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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청년 에세이 우수상] '걸리버는 어디에서나 걸리버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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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강성훈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보도일 2016.07.20

요 약

현 사회는 타인과 나의 다름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기보다는 모른 체하고 지나가는 일이 다반사라해도 좋을 듯하다. 실상이 이렇다보니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관용에 의해서 서로를 짐작하고 용인할 뿐이다.

소수자의 문제로 오면 이런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물론 우리는 소수자에 대해서 논의하며 평등과 동등한 인격을 계속해서 강조했다. 그리고 이는 다른 사람과 내가 동일한 욕구나 동등한 수준의 노동력을 가진 ‘같은’ 인간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차이를 모른 체하지 않고 명확히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나와 ‘다른’ 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대화의 장에 소수자들의 목소리들이 앉을 자리를 내어주고 앞으로의 방향을 함께 논의할 수 있을 때 우리 사회가 더욱 건전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목 차

1. 굳이 이 이야기인 이유

2. 다리 깁스와 버스

3. 난공불락의 성

4. 오늘부터 우리는

내 용

[2016 청년 에세이 우수상] '걸리버는 어디에서나 걸리버이길'

강성훈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1. 굳이 이 이야기인 이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인 ‘걸리버 여행기’에서 주인공 걸리버는 ‘릴리퍼트(Lilliput)’와 ‘브롭딩낵(Brobdingnag)’을 탐험한다. 두 나라는 각각 소인국과 대인국으로 걸리버에게는 전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기회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걸리버는 어느 나라에서도 여전히 걸리버이기 때문이다. 그는 커지거나 작아지지 않는다. 그는 걸리버로서 새로운 세상과 만나고 새로운 사람을 경험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한 인간이 경험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오랜 옛날, 인류가 삶을 처음 영위한 때부터 지금까지 인간은 매순간을 함께 살아왔다. 생명을 위협하는 포식자로부터 살아남거나 더 나은 먹이를 구하고 나아가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사람은 언제나 혼자일 수 없었다. 여러 가지 경험과 사고의 과정을 거치며 사람들은 ‘우리’라는 가치를 적립해 왔지만, 역설적이게도 오늘날이 그 가치를 더욱 크게 외쳐야 하는 시기가 된 듯하다.

‘우리’라고 하는 가치를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사람들은 ‘자유’와 ‘평등’을 강조해왔다. 개인이 인간다운 삶을 마음껏 누리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했고 자유의 가치를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평등이 반드시 따라야했다. 그런데 오늘날은 법과 제도적 측면에서 자유가 강조되고, 개인의 행동에 외적인 자율성이 부과됨에 따라 세상 모든 일은 스스로 해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따라서 반드시 해낼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도태되거나 심리적 괴리를 겪을 수밖에 없다. 또한 이 시선은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져 무언가를 나와 ‘동일하게’ 해내거나 바라보지 않는 대상에 대한 편견은 오히려 강화되고 있다.

철학자 한병철씨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피로사회 ” 라 명명하고 “동일자의 지옥 ”에 빠진 현대 사회의 모순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런 모습들은 자유와 함께 반드시 강조되어야 할 평등의 가치를 위협하고 있다. 원래 평등의 가치는 ‘차이 없음’이나 한쪽의 일방적인 ‘관용’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위에서 설명한 피로사회에서는 차이는 인정되나, 무조건적 차이의 인정이 그릇된 방향으로 흘러 모든 것을 긍정하고 동질적인 층위에서 파악하게 만든다. 달리 말하자면, 타인과 나의 다름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 노력한다기보다는 모른 체하고 지나가는 일이 다반사라해도 좋을 듯하다. 실상이 이렇다보니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이해하고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인 관용에 의해서 서로를 짐작하고 용인할 뿐이다.

소수자의 문제로 오면 이런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구성원 간의 올바른 소통이 힘들어진 사회에서 소수자로 산다는 것은 대화가 원활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의 삶보다 몇 배는 힘들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나는 지금 이 이야기를 하려한다. 그렇다, 지금부터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어쩌면 많은, 평범하다고 여겨지는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른다. 마치 걸리버가 소인국과 대인국을 오가게 되었듯이.

