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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전문가 에세이] I-1. 가치체계를 재정립할 때가 왔다외 3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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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망고 제인 안기르, 나심 이브라힘, 일리야 벨랴코프, 아나스타씨아보도일 2016.09.30

요 약

[가치체계를 재정립할 때가 왔다]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성공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어떻게 한국사회의 불행감을 불러오는 주요원인이 되는 것일까? 한국은 자원이 풍부하지 않아서 인구가 주요자원이 되어온 국가로서 99,720제곱킬로미터밖에 안되는 작은 영토에 50,801,405명쯤의 많은 인구가 살고 있다. 한 개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뛰어나야만 한다. 이 모든 사람들이 성공을 똑같이 인식하고 같은 것을 원한다면, 곧 경쟁이 따라온다.

[생존’의 삶인가 ‘생활’의 삶인가]

‘생존’이 생과 사를 가르는 절대적인 고민이라면, ‘생활’은 삶의 만족을 결정하는 상대적인 고민이다. 생과 사를 논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라면, 좀 더 고귀한 정신적인 목표를 추구할 수 있지 않을까?

[과도한 소비주의와 포근한 인정, 그 사이에]

행복? 행복이 얼마나 커야 행복을 느끼는 것인가? 우리 일상의 행복은 정말 작은 것들에 있다. 길거리에서 눈을 마주친 사람에게 미소 짓기, 건물 안으로 들어갈 때 뒤에 따라오는 사람을 위해 현 관문 잡아 주기, 버스 노선도 앞에서 헤매는 사람에게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어보기 등과 같은 사소한 일들이 우리 삶을 더 따뜻하게, 더 편하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여자답게” “남자답게”, 그러나 “인간답게"]

한국에서는 “여자는 여자답게”라는 말 뿐만 아니라 “남자는 남자답게”라는 말도 흔히 들을 수 있다. 물론 양쪽 다 외모에 대한 비판을 담은 말이다. 나는 한국사회가 여성의 가능성을 외모로만 제한하는 사회라고 몇 번이나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많은 한국 사람들은 외모나 행동에 대한 말이 ‘차별’이라는 것을 느끼지도 못한 채로 그냥 넘어간다. 아예 무감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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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텍 박태준미래전략연구소는 2016년 실사구시적인 미래전략연구 주제의 하나로서 ‘더 행복한 한국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과제가 무엇인가’를 선정하였으며, 토박이 한국인이 아닌 분들의 목소리를 경청해보는 것이 더 객관적이고 효과적일 수 있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한국에 대해 잘 알고 있는 필자들은 ‘한국사회의 행복문제’를 어떤 시각으로 읽어내고, 이에 대해 어떤 대안을 갖고 있을까요?

<21개국 36인이 참여한 에세이를 엮어 '대한민국 행복지도' 미래전략연구총서(4)으로 발간되었습니다.

→ 미래전략연구총서4 '대한민국 행복지도' 도서보기

목 차

가치체계를 재정립할 때가 왔다 - 망고 제인 안기르(케냐)

‘생존’의 삶인가‘생활’의 삶인가 - 나심 이브라힘(아프가니스탄)

과도한 소비주의와 포근한 인정, 그 사이에 - 일리야 벨랴코프(러시아)

“여자답게”“남자답게”, 그러나“인간답게” - 아나스타씨아(에스토니아)

내 용

[2016 전문가 에세이] I-1. 가치체계를 재정립할 때가 왔다외 3편

망고 제인 안기르, 나심 이브라힘, 일리야 벨랴코프, 아나스타씨아

가치체계를 재정립할 때가 왔다

- 망고 제인 안기르(케냐)

“빨리 가고 싶다면 혼자 가고, 멀리 가고 싶다면 함께 가라.”

─ 아프리카 속담

2016년 7월, 나는 현재 한국에 살고 있는 외국인 33명을 대상으로 “한국의 행복”이라는 주제로 간단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 많지 않은 수이지만, 문화적 배경이나 직업, 연령대가 다양했다. “‘아주 많이 불행함’ 1 점에서 ‘아주 많이 행복함’ 10점까지 중에서 한국인은 얼마나 행복해 보입니까?” 응답자 중 대다수(78.8%)는 한국의 행복도를 1점에서 4점 사이, 그러니까

‘아주 많이 불행함’에서 ‘불행함’ 사이로 평가하였다. 그들 중 가장 많은 수인 응답자의 39.4%가 4점을 꼽았다. 이 결과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어진다.(서구에서는 거의 한 세기가

걸린 놀라운 경제적, 정치적 발전을 불과 한 세대 만에 이룩한) ‘한강의 기적’을 이룬 나라가 어떻게 불행한 사회로 인식될 수 있을까?

이 불행감을 설명할 수 있는 많은 이유가 있다 ― 2000년대 초반 이후 둔화된 한국의 경제성장률 , 점점 증가하다가 마침내 2016년 12.5%라는 최고치를 기록한 15세에서 29세 사이 인구의 실업률 , 점점 느는 듯한 정치적 부정부패, 숨 막히는 교육시스템, 견디기 힘들도록 긴 노동시간 등등. 하지만 나는 이 불행감의 바탕에 있을 한 가지 요인으로, 그동안 사회적 가치보다 물질적 가치를 더 강조해옴에 따라 생겨난 “성공에 대한 아주 잘못된 인식”을 반드시 지적하고 싶다.

한국사회에서 성공한 삶은 대개 세 가지 척도로 측정된다. 교육적 성취(특히 어떤 학교를 나왔는가), 다니고 있는 회사나 공기업(더 중요하게는 그곳에서의 직위), 대도시의 아파트와 고급차 같은 자산인데, 이것들은 모두 필연적으로 물질적이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성공을 측정하는 것이 한국에서만 있는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이는지를 보면 한국사회에 아주 강력한 물질만능주의가 뿌리 깊이 박혀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나는 순전히 물질적 성취에만 집중해 성공을 정의하는 이러한 태도가, 한국인들이 느끼는 불행감을 만들어내는데 늘 일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요원인으로 지목되는 경우는 적다고 생각한다.

