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최진희, 자야, 허령, 이경숙보도일 2016.09.30

요 약
[한국이 좋은 이주여성들과 함께]
- 그 친절한 마음이 널리 확장되기를
- 시멘트와 모래에는‘물’이 있어야
- 겨울옷을 봄옷으로 바꿔 입은 것처럼
목 차
한국이 좋은 이주여성들과 함께 - 최진희(아시안허브)
그 친절한 마음이 널리 확장되기를 - 자야(몽골)
시멘트와 모래에는‘물’이 있어야 - 허령(중국)
겨울옷을 봄옷으로 바꿔 입은 것처럼 - 이경숙(중국)
내 용
[2016 전문가 에세이] III-3. 한국이 좋은 이주여성들과 함께
최진희, 자야, 허령, 이경숙
한국이 좋은 이주여성들과 함께
최진희(아시안허브 대표이사)
아시안허브는 다문화여성들을 교육해서 일자리를 창출하는 사회적기업입니다. 오전에는 주로 초기 입국자에게 한국에 적응할 수 있도록 기초 한국어교육 및 멘토링을 해주고 오후에는 취업과 연결되는 전문 한국어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또 전문 아나운서가 이주여성들을 대상으로 스피치교육을 해주고 있습니다. 전문가 과정에는 한국에서 생활한 지 오래된 몽골, 중국 출신들이 많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한국인 못지않은 학구열과 한국어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생활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한국에 유학생으로 와서 결혼을 한 경우도 있고, 결혼을 위해 한국으로 들어온 경우도 있고…… 처음 한국을 접하게 된 동기는 다르지만, 모두가 한국인의 아내, 한국인의 며느리로 살아가면서 공통점에 맞장구치고 웃으며 서로를 다독입니다.
어느 날 오후에 우리 넷이서 짧은 얘기를 나눠보았습니다. 좌담도 아니고 토의도 아니고, 결혼이주여성 세 사람이 자신의 한국생활 경험 중에서 ‘가장 하고 싶은 말’을 발표하는 자리였습니다. 이들의 짧은 발표에는 한국인, 한국사회가 함께 공감할 긴 여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진희 한국생활이 쉽지만은 않겠지만, 이렇게 평일 오후에 전문 스피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러분 정도면 한국사회의 문화혜택을 잘 누리고 사는 사람들 아닌가요?
자야 물론 저는 유학생으로 먼저 한국에 들어왔기에, 한국의 대학캠퍼스부터 남들보다 많은 한국 문화를 접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몽골어 특성을 살려서 직장생활도 하고 있고요. 여러 가지로 행복한 한국생활이 많지만, 한국인들도 그렇죠? 학교 다닐 때가 제일 좋았다고. 저도 한국생활을 떠올리면 학창시절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같아요.
허령 저도 가족의 협조로 이 자리까지 왔는데요. 처음에는 누구든 타인들끼리의 만남은 갈등의 연속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소통이라는 단어에 집중을 하기 시작했고 가까운 사람부터 소통을 잘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봤습니다.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예의를 지키고 마음을 다하게 되면 훨씬 원활한 소통을 할 수 있고 관계가 오래 유지 되는 것 같아요.
이경숙 사람들이 저를 욕심 많은 억척아줌마라 할 수도 있어요. 직장생활을 하면서 왕복 4시간이 넘게 걸리는 여기까지 와서 스피치교육을 받고 있으니까요. 제가 한국인으로서 한국사람과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고 한국인들과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여전히 어눌한 말투는 항상 컴플렉스예요. 이렇게는 10년, 20년을 살아도 나는 외국인이겠구나 생각하니 너무 마음 아프더라고요. 그래서 이 교육도 열심히 받고 다른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사람들과 대화할 때 저도 한국사람처럼 자연스러워질 수 있겠죠?
