 이러한 인간 이상을 가리킨다.
그런데 전인적 인간의 인간성은 정신이나 신체의 기능에 관계되는 것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책임을 다할 용의가 되어 있는 사람을 말한다. 보편적 인간이라는 말은 다분히 윤리적인 함의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는 것은 스스로의 삶과 세계에 대하여 넓게 관심을 가지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에 대하여서도 관용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뜻으로 이 말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사람이 모든 인간적인 가능성에 관심을 가진다고 하면, 그것은 저절로 인간 일반에 대하여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로마 시대의 키케로가 한 말이라고 인용되는 말에, “나는 인간이다. 인간적인 것으로 나와 관련이 없는 것은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Homo sum: humani nihil a me alienum puto)”라는 것이 있다.(원 출처는 테렌티우스라고 한다.) 이것은 물론 인간적 모든 것을 수용하겠다는 말은 아니고, 그러니만큼, 호오(好惡) 또는 선악의 선택을 포함하겠지만, 이 말대로라면, 이 표현에는 모든 인간에 대하여 무관심할 수는 없다는
의미가 들어 있고, 판단에 따라서는, 인간애(人間愛)와 넓은 윤리적 관심을 함축하는 말이다. 그러니만큼 보편적 인간이란, 이렇게 볼 때, 절로 윤리적 보편성을 수용하는 인간 개념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보편적 인간이라는 말을 이와 같이 재능인과 보편인 두 가지로 생각한다면, 그 상호 관계는 어떤 것인가? 이것을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하나는 자기중심적인 인간 형성론이고 다른 하나는 보편주의적인 인간 형성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교육 프로그램은, 얼핏 보기에 재능의 계발에 더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교육이 결국은 사회적인 그리고 국가적인 프로그램이라고 할 때, 그것은 보다 보편적인 인간, 철저하게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인간은 아니라도 자기중심적 관심을 넘어 시민적 의무감을 가진 인간의 양성을 지향했을 것으로 말할 수 있다.(“의무교육”이란 말이 있는데─결국은 서양에서 건너 온 개념이지만─이것은 국가가 교육의 의무를 책임진다는 말이 아니라 개인이 국가에 대하여, 국방의 의무나 마찬가지로, 교육의 의무를 진다는 말이다.) 이렇게 보면 조금 전에 말한 두 프로그램은 서로 깊은 관계에 있어야 할 것으로 말할 수 있다.
플라톤의 『공화국』에 나와 있는 철학자─통치자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은 음악, 체육, 군사훈련, 수학, 철학 등을 포함한다. 이러한 과목들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은, 통치자로 발탁되는 경우, 어릴 때부터 시작하여 서른다섯이 되었을 때야 끝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교육의 대상이 되는 과목들은 그 나름의 의의를 가지고 있다. 가령, 음악은 영혼의 함양을 위한 것이고, 체육은 당연히 신체의 단련을 위한 것이다. 수학이나 철학은 이성적 사고의 능력을 기르고 또 진선미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하기 위한 것이다. 교육을 통하여 최고의 지적 인격 훈련을 받은 통치자의 최종적인 책임은 물론 공화국의 번영을 위한 정치를 떠맡아야 한다. 동아시아의 수신의 이상에서도 이에 비슷한 다방면적 교육과 훈련의 이상을 발견할 수 있다. 『주례(周禮)』에서는 예악사서어수(禮樂射書御數)─즉 육예(六藝)를 군자가 학습해야 하는 것으로 이야기된다. 글 쓰고 수를 배우고 하는 것에 추가하여 음악, 활 쏘기, 말 타기 등을 학습해야 하는 것이다. 육예에 들어 있는 과목만으로도 동양 전통에서도 서양에 있어서나 비슷하게 정신이나 신체의 다방면적 발달이 교육의 목표가 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학습 항목들의 목표는 개인의 재능의 다변적 계발과 완성을 지향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지도자를 양성하자는 것이다. 통틀어서 볼 때, 동아시아에서 교육이 특히 윤리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인간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이러한 교육은 지배층의 인물의 교육을 의미한다. 희랍에서나 중국에서나 전통적 교육은 귀족을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교육 과정에 무술이 포함된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영웅의 이미지가 스며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인성함양의 보편적 지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러한 귀족적 교육의 이상은 오늘날 일반적인 인간성 실현의 이상으로 받아져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러한 이상을 어떻게 다양한 삶의 길을 가야하는 현대의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것이 되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현대 교육의 과제의 하나이다. 보편적 인간의 이상을 구체적 조건 속에 변주하는 것은, 오늘의 과제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