물질적 가치를 중시하는 ‘성공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어떻게 한국사회의 불행감을 불러오는 주요원인이 되는 것일까? 한국은 자원이 풍부하지 않아서 인구가 주요자원이 되어온 국가로서 99,720제곱킬로미터밖에 안되는 작은 영토에 50,801,405명쯤의 많은 인구가 살고 있다. 한 개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뛰어나야만 한다. 이 모든 사람들이 성공을 똑같이 인식하고 같은 것을 원한다면, 곧 경쟁이 따라온다. 경쟁이 그 자체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경쟁은 사회 안에 창의력을 불러일으키고 특정한 목표를 추구할 수 있도록 동기를 북돋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비슷한 목표를 추구한다면, 그리고 그 목표가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보인다면, 경쟁이 그것을 성취하기 더욱 어렵게 만들어서, 너무 치열한 나머지 자신을 무너뜨릴 수 있는 지경에 다다를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유년기에 들어서자마자 치열한 경쟁을 현실로 맞닥뜨린다. 엄격하게 표준화된 시험에서 좋은 결과를 내서 최고의 대학들 중 하나에 들어가려면, 충분한 이해보다는 암기에 중점을 둔다고 비판 받는 고된 학업시스템을 견뎌내야 한다 . 시간이 지나면 중소기업보다 선호되는 대기업에 입사하기 위해 경쟁해야 한다. 이 경쟁 탓에 때로 얼굴을 ‘고치는’ 성형수술까지도 해야 하는데, 한국사회에서는 ‘특정한’ 종류의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이들에게 더 쉽게 기회가 오기 때문이다. 입사 후에도 상사들을 만족시켜 승진을 하기 위한 경쟁이 있고, 이 때문에 “멸사봉공” 이란 말처럼 자신이 속한 회사를 위해 개인적인 삶을 희생하기도 한다. 이 경쟁적인 문화는 어떤 차와 집을 가졌는지, 자녀가 어떤 학교를 다 니는지까지로 확장된다. 이것은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한 끝없는 악순환이다.

그렇다, 여기에 엄청난 대가가 따르는 것은 분명하다. “얼룩말의 검은” 줄무늬를 쏘면 하얀 줄무늬도 죽는다”라는 아프리카의 속담이 있다. 사회의 한 측면이 왜곡되면 전체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경쟁적인 학교시스템은 아이들에게서 창의력을 고갈시키고, 표준화된 시험을 치름으로써 사람은 모두 다르다는 인간성의 기본적인 속성과는 반대로 동질성이 강요된다. 선택된 몇몇 대학만을 위한 경쟁은 학생들이 적성보다 학교이름을 보고 학교를 정하게 만든다. 아주 경쟁적인 입사면접은 한국의 일터에서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부른다. 왜냐하면, “모든 경쟁에는 승자 의 수가 정해져 있고, …… 이것은 회사측에서 보면, 최고의 기술을 가진 이들도 한정적이기” 때문이라고 헤럴드지의 클레어 리는 말한다. 그러나 이것들보다도, 더 위험한 것은 협동과 공동체 정신 같은 사회적 가치들을 잃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는 “경쟁은 개인들을 서로에게서 분리시키고 공동체의 모든 진정한 형태를 모조리 약화한다”고 지적하였다. 간디 역시 바람직한 사회를 “각 개인이 협동하고 다른 이의 행복을 위해 봉사하며, 사람들이 서로의 기쁨과 슬픔, 성취를 공유하는 것이 사회적 삶의 규범”이 되는 곳 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는 경쟁이 치열해지면 폭력적이고 한 사회에 좋지 못한 영향을 주며 경쟁과 대척점에 있는 공유와 협동 같은 인간적 가치들에 위협을 끼친다는 점에 동의하지만, 간디와 마르크스처럼 경쟁 자체가 나쁜 것이고 사라져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국의 경쟁적인 문화와 자본주의 체계는 그 단점에도 불구하고 세계은행 추산 1인당 GDP가 1950년대에 100달러에 불과하던 나라에서 2015년에 27,221달러에 이르는 나라로 탈바꿈하는 성공에 큰 기여를 해왔다.

그러나 나는, 지금의 경쟁적인 문화는 너무 지나치기 때문에 이제 한국 사회가 자신의 핵심가치와 원칙들을 재평가하고 재수립해야 하는 시점에 왔다고 생각한다.

알리바바의 최고경영자이자 설립자인 잭 마(마윈)는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에서 중국의 더딘 성장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렇게 말했다.

“중국이 계속 9% 경제성장률을 유지한다면, 분명히 무언가가 잘못됐을 겁니다. 푸른 하늘을 보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품질을 기대할 수 없을지도 모르죠. …… 인간의 몸과 마찬가지로, 덩치가 계속해서 커질 순 없습니다. 때가 되면 몸의 성장은 느려집니다. 그 대신 마음을 키우십시오. 문화를 키우십시오. 가치를 키우십시오. 지혜를 키우십시오.”

이 연설은 한국이나 다른 많은 개발도상국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은 짧은 시간 안에 커다란 경제적, 정치적 발전을 이루었다. 이제는 더 고차원적인 가치를 개발할 시간이다. 한국은 이미 환경보호나 역사적, 문화적 유물보존 같은 분야들에서는 올바른 길에 들어서 있다. 그러나 가치체계를 재정립하는 문제는 특히 미래의 젊은 세대들을 위해 지체 없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성공적인 삶은 물질적 가치 뿐 아니라, 오히려 인간성을 보여주는 사회적 가치들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이를 제도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한 방법은, 교사들이

학생들의 다양성을 북돋아주도록 훈련하고 그것을 실현하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그저 표면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어떤 형태와 크기의 턱과 코도 아름답다는 것을 알려주자. 비전문직을 더 가치 낮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하고, 의사나 교수들만큼 농부들을 존중하게 만들자. 농부의 노력도 의사의 작업만큼 국가 생존에 필수적이다. 그러면 아마 앞으로 한국 농부들도 결혼상대로 덜 매력적이라는 인식을 벗게 되어, 더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감 있게 농업에 뛰어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농업분야는 지구온난화와 기술발전 때문에 교육수준이 높은 인재가 점점 더 필요해지고 있다.