2. 다리 깁스와 버스

소수자를 이야기 할 때 먼저 떠오르는 이들 중에는 장애를 가진 사람들 즉, ‘장애인’이 있을 것이다. 장애라는 개념은 명확히 선긋기가 힘들고 때문에 여러 가지 협의와 제도에 의해 만들어진 기준에 따라 범주를 설정하곤 한다. 이런 불명확성에도 불구하고 장애인의 반대말은 여전히 ‘정상인’인데 다만 근래에는 이러한 기준들에 대해 우려 섞인 목소리가 커지며 ‘비장애인’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까지 비장애인이라는 용어가 사전에 등재되지 않는 등 공식화 되지 않았음에도 장애인의 반대말이 정상인이 아니라는 점에는 대부분 동의를 표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장애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얼마 전 SNS를 하던 중 흥미로운 글을 발견했다. 해당 SNS의 페이지 중에는 ‘~대학교 대나무 숲’과 같은 페이지들이 다수 있는데, 여기서 대나무 숲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 대나무 숲으로 얼굴이나 이름을 걸고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익명으로 올릴 수 있는 페이지들의 성격을 보여준다.

그 중 한 대학의 대나무 숲 페이지에 올라온 이야기이고 내용인 즉 이렇다.

다리를 다친 어느 학생이 깁스를 한 채 목발을 짚으며 등교 했다. 그리고 대학 건물의 좁은 계단을 천천히 오르고 있었다. 강의가 시작될 시간이 다가오자 다른 학생들은 계단을 급히 오르기 시작했다. 문제는 그 계단이 여러 명이 지나다닐 만큼 넓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다리를 다친 학생은 다른 학생들만큼 빨리 계단을 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시각 계단을 이용한 학생들 중 한명이 목발을 짚은 학생이 통행에 방해가 되었다는 식의 불만을 토로하며 그런 때에는 학교에 나오지 말 것을 당부(“다른 사람 방해하지 말고 곱게 집에 있어라”라는 식의)하는 익명의 글을 남겼다. 물론 글 아래로는 익명의 글쓴이를 비판하거나 날선 비난을 보내는 댓글(댓글은 실명으로 공개된다)들이 여럿 달렸다. 여기서 우리는 몸이 불편한 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몸이 불편하다는 것은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다는 말이고 이는 일시적으로나마 장애를 가진 상태로 가정 가능하다. 따라서 위의 사례에서 장애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유추해 볼 수 있다. 태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장애인들을 다른 많은 사람들과 같지 않으며 불편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라 명확히 선을 그어 파악하는 태도다. 따라서 그들은 평범하다고 여겨지는 다른 사람들과 같을 수 없다. 같을 수 없음의 인지는 장애인을 이해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주는데, 먼저 장애인에게 나타나는 신체적·정신적 특징을 이해하게 해준다. 그리고 이 때 나타나는 특징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임과 동시에 대부분이 생활에 걸림돌이나 결점들로 부각된다. 이 결점들은 장애인이 다른 사람들처럼 행동하고 일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보여주고 이어서 두 번째 태도인 ‘관용’을 불러온다. 위의 SNS사례에서 댓글들이 보여주듯 장애인은 ‘보호’해야 할, 관용의 대상이 된다. 물론 사회에 이런 생각이 광범위하게 함의되어 있다는 것은 부정적이라 볼 수 없고 실제로 장애인들이 살아가는 것에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장애인을 무조건적인 보호의 대상으로만 보는 시선은 오히려 그들이 하나의 인간으로 살아가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위와 관련된 최근의 논의로는 ‘인권’과 ‘시민권’의 차이에서 오는 문제를 들 수 있다. 여기서 인권이 천부적이라면 시민권은 획득해야 하는 가치라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국민의 4대 의무’가 있는 것처럼 시민권은 어떤 의무와 책임을 다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권리이기 때문이다.