최진희 다들 행복해 보이지만 하나씩은 고민을 안고서 한국생활을 하고 있는 커리어우먼 이주여성 세 분의 발표를 차례로 경청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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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친절한 마음이 널리 확장되기를
자야(몽골)
내가 한국에 와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유학생 시절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유학을 가는 언니, 오빠들 보고 늘 부러웠어요. 그래서 언젠가 대학교 졸업하고 꼭 유학을 떠나겠다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내가 유학을 떠나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는 항상 나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고, 더 많은 걸 배우고,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있는 친구들이 부러웠기 때문입니다. 외국어를 배우고 싶어서 학원을 다녔으면서도 잘 깨우쳐지지 않았던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면서도 유학 가고 싶은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유학 떠나는 방법을 열심히 알아 봤답니다. 어느 날 유학전문 회사에 가서 신청을 하게 되었고, 그로부터 한 달 만에 드디어 한국외국어대학교로 유학을 오게 되었습니다.
유학을 온 그날부터 “나의 행복한 유학생활”이 시작되었고, 그날부터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하였습니다.
모든 한국어 선생님들이 너무 친절하고, 수업도 재미있게 잘 진행하셔서 공부하기에 참 좋았습니다. 모든 대화를 한국어로 해야 해서,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나는 빨리 한국어를 배워야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생각보다 빨리 배울 수 있었습니다. 특히 한국 여자들의 말하는 모습이 너무 예뻐서 보고 들으며 따라하다 보니 금방 늘었답니다.
몽골에서 회사 생활을 했던 내가 학생, 유학생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나를 학생, 몽골학생, 외국인 학생이라고 부르는 것도 느낌이 신선했습니다. 외국인 친구들도 많이 생겼습니다. 우리는 한국어로 꼬박꼬박 말을 하면서 잘 어울리고, 같이 공부도 하고, 학교 친구들끼리 회식도 하고, 늘 행복했습니다. 시험 있는 날은 외국인 친구들이 “괜찮아~ 자야”라고 따뜻하게 용기를 줬답니다. 그렇게 나는 “괜찮아”라는 말을 배웠습니다. 지금도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괜찮아~ 자야”라는 말을 나 자신에게 친구들 대신으로 해주곤 합니다.
내륙 국가에서 온 내가 학교 친구들과 같이 처음 바다도 보고, 회도 먹었습니다. 지금은 바다도 회도 너무 좋아하는데, 특히 한국음식 중에 제일 좋아하는 회를 그렇게 처음 먹게 된 것이었지요.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 중에 처음 눈에 들어온 친구와는 같이 새해를 기숙사 밖에서 보내기도 했습니다.
나는 기숙사 생활을 중국인 친구랑 같이 했어요. 그녀의 이름은 “소아”였습니다. 나보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착하고, 예쁘게 생겼습니다. 그 친구가 매일 “자야 예뻐요, 자야 착해요, 자야 숙제해요, 자야 공부 열심히 해요, 자야 아프지 마요! 자야 건강해야 되요!”라는 말로 나를 보살펴줬습니다. 그녀가 나에게 새해 편지를 보낸 적도 있습니다. 나와 같이 기숙사에 살면서 생각하고 느낀 것을 적은 편지였습니다. 나는 그 편지에 정말 감동했지만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했습니다. 부모님 외에도 늘 나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헤어지는 것이 무척 슬펐습니다. 지금도 그 친구가 너무 보고 싶습니다.
한국 유학생 생활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만큼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학기마다 새로 들어온 외국인 친구들도 있고, 학기마다 본국으로 돌아간 친구들도 많았습니다. 한국 유학생 생활을 같이 했던 친구들은 서로 친해져서 헤어지기를 무척 아쉬워했습니다.
제일 기억에 남는 추억은 어느 날 내가 아파서 수업에 들어가지 못하고 기숙사에 누워 있던 때였습니다. 그때 우리 반 친구들이 수업 끝나고 약을 사 왔더군요. 그 친구들이 나를 위해 약을 사온 것만큼 기억에 남는 선물이 있을까요?
한국인과 외국인의 구별이나 경계 없이 같은 사람으로서 서로 따뜻하고 친절했던 유학생 시절의 그 마음들이 더 넓게 퍼져야만 한국사회는 더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 답니다.