한국은 협력을 통해 이룬 성취의 가치를 강조함으로써 경쟁보다 협력이 더 많아지게 만들어야만 한다. 나의 조국 케냐는 이 협동에 관한 문제에서는 완벽에 가깝다. 아프리카 문화가 원래 공동체적인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우리가 있어서 내가 있다”고 말하고, 독립 이후 케냐인들의 슬로건은 “하람비(Harambee)”, 즉 “함께 당긴다”라는 뜻의 스와힐리어일 정도이다. 우리가 경쟁을 믿지 않는 것은 아니다. “(사회에서) 솟아나길 바라는 사람은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유명한 스와힐리어 속담은 다른 이들보다 성공하고 싶으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물질적 성공보다는 내가 앞으로 나가기 위해 다른 이들을 뒤에 버려두고 오면 안 된다는 원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혼자 앞서가서는 오래 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프리카인들은 또한 “빨리 가고 싶다면 혼자 가고, 멀리 가고 싶다면 함께 가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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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의 삶인가‘생활’의 삶인가

- 나심 이브라힘(아프가니스탄)

“쾅! 다다다다쾅! 콰광!”

“나심! 어서 일어나! 어서 뒷산으로 올라가!”

어디선가 들려오는 시끄러운 굉음, 아버지의 고함. 새카만 밤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갓난아기였던 동생과 나는 허겁지겁 돌산으로 이끌려 올라갔다. 일주일을 시퍼렇게 얼어붙은 산에서 보내고 내려왔을 때, 집에 있던 염소와 양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뒤 나는 삼촌을 본 적이 없다. 그렇게 탈레반은 우리 가족에게도 큰 아픔을 남겼다.

내 이름은 나심 이브라힘이고, 아프가니스탄 사람이다. 유난히도 비가 많이 쏟아져서 푸른 강이 범람한 다다음해에 태어난 나는, 일곱 살 때 처음 나이와 태어난 날을 헤아릴 수 있었다. ‘난민’으로 등록되던 날은 생일이 되었고, 비가 많이 내렸던 그해에 대한 엄마의 기억은 나이가 되었다.

1990년대 초, 나의 조국 아프가니스탄은 탈레반 때문에 쑥대밭이 되었다. 우리 마을과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산으로 올라가 탈레반의 습격을 피하기를 몇 차례, 아버지는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이란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이란에는 할아버지와 큰아버지가 살고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 들이 ‘Fardis’라는 지역에 있다고만 알고 있을 뿐, 우리는 그들의 전화번호나 정확한 주소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우리는 무조건 떠나야 했다.

얼마 안 되는 집 세간을 정리한 우리는 ‘브로커’라 불리는 사람들을 따라 이란 국경이 있는 동쪽으로 향했다. 큰 승합차에 짐처럼 실려 국경에 도착하자, 그들은 우리 가족을 내리게 했다. 어린 시절이었지만 시뻘건 불빛이 번쩍이던 삼엄한 국경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차를 열어 어떤 사 람들이 탔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국경경비대를 보며 우리는 망연자실했다. 그러나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우리는 몇 날 며칠을 국경 근처 다리 밑에서 지내며 기회만 엿보았다. 마침내 큰 화물차 수십 대가 국경을 넘으려고 줄지어 몰려들었다.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큰 화물차 옆에 바짝 붙어 국경을 넘었다. 드디어 우리는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브로커들에게 돈을 주고 흩어져버린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 가족은 브로커에게 줄 돈이 없었다. 결국 우리는 어딘지 모를 허름한 건물 지하에 감금되었고 어머니만 풀려날 수 있었다. 브로커는 시간을 줄 테니 친척을 찾아 돈을 받아오라고 했다. 어머니는 낯선 길을 나섰다. 큰아버지의 이름과 사는 지역명만 알 뿐이었는데……. 일주일, 이주일, 한 달이 지나도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를 잃은 줄만 알고 매일 울었다. 눈물에 적셔졌다 말랐다 다시 적셔져 마음이 오래된 신문지처럼 바스러졌을 때쯤 어머니가 돌아왔다. 빈손이었다. 두 달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큰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찾지 못한 것이었다.

“모두 도망가! 어서 빨리!”

감금 생활을 하던 어느 날 저녁, 갑자기 지하실 문이 열렸다. 불법적으로 우리를 감금하는 것이 동네에 알려졌는지 경찰이 습격한 것이었다. 경찰에 잡히면 우리는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추방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 가족은 미친 듯이 뛰어 도망갔다.

우리는 정처 없이 길을 헤매다 체념했다. 붉은 진흙이 뒤덮인 더럽고 꾀죄죄한 행색은 누가 봐도 아프간 난민으로 오해 받기에 충분했다. 숨어야 했지만 우리는 숨을 힘도, 의지도 없었다. 너무 힘들고 배가 고팠다. 그러던 중 갑자기 경찰차 한 대가 우리 옆에 섰다. 우린 너무 놀랐지만 도망갈 수 없었다. 이윽고 차 문이 열리고 경찰관 한 명이 말했다.

“도와줄까요? 도움이 필요한가요?”

우리는 너무나 놀랐다. 하지만 악의가 없어 보이는 그 경찰관에게 큰아버지의 이름을 말했다. 경찰관이 수소문 끝에 큰아버지를 찾아주었다. 우리는 극적으로 큰아버지와 상봉할 수 있었다. 경찰관은 거지꼴을 한 남자가 한 아이는 들쳐 엎고 다른 아이는 손을 잡고 끌고 가는 모습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했다. 나의 어린 시절은 그렇게 지나갔다.