인권이 시민권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명제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의하더라도 여전히 문제는 존재한다. 현재로서는 인권을 보장해줄 수 있는 ‘주체’가 국가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의 지정하는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 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권을 완전히 보장 받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여러 가지 이유로 의무를 수행하지 못할 확률이 높은 장애인들은 결국 타인들의 무조건적인 보호에 의해서만 살아갈 수 있으며 결코 동등한 권리를 가진 시민, 인간이 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배려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자율적인 목소리를 낼 권리를 획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비장애인의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이 실질적인 문제로 대두시킬 위험이 있다.

서울시내에서 버스를 타다보면 최근 들어 ‘저상버스 ’의 숫자가 많이 늘었다는 것이 느껴진다. 교통약자를 배려하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대중교통수단이 늘어나는 것은 분명 환영할만한 일이지만 저상버스의 다량보급이 모든 이에게 썩 유쾌하지는 않아 보인다. “아, 저 버스 비좁던데….” 기다리던 번호의 버스가 저상버스로 도착한 사람들이 버스 정류장에서 간간이 내뱉는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휠체어를 타는 사람들을 주 대상으로 한 버스인 만큼 각 좌석들이 차지하는 공간이 크고 그에 따라 승객들이 서있을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드니 이용하는 입장에서 불편을 겪는 일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면 사람들이 불만을 토로하는 진짜 이유가 자신의 불편 때문만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나만해도 그렇듯, 교통약자가 저상버스를 이용하는 모습을 실제로 본 적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교통약자를 배려한다는 취지에 대한 실효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버스가 자신의 불편까지 초래하니 불만을 표출하게 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지금의 정부 정책은 저상버스의 대수 늘리기에 급급할 뿐 실제 운용에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저상버스의 공간이 너무 좁아 승객이 많은 차에는 휠체어를 타고 탑승할 수 없다거나 자동발판과 정류장의 높이가 맞지 않아 내리지 못하는 경우, 심지어는 자동발판 자체가 고장 난 경우나 버스 운전기사가 발판의 작동법을 모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들마저도 저상버스 탑승을 꺼려하는 실정이다.

위의 상황은 장애인들의 목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은 물론 그들이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도 없는 형편임을 보여준다. 그들은 스스로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여기에서 모순은 실제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장애인들이 아니라 잘못된 정부의 시책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따가운 눈총을 감당하거나 미안한 마음을 느껴야하는 몫은 고스란히 장애인들에게 돌아간다. 어쩌면 그들이 정부 시책에 가장 큰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장애인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 정당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국가가 시민들에게 부가한 의무는 아마 장애를 가진 이들이 수행하기에 적당하지 않을 것이다. 몸이 불편한 이가 병역의 의무를 진다거나 벌이가 불가한 이가 납세의 의무를 지는 일은 너무나 힘들다. 그리고 의무를 수행하지 못한 이들이 당당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그들에 맞는, 실천할 수 있는 의무를 제시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의무는 대부분 ‘노동’을 기준으로 설정되는데 노동의 가치는 쉽게 생각했을 때 일한 이후에 받는 돈으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좀 더 내부로 파고들면 노동의 가치는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와 관련된다. 그리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의 크기는 객관적인 노동 성취량과 비례하지 않는다. 장애인이라고 하는, 조금은 특별한 위치의 사람들은 그만큼 특이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크게 발휘될 수 있는 부분은 자연스레 ‘공공부문’이 될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당연한 사실 중 하나는 장애인이라 해서 모든 부분에 약점이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특정 감각은 섬세할 수 있다는 점이다. 각자에 알맞은 부분에 배치된다면 충분히 그 능력이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위의 이야기로 돌아가 장애인들의 능력 발휘가 굳이 공공부문이어야 하는 이유는