저자: 자야(몽골)
1977년 5월 29일 태어남. Mongolian & Korean News 신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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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멘트와 모래에는 '물'이 있어야
허령(중국)
‘행복한 사람들은 다 똑같지만 불행한 사람들은 제각기 다르다’라는 명구가 생각납니다. 행복한 생활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한 사람의 행복이 반드시 다른 사람들의 눈에도 행복이라는 보장은 없겠지요. 하지만 그 명구에서 말하는 ‘같다’라는 말은 행복한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를 지칭하고 있습니다. 결혼이주여성으로서 내 개인적 경험에 비춰보자면, 행복한 삶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부부간의 양호한 소통일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부 사이에 소통이 원활하고 서로 믿음이 있으며, 서로 깊이 사랑하는 것이 한 가정의 행복 여부를 결정하는 주요 조건이 된다는 것이지요. 행복한 가정의 구성원들이 느끼는 행복감은 그들 내면의 안정감을 강화시키고, 갖가지 위기를 견뎌낼 수 있게 해주며, 폭풍의 습격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줍니다.
내가 이런 결론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직접 겪었던 일련의 잊기 어려운 경험 때문입니다. 나는 2004년에 중국을 떠나 한국으로 와서 지금까지 12년째 살고 있습니다. 막 한국에 도착하여 한동안은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다가 나중에 어떤 사람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교류하는 과정에서 점차 감정이 깊어지고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고, 결국 양가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 여러 친척, 친구들의 축복 속에서백년가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두 식구는 금세 네 식구가 되었고 시어머니까지 더해 지금은 다섯 식구가 함께 시끌벅적한 생활을 하고 있답니다.
내가 시어머니와 함께 산다는 얘기를 듣는 사람들은 동정 어린 말투로, “정말 쉽지 않은 일이야”, “정말 착한 며느리네.”,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한국사회의 전통에서 유교사상을 대단히 중시하고 있고, 따라서 한국 남성에게 시집가는 외국인 여성들은 고부관계를 잘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매일 아내와 며느리, 엄마라는 세 가지 역할을 무리 없이 잘 소화해내고 있습니다. 비록 모든 역할이 대단히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매일 충분한 만족감과 행복감을 느끼고 있답니다.
사실 나는 결혼생활을 시작해 얼마 동안은 이것이 행복이라고 느끼지 못했고, 우리 가족이 줄곧 화목하기만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막 결혼했을 때, 우리 부부는 성격이 잘 맞아 매일 끝없는 대화를 나누었고, 때때로 무척 낭만적인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연이어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늘어난 가사와 육아 등으로 몹시 바빠지게 되었고, 부부 둘만 있는 시간이 갈수록 적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점차 마찰이 생기게 되었고, 하루하루 아이들이 자라남에 따라 집안의 사소한 일 때문에 종종 시어머니와도 의견 차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 남편이 내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몹시 마음이 상했습니다. 걱정하실까 두려워 친정엄마에게 고충을 털어놓을 수도 없었지요. 그때는 이 세상에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심각한 우울증을 앓기도 했답니다.매일 어떻게 이런 곤경에서 벗어나야 좋을지 고민했습니다. 심지어 경솔하게 목숨을 버릴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간신히 얼마 남지 않은 나의 이성이, 나의 불행이 우리 엄마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충돌은 극한에 이르러 마침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자신의 억울함과 불만을 속 시원히 다 털어놓고 마지막으로 남편에게 함께 살아갈 방법이 없으니 깨끗하게 이혼하자고 말했습니다.
그제야 남편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되었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부부 간의 소통과 관계 조율에 관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 프로그램에서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주었던 것은 강사 선생님의 첫 번째 질문이었습니다. 강사 선생님은 내게 부부 두 사람이 매일 단 둘이 대화하는 시간을 적어보라고 했어요. 자세히 따져보니 밥하고, 청소하고, 아이들 돌보고, 빨래하고,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빼면 부부가 단 둘이 대화하는 시간이 제로에 가까웠습니다. 너무나 뜻밖에도 남편의 대답도 나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시 마음속의 느낌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답니다.