나는 한국 사람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눈을 감고 ‘행복’을 떠올렸을 때 무엇이 생각나는지? 나는 눈을 감고 ‘행복’을 떠올리면 무엇보다 먼저 여섯 살 때 기억이 떠오른다. 탈레반이 휩쓸기 전의 아름다운 우리 마을, 노란 들꽃, 풀 뜯던 염소들, 친구들과 뛰놀던 들판이 생각난다. 마음 졸이지 않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마음의 안식. 이것이 내가 바라는 진정한 행복이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얼마 전에도 대학에서의 폭탄 테러로 수십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 친구들과 ‘행복’에 대해 이야기했던 적이 있다. 친구들은 ‘로또가 됐으면 좋겠다’, ‘강남 아파트에 살고 싶다’, ‘외제차를 몰고 싶다’ 등을 이야기했다. 나는 그들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대부분 ‘무엇을 갖는 것’이었다. 행복에 대한 정의가 ‘소유’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소유’가 행복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고도 성장기를 거치며 큰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경제발전 그 자체가 궁극의 목적이 되어버린 것 같다. ‘잘 살아 보세’가 궁극의 목적이 될 수 있는가? ‘무엇을 위해 잘 살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을 만나보기 어렵다.

“무엇을 위해 잘 살아야 하는데?”

이 질문을 던질 때 대다수 한국인은 매우 당황스러워 한다. “잘 살면 되는 거지, 무엇을 더 바래야 하는데?”

이렇게 되묻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정신적인 비전이 있고, 그에 따른 풍요가 있어야 공허하지 않다는 것이다. 적어도 ‘생존’을 넘어 ‘생활’의 단계에 이르렀다면 말이다. ‘생존’이 생과 사를 가르는 절대적인 고민이라면, ‘생활’은 삶의 만족을 결정하는 상대적인 고민이다. 생과 사를 논하지 않아도 되는 삶이라면, 좀 더 고귀한 정신적인 목표를 추구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저 아파트를 샀어야 하는데, 내가 저 시계를 갖고 싶은데, 내가 저 위치에 오르고 싶은데’라는 고민들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 섰던 내가 보기에는 그저 쓸데없는 고민처럼 보인다.

그리고 내가 느끼기에는 많은 한국인들이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그만큼 가지지 못한 것을 불행해 하는 것 같다. 이것이 많은 한국인들에게 행복을 가로막는 큰 이유처럼 보인다. 한국인들의 SNS에는 늘 자신이 가진 것들에 대한 자랑으로 가득하다. 그들이 SNS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내가 이러한 훌륭한 외모를 가졌다’, ‘나는 이러한 것을 누리고 즐길 만큼 돈과 시간적 여유가 있다’가 유난히 많다. 많은 한국인들은 이러한 포스팅을 보며 부러워한다. 거기에 자신을 비교하며 스스로를 깎아 내리고 의기 소침해 하기도 한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에 대해서는 잊고 살아가지만, 자신이 갖지 못한 것들은 마음에 심어 둔다. 가진 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탐욕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탐욕을 따라가면 불평만 자리할 뿐이다. 반대로 감사를 떠올리면 상황은 정반대가 된다. 나는 감사할 때 비로소 진정한 마음의 평화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생사를 넘나들던 어린 시절, 나는 나의 삶이 쓸모없다고 생각했다. 늘 쫓겨 다니고 이방인 취급을 당하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하지만 어느 순 간 내 삶에 감사가 싹튼 뒤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를테면 아침에 아무 탈 없이 잘 일어나는 것, 심지어 내가 잘 잤다고 느끼는 것 그 자체가 감사할 일이다.

그리고 감사는 나에게 삶의 동기와 힘, 열정을 불러왔다. 이것은 탐욕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감사를 통한 삶의 힘은 도전하면 할수록 기쁨 그 자체였다. 탐욕에 의한 시도와 결과가 불평불만을 가져온다면, 감사를 통한 모든 일은 성공과 실패를 가릴 것 없이 즐거운 것이었다.

이제 한국은 정신적인 풍요로움에 대한 과업을 이룰 때라고 생각한다. 물질적인 번영에 따른 ‘생존’이 해결되었다면, ‘생활’을 살찌우는 내면의 풍요로움을 필연적으로 들여다봐야 할 때일 것이다. 인간을 구성하는 영· 혼·육에 있어 육신을 살찌웠다면, 그 다음 과업은 당연히 내면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내 삶을 통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와 같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고 정신적, 영적인 내면의 풍요로움을 이루는 길이 무엇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루어야 한다. 물론, 주어진 삶에 대한 감사도 필요하다. 탐욕을 위해 맹목적으로 앞서가기보다 감사를 기반으로 도전에 나서는 사람들이 많아져야 한다.

내면의 목표를 세우는 것과 주어진 삶에 감사하는 것. 이것이 더 나은 한국사회, 더 행복한 한국사회를 만드는 길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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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소비주의와 포근한 인정, 그 사이에

- 일리야 벨랴코프(러시아)

한국에 온 지 어느덧 13년이 지났다. 한국에 온 첫날이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공항에서 출발할 땐 비가 엄청 많이 오고 다소 추웠지만 인천공항이 나를 맑고 푸른 하늘과 따뜻한 봄 날씨로 맞이했다. 공항에서 대학교 기숙사까지 이동할 때 차창 밖에는 진달래꽃, 개나리꽃이 활짝 피어 있었고, 거리의 서울 시민들은 분주해 보였다. 그 모습은 해외여행조차 첫 번째인 나에게 진지한 행복으로 다가 왔다.

한국 사람들의 첫인상은 행복 그 자체였다. 당시의 러시아 사람들보다 더 많이 웃고 인생에 대한 태도가 더 간편한 것 같았다. 한국에 사는 첫 몇 달 동안 나는 정말 행복의 나라로 온 것 같았다. 사회생활도 제대로 안해 본 나에게 친구들과 놀기엔 딱 좋은 서울에 사는 것은 너무나 즐거웠다.

하지만 대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한국 사람들이 첫인상처럼 그렇게 행복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겉으로는 웃음과 즐거움이 넘치는 사회로 보이지만 속은 그렇게 환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경험이 쌓이면서 알게 되었다.

13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많은 한국인에게 들은 질문은 바로 ‘왜 한국에 사느냐’라는 것이다.

불행에 빠진 나라이면서 문제가 많은 사회인데, 외국인인 내가 도대체 무엇이 좋아 그렇게 오래 버티느냐라는 것이 그 질문 뒤에 있는 의문이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아주 간단하다. 당연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지만, 외국인이 보는 한국과 한국인이 보는 한국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이다.