첫째로 장애인들 스스로의 당위확보를 위해서다. 공공부문에서의 노동은 그들 스스로에게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명확한 증빙이 되어줄 것이다. 둘째로는 바로 정상인이자 비장애인으로 불리는 다른 사람들이 받을 영향이 더욱 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들의 공공부문 일자리 확충을 위해서는 다른 이들의 노력이 필연적인데 이런 과정들 속에서 비장애인 집단에 속한 사람들도 여러 가지 긍정적인 효과를 보게 된다. 비장애인들은 장애인들의 공공부문 일자리 확충 과정에서 불편한 조건에도 주어진 일을 맡으려고 하는 장애인들의 삶의 자세를 느낄 수 있으며, 이어서 그러한 장애인들을 자신들이 돕고 있다는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순환운동이 되는 셈이다.

3. 난공불락의 성

성(性). 성이라는 말은 참 신기하면서도 두렵다. 우리는 이 말을 남자와 여자의 성별을 구분하는 말으로 많이 쓰지만 사실 이 단어의 가장 큰 의미는 “사람이나 사물 따위의 본성이나 본바탕 ”이다. 본성, 본바탕이라는 말은 어딘지 모르게 완고해 보인다. 그래서일까 우리에게도 알게 모르게 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존속되어 왔던 것 같다.

‘페미니스트(feminist)’, 이제 다들 한 번 쯤은 들어봤을 말이다. 그만큼 여성인권 신장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높아졌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여성의 인권은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신장을 거듭해왔음에도 여전히 만족스러운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 가장 대표적인 현상으로는 ‘유리천장’을 들 수 있다. 여성의 사회진출은 스스로의 욕구임과 동시에 현대사회의 필요이기도 하며, 따라서 우리의 전통적인 모습과는 다르게 대부분의 여성들이 직장,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사회생활에는 일정한 제약이 가해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다행히 이러한 문제들은 성별을 가리지 않는 광범위한 합의하에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요즘의 모습인 듯하다. 그런데 최근에는 ‘여성혐오 ’라고 하는 말이 새롭게 대두되고 있다. 여성혐오는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혐오’라는 말을 보다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다. 여성혐오는 싫어하거나 경멸한다는 뜻에 머무르지 않고, 사람 특히 남성이 여성에게 던지는 여러 가지 편견의 시선을 아우르는 말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이 단어가 많이 사용되는 이유는 여성인권 신장에 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반증이 될 것이다.

사실 여성의 인권문제는 남성에 비해 물리적인 약자라는 점에서부터 시작된 적이 많았다. 지금에 와서도 강간이나 폭행 심지어는 살인 등에 이르는 강력범죄의 피해자로 여성의 숫자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러한 범죄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예방하는 방법은 휴대용 혹은 신체 부착용 호신기기의 상용화 즉, 과학의 발달이 최선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마치 세탁기와 압력밥솥이 많은 여성들의 가사부담을 덜어준 것과 같이 말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최근에 우리나라에서 일어난 안타까운 사건들을 보면 여성들이 강력범죄의 대상에 쉽게 노출되는 것은 사실 인듯하다. 또한 이런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면 날수록 여성들은 스스로를 ‘잠재적 피해자’로 생각하거나 주위에 남성들을 ‘잠재적 용의자’로 생각해 경계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주위에 있는 불특정한 인물들을 모두 잠재적 용의자로 낙인찍어서는 안되는 일이나 그러한 심정적 동요는 충분히 이해해봄직하다. 이 문제에 대해 깊게 논의하기 전에 좀 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자.

‘젠더(gender)’는 쉽게 설명하면 사회적 의미의 성인데 이는 ‘생물학적인 성(sex)’와는 달리 정해진 것이 아니다. 그리고 최근의 젠더 개념은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인 위치를 설명하는 것을 넘어서 소수의 성적지향을 설명하기 위해 쓰이기도 한다. ‘트랜스젠더(transgender)’라는 말도 이제 우리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다.