강사 선생님은 우리에게 결혼 초기의 상황으로 돌아가 상대방과의 대화 시간을 가져볼 것을 권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는 자신의 심각한 소홀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숙제가 주어졌어요. 매일 두 사람이 일정 시간을 할애해서 서로 그날 일어났던 일들과 생각에 대해 얘기를 주고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울러 하루에 몇 통의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서로 안부를 묻고 교류를 하라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하여 무슨 얘기를 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강사 선생님과 약속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고정적으로 매일 몇 번의 전화통화를 해야 했고, 집으로 돌아오면 단 둘이 대화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조금씩 상대방의 진지하고 성실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로를 고려하기 시작했으며, 연애 시절에 서로에게 보여줬던 갖가지 장점들을 기억해 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마음속의 빙산이 녹기 시작하면서 우리의 대화 시간은 갈수록 길어졌답니다. 내용도 아이들 교육에서 남편의 일과 집안의 사소한 일상까지 확대되었어요. 그리고 이러한 습관은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그 프로그램의 마지막 수업에서 강사 선생님은 우리 두 사람에게 공동으로 한 가지 미션을 수행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 미션에서 우리 부부는 두 사람이 공동으로 협력하여 묵계에 따라 최단 시간에 임무를 완수했습니다.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나는 남편이 쓴 축하 카드와 꽃다발을 받았고, 우리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우리는 매일 대화하면서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주고받는 습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방식이 두 사람의 친밀감과 귀속감을 증진시켜 주고 서로의 감정을 처음 연애할 때의 상태로 유지해줍니다. 더욱 신기한 것은 남편과의 관계가 개선된 뒤로 아주 자연스럽게 시어머니와의 관계에도 변화가 생겼다는 점입니다. 지금 나는 시어머니께서 우리 남편을 낳아주시고 나의 생각을 최대한 이해해 주신 데 대해 더없이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답니다. 간혹 나와 시어머니 사이에 생각의 차이가 생길 때면 남편이 쌍방의 입장에서 적당히 조절에 나서 줍니다.
이런 사건이 있고 나서 나는 유가의 전통이 주요 도덕적 기초로 뿌리 내리고 있는 한국사회에서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부의 화목이 가장 중요한 조건이고, 부부가 화목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 사이에 양호한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야만 서로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고, 부부관계도 안정적으로 유지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원만한 고부관계의 유지도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 될 것이고, 또한 시댁 식구들과 함께 어울리는 것도 어색하지 않은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쇠말뚝을 보고도 절을 한다”라는 애정 파급의 원리라고 생각합니다.
부부가 함께 생활하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권태기가 찾아오는 것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와 비슷한 일을 겪고 있고 부부관계를 개선시키고 싶어 하는 여성들에게 실천을 통해 성공이 확인된 내 방법을 권하고 싶습니다.
다름 아니라, 자신의 또 다른 절반과 최대한 많이 소통하는 것입니다. 부부를 시멘트와 모래로 비유한다면 소통은 물이라 할 수 있지요. 물은 아주 연약해 보이지만 시멘트와 모래를 아주 단단하게 만들어 강한 충격을 견딜 수 있는 힘을 갖게 해줍니다. 이처럼 소통은 부부가 손을 잡고 함께 안정적이고 행복한 가정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최상의 에너지입니다. 나처럼 한국에서 생활하는 모든 외국 여성들이 소통하는 습관을 통해 행복하고 자신의 뜻에 맞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기 바라 마지않습니다. 다문화가정, 이주여성가정의 행복은 한국사회의 행복을 늘리고 높이는 데도 크게 이바지할 것입니다.