한국은 한국 사람들조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나라다. 반세기 전 만해도 아프리카에서 제일 가난한 짐바브웨보다 더 가난했다. 20세기 초 일제강점기 때 고유한 문화를 잃을 뻔했고, 통일된 나라가 강제로 둘로 쪼개져 내전 속으로 던져진 후에는 계속 외부의 지도를 받아 왔다. 이런 곡절 많은 역사 때문에 종교들도 다 진기하게 섞였다. 2016년에 외국인이 볼 수 있는 한국사회는 바로 그런 신기한 모습이다. 국민 의식에도 그와 같은 고통들이 아직 뚜렷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현재의 대한민국은 세계에서 “해 아래의 장소”(Spot under the Sun)를 찾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으나, 이런 노력은 고생으로 보일 뿐 행복으로 인식되지는 않는다. 행복이라는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길이다. 서방 국가들이 이 말을 이해하기까지 몇백 년이 걸렸고, 한국은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그렇다면 현재 대한민국 사회의 불행을 일으킨 요소들은 어떤 것일까.

경제적으로 성공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행복의 제일 큰 적은 소비주의 마인드라고, 나는 생각한다. 돈을 벌어 물질적인 소비를 하거나 서비스를 누리는 건 괜찮지만 적당한 수준을 넘으면 문제가 생긴다. 재정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물질적인 집착을 갖거나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은, 소비주의가 과도한 수준에 이르렀다는 경 보라고 본다.

한국사회에서 과도 소비의 실례를 자주 볼 수 있는 건 아쉬운 일이다.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보자. 외국 사람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 누구나 놀라는 한국 사람들의 명품 집착이다. 비싼 자동차나 액세서리, 브랜드 옷 등과 같은 명품은 당연히 다른 나라에서도 쓰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유럽이나 미국과 같이 이른바 선진국 명품 소비자들은 주로 그 사회의 상류층에 한정된다. 특정한 사회계층이나 재정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명품의 주요 소비자들이다.

값비싼 상품이나 서비스는 원래 극소수의 엘리트가 일반 사람들과 거리를 두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전 세계에서 유명한 브랜드를 갖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엘리트에 속한다는 뜻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재정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조차도 명품을 소유하려고 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주어진 연차를 안 쓰고 나중에 보상을 받아 그 돈으로 명품 백을 사려는 몇 명을 보았다.

나의 한국인 친구 중 한 명도 회사를 다니면서 매년 해야 하는 건강검진을 포기하고 건강 검진에 쓸 돈을 받아 자기 아내에게 명품 백을 선물한 적이 있다. 명품 백보다 자기 몸 관리가 더 중요하지 않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 친구는 주변에서 다 그렇게 한다고 하면서 만약 자기 아내가 명품 백을 갖고있지 않으면 부모님이나 주변 사람들의 비판적인 시선을 받는다고 답했다. 과연 이러한 물질적인 소유가 진지한 행복을 줄지 의문스럽기만 하다.

그러면 한국 사람들에게 경제적인 부분이 불행의 이유가 되는 것인가.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많은 소비를 누리며 ‘소비의 천국’에 살수만 있다면 더 행복해지는 것인가. 돈과 행복의 관련성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과연 꼭 그런 것인가. 유엔은 매년 ‘세계행복지수’ 를 발표한다. 2015년 한국은 158개 국가 중 47위였다. 2013년에 최고 41위를 도달한 뒤로 2년 연속 하락하고 있다. 한국사회가 계속 불행해지고 있다는 신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에서는 꼴찌다. 여기서 더 놀라운 건 러시아가 64위로 순위가 크게 높아졌다는 것이다.

불행의 이유에 대해 경제를 탓하는 사람들이 흔하다. ‘먹고 살기 힘들 어서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본다. 특히 한국 같은 경우는 이 논리를 적용하기 힘들다. 다시 통계를 보자. 2008년 금융위기가 터져서 전 세계를 비롯해 한국경제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2년 이후인 2010년에 한국은 위기를 빨리 극복한 나라로 꼽혔다. 2011년부터 꾸준한 경제 성장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 행복지수는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의 경우를 보면, 경제와 국민의 행복은 별로 관련성이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석유가격이 상승해 ‘오일 머니’를 가장 많이 벌어들였던 2004~2008년 동안 러시아 경제성장률은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그런데 2006년 유엔 행복지수를 보면 러시아는 178개 국가 중 172위였다. 이는 내전 중인 시리아보다 더 낮은 순위다. 반면에 2015년의 러시아 경 제는 따로 설명을 붙일 필요조차 없이 안 좋은 한 해였다. 서방의 경제제재에다 석유 가격 급락, 그에 따른 소비자 물가 급상승으로 15년 만에 처음으로 재정 적자를 기록했다. 하지만 2015년 러시아 국민의 행복지수는64위다. 5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거의 3배로 급성장한 것이다. 정말 신기해 할 수밖에 없는 현상이다.

경제가 꾸준히 성장해도 점점 불행해지는 대한민국 국민, 그리고 경제가 바닥을 쳐도 오히려 더 행복해지는 러시아 국민. 과연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경제가 아닌 다른 데에서 그 답을 찾아 봐야 할 것이다.

경제뿐만 아니라 사회, 정치 등에 있어서 러시아와 한국은 전혀 다른 상황이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 순위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나라마다 경제가 아닌 독특한 상황을 하나하나 살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국의 경우는 사회적인 면을 주목해야 할 것 같다. 2014년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서 대형 사건사고가 잇따라 일어났고, 2015년에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2016년에는 한국인에게 아픈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위안부문제 해결 논란, 미국 사드 배치 문제와 그에 따른 중국과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같은 정치적 이슈, 유치원 아이 폭행 사건이나 ‘땅콩 리턴’을 비롯한 소위 ‘갑질 사건’ 같은 사회적인 이슈들이 연속으로 불거져 국민들에게 심리적 불안을 심어주었다. 여기에다 점점 떨어지는 취업률, 경쟁이 날로 심해지는 교육까지, 이것들이 국민의 심리에 미래를 불안하게 느끼게 하는 요인들이 된 것 같다. 행복이란 현재의 안전도 중요하지만 미래에 대해 안심할 수 있어야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내 주변의 한국 친구들 중에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다고 보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점은, 신기하기도 하면서 아쉬움을 남긴다. 러시아 사람인 나에게는 러시아보다 한국의 미래가 훨씬 밝고 행복해 보이는데 말이다.

러시아는 왜 행복지수가 높아진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려면 러시아 현대 역사를 언급할 필요가 있다. 1990년대 초반 소련이 붕괴되면서 사회질서도 바닥으로 추락했다. 길거리에서 도둑질 당할까봐 집 밖으로 나가기 무서울 정도로 러시아 국민들의 불안감이 높았다. 중앙방송국에 나오는 뉴스는 매일 강도나 살인 사건, 마피아 그룹끼리의 충돌, 끊임없는 시민들의 시위, 마약 사용도 증가 등이 넘쳐났다. 그러다가 경제가 급성장한 2000년대를 맞았고, 범죄율이 급락하기 시작하면서 국민에게 어느 정도의 재정적인 안전과 사회적인 질서가 주어졌다.

러시아 사회는 균형과 안전을 찾고 평화로워졌다. 그래서 2014년 강한 금융위기를 겪으면서도 지난 10년 동안 쌓아왔던 안정감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이제 불행에 빠진다는 것 그 자체에 지쳐버린 것이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경제가 어렵더라도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또 경제적 측면에서도 2014년 금융위기가 러시아에 미친 충격은 해외 언론들이 그려주는 것처럼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 1998년 금융위기 때는 1달러에 6루블에서 1달러에 42루블까지 일주일 만에 7배 이상으로 루블화 가치 가 대폭락했지만, 이번에는 1달러에 33루블에서 현재 62루블까지(즉, 1년 에 2배) 하락한 정도여서 국가 경제에 치명적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다.

경제 상황이 악화된 것은 누가 봐도 분명하지만 사회 질서나 정치적인 상황이 아주 튼튼하고 그나마 안전하기 때문에 러시아 국민들은 예상과 달리 불행하기는커녕 더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요즘은 모스크바에서 아웃 도어 스포츠가 열풍이라고 한다. 이는 행복이란 주변에서 찾아야 하는 것 이 아니라 내 안에서 찾아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한국 친구들과 행복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때가 있다. 나는, 한국 친구 들이 항상 행복에 대해 크게 생각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지금보다 더 큰 아파트로 이사 가면 행복할 것이다, 지금보다 더 비싼 차를 사면 행복할 것이다, 지금보다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직장을 가지면 행복할 것이다 등이 대표적인 행복 추구의 내용들이다. 현재 삶을 불행해 하는 것도 미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무조건 물질적인 조건과 관련시킨다는 말이다.

얼마 전에 내가 새로운 일을 파트타임식으로 하게 되어 친구들에게 알려줬다. 그러나 러시아 친구와 한국 친구의 반응이 신기할 만큼 대조적이었다. 다음주 월요일부터 새 일자리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자 러시아 친구는 할 일이 어떤 일이냐부터 물어본 반면에, 한국인 친구는 돈을 얼마 받느냐부터 물어봤다.

돈에 대해 신경 쓰는 것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당연히 아니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살려면 돈을 생각하고 돈을 항상 고려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을 버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하는 것은 불행에 빠지는 지름길이다. 돈이란 아무리 많이 벌어도 항상 부족하다고 느껴진다. 행복은 돈이 아니라 돈을 버는 과정 자체이다.

나 또한 행복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는 편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나는 항상 돈만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정적인 독립을 이룬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돈으로 산 행복이 오래 가지 못한다는 걸 잘 안다. 돈은 일상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지만, 내가 정말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이 돈과 전혀 관련이 없는 순간이라는 것을 어느 때부터 깨닫기 시작했다. 그걸 알았던 순간에 나는 깜짝 놀랐다.

최근에 일 때문에 고향인 블라디보스토크에 다녀왔다. 정말 오랜만에 가는 거라 기대도 컸고 설레기도 했다. 부모님도 도시의 거리도 러시아 음식도 강한 향수를 자아냈다. 주변에 있는 한국인 친구들은 다 부럽다고 한결같이 말했다. 해외에 오래 떨어져 살면서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 아닌가. 그런 행복을 나는 너무나 느껴보고 싶었다.

러시아에서 바쁜 나흘을 보냈다. 학회 발표니 강연이니 눈 깜짝할 사이에 시간이 지나가 버렸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머릿속에 질문이 하나 떴다. 이 나흘 동안 정말 행복했을까.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느낌이 참 이상했다.

생각할수록 묘한 노릇이었다. 고향에 오랜만에 갔다 와서 행복한 부분도 당연히 있었지만, 그보다 진정으로 행복했던 순간은 아주 순수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스스로도 놀라고 말았다. 어머니가 해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 바로 그 아주 작은 것이 나의 진정한 행복의 이유였다. 행복? 행복이 얼마나 커야 행복을 느끼는 것인가?

직장생활을 할 때였다. 피곤한 하루 끝에 퇴근하고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가면서 음악을 들었다. 지친 일주일이 끝나는 ‘불금’이었지만 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집에 가서 바로 자고 싶었다. 하루 종일 일하면서 밥 한 끼도 먹지 못했지만 밥 먹을 생각조차도 없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집으로 가는 길에 포장마차를 지났다. 문뜩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피곤 해도 간단하게라도 밥을 먹고 자야겠다. 그래서 플라스틱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가 내가 좋아하는 왕만두를 포장해 달라고 주문했다. 주인아주머니가 나를 보고 피곤해 보인다고 말씀하시더니, 왕만두 봉투 안으로 김 밥 한 줄을 같이 넣어 주셨다.

그 사소한 정(情)에 나는 감동을 받았다. 피곤한 나의 모습을 보고 건네 준 그 김밥 한 줄, 그것은 한국의 일반적인 음식이 아닌, 훨씬 의미 있는 한국인의 상징이 되었다. 따뜻한 마음씨의 상징이라고 해야할까. 너무 피곤해 보여 집에 가서 밥도 못할 것 같으니 김밥을 먹으라고 주신 아주머니의 그 마음씨. 누군가에겐 아무것도 아닌 일일 테지만, 나에겐 피곤한 하루 끝에 기분이 180도 달라지게 해준 일이었다. 그리고 한 사람에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큰 보탬이 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다. 이게 바로 행복이 아닐까.