저자: 허령(중국)
1972년 6월 4일 태어남. 1997년 09월~2004년 11월 중국 광동성 심천시 천도유한공사(비서 인사 행정부서 근무), 2004년 12월 한국으로 입국, 2005年 01월~2008년 07월 (주)대교 차이홍중국어 방문교사, 서울삼육초등학교 중국어 전담교사, 2008년 08월~ 2013년 08월 전업주부, 2013년 09월~2015년 06월 (주)네이버스 중국어 번역사, 2015년 07월~현재 프리렌서 번역사로 활동, 현재 번역사·서울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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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옷을 봄옷으로 바꿔 입은 것처럼
이경숙(중국)
저는 가끔 잠들기 전에 제가 한국에 처음 오던 날을 생각해보곤 합니다. 저는 2003년 3월에 한국에 처음 왔습니다. 한국과 중국은 기온 차이가 많이 나서 중국 공항에서 두꺼운 겨울 옷을 봄 옷으로 바꿔 입었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한국에 간다는 게 실감이 났습니다. 저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어느덧 한국에서 13년째 살고 있습니다.
13년 동안 크고 작은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현재 제 가족은 세 명인데, 남편은 1남 3녀 중 외아들입니다. 시댁 부모님들은 저희 집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단독주택에 살고 계시고, 저는 남편과 9살 아들과 함께 아파트에서 살고 있습니다.
지금은 별다른 문제없이 작은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지만 9년 전만 해도 불임 때문에 경제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시험관 이식을 5번이나 한 끝에 5년 만에 지금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남의 가정사도 잘 모르면서 주변 사람들은 외국인 며느리가 시댁 재산을 챙겨서 도망가려고 아이를 안 낳는 것 아니냐고 비난하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때마다 저의 시어머님께서, “세상 사람들이 다 너를 외국인 며느리라고 무시하고 비난해도 너는 내 며느리이고 나는 너를 외국인 며느리라고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으니 주변 사람들 때문에 상처 받지 말고 항상 씩씩하게 살아라”하고 다독여 주셨습니다. 저를 늘 걱정해주시고 아껴주시는 시부모님들을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한국어 공부도 해서 토픽 자격증도 받았고 다른 여러 가지 자격증들을 땄습니다.
저는 아들을 세 살 때부터 어린이집에 보냈는데 혹시라도 엄마의 억양을 따라 하다 보면 나중에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놀림을 받을까 봐 걱정이 앞섰습니다. 저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러다간 외톨이가 되겠다는 생각에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찾던 중 김포에 있는 한국이주민복지회에서 다문화 강사를 모집한다는 공지를 보고 지원을 했습니다. 연수를 받고 2012년 4월에 입사를 해서 1년 정도 다문화 강사로 일을 하다가 2년째부터는 사무 보조도 하면서 강사 활동도 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열심히 한 결과 올해는 실장으로 승진했습니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조금씩 욕심이 생겼습니다. 2013년부터 김포경찰서 외사계에서 다문화 치안봉사단 단장으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2014년 10월 21일 경찰의 날에는 김포경찰서장으로부터 외국인과 내국인 사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다고 표창까지 받았습니다. 2015년 근로자의 날에는 김포시장으로부터 결혼이민자와 중도입국자녀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표창을 받았습니다. 제가 노력한 것보다 더 큰 상을 받게 되어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어머니 방범대에 최초로 외국인 엄마로 초대되어 작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작년에는 전 국회의원인 이자스민 의원이 교장으로 있는 꿈드림 학교에 일 년 동안 다녔고 졸업식 때는 개근상에 장학금까지 받았습니다.
올해 5월에는 서울시에서 주관하는 취업 성공 멘토링에서 박원순 시장께서 직접 임명장을 주셨습니다. 현재 다섯 명의 멘티들과 열심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부족한 저를 많은 분들이 믿어주시고 좋게 봐주셨기 때문에 이렇게 활발하게 활동하며 좋은 결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만약에 중국에 있으면 이러한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겨울 옷을 봄 옷으로 바꿔 있은 것처럼, 어려움과 원망도 사랑과 행복으로 생각하면서 세상을 더 아름답게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처럼 결혼이주여성의 한 선배로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좋은 정보를 공유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 외국인 며느리들이 당당하고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한국사회의 일원으로서, 늦게 시작한 한국인으로서 말입니다.
저자: 이경숙(중국)
1976년 4월 24일 태어남. 김포시 (사)한국이주민복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