한 친구가 자기 생일 파티를 제주도에서 하자고 해서 친구 몇 명과 함께 한국 남쪽의 하와이, 제주도로 떠났다. 생일날에 하루 종일 놀고 저녁에는 그 유명한 흑돼지 삼겹살을 먹기로 했다.

음식을 먹으면서 이것저것 시끄럽게 이야기를 나누니, 주인아주머니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느냐며 참견을 하시더니, 생일 파티 하러 제주도까지 내려왔다고 하자 미역국 한 그릇을 가져다 주셨다. 한국에서 생일 때 꼭 먹어야 하는 거라고. 그것은 무척 사소한 행동이지만 우리에게는 아주 크게 느껴졌다. 이게 바로 행복이 아닐까.

우리 일상의 행복은 정말 작은 것들에 있다. 길거리에서 눈을 마주친 사람에게 미소 짓기, 건물 안으로 들어갈 때 뒤에 따라오는 사람을 위해 현 관문 잡아 주기, 버스 노선도 앞에서 헤매는 사람에게 도움이 필요하냐고 물어보기 등과 같은 사소한 일들이 우리 삶을 더 따뜻하게, 더 편하게 만들어주지 않을까.

결국 아름답고 편한 세상은 나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마음의 선물을 조금 더 자주 하면 우리 세상도 같이 변할 것이다.

러시아 철학자 코쥐마 프루트코프(Kozma Prutkov)의 말이 생각난다. “행복하고 싶으면 행복하라.”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도대체 어떻게 행복하라는 거지, 주변이 나를 괴롭히고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충분히 이해하고 아주 동감한다. 나의 행복은 내 주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뜻이다.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환경, 주변 사람들, 돈, 날씨 등이 아니라 ‘나’뿐이다. 내가 사는 곳이 어딘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무슨 생각을 가지는지가 더 중요하다.

한국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그 선천적인 낙관주의를 잃지 않았으면 한다. 유머로 주변에 반응하고 내가 내 주변을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할 수 있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부터 고민해보면 한국사회 전체의 분위기가 나아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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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답게”“남자답게”, 그러나“인간답게”

- 아나스타씨아(에스토니아)

나는 한국에 처음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 모든 사람, 모든 일에 매료되어 있다. 한국은 잘 짜인 대중교통으로 어디를 가든지 안전하고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는 나라임이 틀림없다. 게다가 한국은 방문하기에 너무나 아름답고 흥미로운 목적지가 수없이 많기 때문에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지루해질 시간이 전혀 없다. 수천 년의 역사를 보존하는 박물관, 깨 끗한 공기가 가득한 산 속에 숨어 있는 불교 사찰, 한복을 입은 사람들로 붐비는 한옥마을, 둘이 먹다가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맛있는 삼계탕 식당 등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도 마찬가지로 가볼 만한 곳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한국의 진수는 무엇보다도 너그럽고 따뜻한 마음이 있는 한국인 들이다. 또한 교육에 대해서라면 나의 대학교 교수님, 동학, 다른 한국 친구들 모두 군계일학이다.

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나라와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나의 고향인 에스토니아처럼 한국에도 해결할 수 없거나 해결하기 힘든 문제가 많은 것이 틀림없다. 그 중 어떤 문제는 글로벌 이슈이지만, 어떤 문제는 다만 한두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특정 문제이다. 예를 들어, 남북분단은 오로지 한 나라의 문제라고 볼 수 있는 반면에 환경오염, 저출산, 고령화 등은 여러 나라에 꽤 만연한 문제이다. 임금 격차가 없는 나라는 없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떤 나라에서는 남녀 불평등, 성차별이나 성희롱이 가혹한 현실의 문 제이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yesallwomen이라는 SNS 운동에서부터 미국에서 활발한 성차별과의 투쟁까지 세계적으로 양성 평등을 위한 투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서 생활하다 보니 가장 중요한 문제들 중에 하나가 ‘남녀 불평등’ 이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대다수 대학교 동학과 한국 친구들은 한국의 남녀 불평등이 중요한 사회 문제라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서양의 선진국 들보다 더 심각하다고 본다. 이 주제에 토론하면서 친구들은 이런 문제가 한국 역사 속에 깊이 박혀 있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세계 여러 나라들에 존재하는 남녀 불평등의 문제에 대해 알고 있었으나 한국에 왔을 때까지 그 문제를 직접적으로 경험 한 적이 없었다. 실제로 나는 고향뿐만 아니라 몇 년 동안 다른 나라들에서도 살아본 적이 많은데, 성차별을 한번도 겪지 않았다. 내 고향인 에스토니아는 아이슬란드, 핀란드,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 나라들처럼 성평등 순위가 높은 나라이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몇 가지 성차별에 부딪히게 되었다. 모두 악의는 없는 일이었지만 내 마음을 아프게 하고 말았다.

한국 사람들은 대다수가 남녀 불평등과 성차별이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얼마 전 대학원 수업에서 여성주의와 관련된 주제로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한 학우가 자신의 유럽여행 경험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하였다. 그는 독일에서 사는 동안 어떤 여자가 무거운 가방을 드는 것을 도와주려고 한 적이 있단다. 그런데 그 여자는 기분이 상해 자기가 스스로 들 수 있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또한 어떤 여자와 같이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식사를 한 다음에 나갈 때 자신이 계산을 다 하고 싶었지만, 여자는 자기도 돈이 있으니 무조건 반반씩 계산해야 된다고 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외국 여성들이 한국 여성처럼 왜 여자답게 행동하지 못하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여성주의와 양성 평등을 혼동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한 학우의 경험들은 여성주의와 양성 평등의 진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영역에서 남자와 여자를 서로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우하며, 똑같은 참여 기회를 주고, 똑같은 권리와 이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양성 평등의 진수이다.

한국에서 남녀 불평등과 관련되어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문제는 출산 휴가나 영아 보육과 관련된 것이다. 이것은 최근에 생긴 문제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적된 이슈이다. 많은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심각한 상태로 대두되는 사회적인 문제라고 한다.

더구나 한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육아휴직제도’와 ‘현실’은 별개라는 점을 지적한다.

놀랍게도 상당수의 한국 친구들은 출산에 대해 행복한 것이라기보다는 굉장히 애매한 것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누구와도 쉽게 논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니라고 여긴다. 한국 여자의 경우에는 성공적인 경력과 출산은 동시에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다.

인터넷에는 임신 중이거나 출산휴가 중인 한국여성들이 차별 받는 것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흔하다. 출산휴가 중인 여성 대신 비정규적 직원을 고용하지 않아서 다른 직원들의 업무가 가중된다는 것도 그 중 하나이다. 에스토니아에서는 ‘출산휴가 중 엄마 대신 임시직 직원 모집’이라는 채용공고를 흔히 볼 수 있다. 에스토니아처럼 그렇게 임시직 직원을 모집하는 것은 한국 여성들에게 안전하고 행복한 출산휴가를 제공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이다. 그래서 한국 남성들은 육아 휴직에 대한 수용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다. 한국 남성의 육아휴직 보장기간은 세계적으로 꽤 높은 편이지만 다양한 문제들에 걸려서 휴직을 사용하는 남성들이 많지는 않다. 좀 더 행복한 한국사회로 가기 위해서는 한국 남성들이 아이들과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야 할 뿐만 아니라 육아휴직에 대한 수용의 태도가 변화해야 한다.

양성 평등과 관련해서 해결되어야 하는 또 다른 문제는 신체적인 학대와 악담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한국에 와서 한국 사람들, 특히 남자들에 게서 심심찮게 들은 말이 있다. “너는 왜 여자처럼 하지 않아?”, “너 머리 스타일 언제 여자답게 할 거야? 남자들은 머리 짧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 등등. 이러한 말을 나는 한국에 오기 전에는 한번도 듣지 못했다.

일년 전의 어느 날이었다. 친구와 같이 지하철을 탔다. 그런데 어떤 아저씨가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는 것을 알아차렸다. 시간이 좀 지났다. 그 아저씨가 내 얼굴에 있는 점을 손가락질하며 영어로 떠들었다. “No, no, no, no beautiful, no beautiful” 이러고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고개까지 가로저었다. 황당한 일이었다.

나에게는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는 나의 친구이고 한국인이고 여성이다. 그는 고등학교 다닐 때 어머니한테서, “앞으로 살면서 좋은 남편을 만날 수 있도록 얼굴 성형수술을 해야 한다”는 말 을 들었다고 했다.

이것은 문화 차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큰 충격을 받았고 그만큼 마음이 아팠다.

한국에서는 “여자는 여자답게”라는 말 뿐만 아니라 “남자는 남자답게”라는 말도 흔히 들을 수 있다. 물론 양쪽 다 외모에 대한 비판을 담은 말이다. 나는 한국사회가 여성의 가능성을 외모로만 제한하는 사회라고 몇 번이나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안타깝게도 많은 한국 사람들은 외모나 행동에 대한 말이 ‘차별’이라는 것을 느끼지도 못한 채로 그냥 넘어간다. 아예 무감각한 것이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보니 ‘#여자답게’라는 캠페인을 찾아서 마음이 따뜻해졌다. 좀 더 행복한 한국사회로 가기 위해 “여자답게” 와 “남자답게”를 넘어서 “인간답게”로 변화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여성에 대한 성차별 문제는 전근대 때부터 쌓인 문제인 것 같다. 역사적으로 남성 중심적인 사회였던 한국은 여성의 역할을 경시하고 사회 참여를 제한했다. 여성에게는 보조적인 역할을 강요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러한 추세는 고정관념이 되었다. 이제는 남성의 여성에 대한 고정 관념과 여성의 남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함께 바뀌면 좋겠는데, 최근에는 한국 드라마로 인해 오히려 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더 강화된 측면이 적지 않다. 드라마의 남성 주인공은 항상 돈이 많고 유명하고 멋있는 반면에, 여성 주인공은 항상 굉장히 여성스럽고 예쁘고 마음이 착하다. 물론 드라마에서 강하고 야심만만한 여성 주인공도 만나볼 수 있다. 약하고 가족 중심적인 여성 주인공에서 강하고 자신감 있는 여성으로 변화하고 있는 모습은 보기에도 너무 좋다.

나는 한국 고전문학에 관심이 깊어서 유교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독서를 해야 한다. 며칠 전에 논문을 읽다가 ‘남녀유별(男女有別)’이라는 사자성어를 보았다. 이는 남자와 여자 사이에 분별이 있음을 가리키는 말로, 남녀가 서로 쳐다보지도 못하게 했던 유교문화를 상징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남녀 불평등에 대해 논의할 때 아직도 ‘남녀유별’은 상당히 적절한 말인 듯하다.

놀랍게도 많은 한국인들은 성 평등에 열중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성 평등을 향해 노력하고 운동하는 사람들, 특히 여자들에 대해서는 공격적이고, 예의 없고, 여성스럽지 않다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여성을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우하며 똑같은 참여의 기회를 주고 똑같은 권리와 이익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 양성 평등 사회의 모습이다. 양성 평등은 여성의 무거운 가방을 들어주거나 식당에서 남성이 계산한다는 것보다 훨씬 크고 심각한 이슈이다.

한국 사회에서 양성 평등을 향한 운동이 시작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그러나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처럼 시작한 후 열심히 노력하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다. 한국 사람들이 작은 것부터, 자기 자신부터, 쉬운 것부터 남녀 불평등의 어려운 문제를 차근차근 해결해 나간다면 좀 더 행복한 한국사회가 되기 마련이다. 이를 위해서는 여성들의 적극적인 사회 활동이 필요하다. 정치적인 측면에서 여성의 권리를 위한 법을 만들려면 여성들의 정치적 진출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에는 무엇보다도 여성과 남성의 협동 노력이 중요하다.

한국사회는 ‘남녀무별(男女無別)’의 길이 멀어 보인다. 그러나 가고 있고, 틀림없이 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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