트랜스젠더의 경우에는 타고난 생물학적 성별이 본인의 젠더와 아예 상반된 경우를 이야기하는데 이러한 경우에는 수술을 통해 새로운 성의 삶을 살 수 있다. 이와는 조금 다르게 일반적인 동성애는 자신의 생물학적·사회학적 성별 정체성은 동일성을 그대로 유지하지만 성적지향만이 동성을 향하는 경우를 말한다. 따라서 이 경우는 수술을 통한 해결이 불가하다. 사실 앞에 설명한 여러 사람들보다 더 힘든 경험을 하게 되는 ‘인터섹스(intersex)’의 삶도 존재한다. 인터섹스는 겉보기의 모습과 다르게 염색체가 뒤바뀌거나 성기의 길이가 어느 성별에도 맞지 않다고 판단되는 경우이다. 이 사람들이 정말 힘겨운 점은 자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혹은 남자를 좋아하지 여자를 좋아하는지에 대해 스스로도 판단할 수 없어 혼란을 겪는다는 점이다. 본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전혀 가늠할 수 없는 안타까운 상황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다행인 점은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2000년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도 매년 ‘퀴어문화축제’가 열리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도 여러 가지 논란이 일고 있지만 축제가 계속해서 끊이지 않고 진행될 수 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생각해봐도 좋을 것이다.

여성이 겪는 문제와 동성애나 여러 특수 성적지향이 겪는 문제는 어찌 보면 같은 층위에서 생각하기 힘들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자신들보다 다수인 사람들에 의해 제대로 이해되지 못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실제로 숫자가 적거나 사회적인 힘이 약하기 때문에 다수의 인정 없이 주체적 목소리를 낼 수 없다는 점에서는 장애인과 비슷한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젠더 이론가인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는 다양한 성의 관점을 “나의 젠더나 섹슈얼리티 중 어느 것도 딱히 내 소유물이 아니며, 둘 다 (……) 다른 사람 덕분에 가능한 존재 양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고 말한다. 결국 다양한 성적성향과 발현은 상호관계 속에만 가능함으로 이러한 이야기는 사회 구성원들의 광범위한 협의가 계속되어야만 진전 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 성적 소수자의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가 필요하다는 이야기이다.

어쩌면 계속적인 대화와 협의만으로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불가능하거나 허황된 이야기로 들리지 모른다. 물론 명쾌한 해답을 내리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제기는 결코 뜬구름이 아니라 현실적 테제이다. 시험에서 100점 만점을 받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로 0점을 받을 수는 없다. 단 10점을 받더라도 0점을 받은 것과는 다르다, 사실이 다르고 결과가 다르다. 난공불락의 성(性)을 허무는 일은 이렇게 작은 노력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또한 성소수자에 대한 논의를 허용하는 것은 언젠가 나에게 다가올지도 모를 뜻밖의 일들에도 사람들의 협의와 관심이 이끌어질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4. 오늘부터 우리는

소수자에 대해서 논의하며 평등과 동등한 인격을 계속해서 강조했다. 그리고 이는 다른 사람과 내가 동일한 욕구나 동등한 수준의 노동력을 가진 ‘같은’ 인간임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차이를 모른 체하지 않고 명확히 이해하려는 노력 속에서 나와 ‘다른’ 그 사람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위의 이야기에서 소수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보호나 관용이 오히려 그들의 자율성을 침해할 것이라는 말을 했었다(p.3). 그럼에도 관용은 여전히 기술(技術)적인 측면에서 중요하다. 특히 위에서 많이 언급하지 못했던 인지장애인의 범주까지 생각을 이어가 보면 그들의 삶이 다른 다수의 삶보다 객관적으로 쉽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우리는 이 점 또한 간과해서는 안된다. 물론 소수자의 행동이나 요구가 항상 정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혐오의 시선을 똑같이 혐오로 응수하겠다는 생각이나, 퀴어축제가 반대되는 이유 중 많은 부분이 그들의 성적 지향이 아니라 그 축제의 음란, 선정성 때문인 점들을 살펴보면 소수자의 목소리가 항상 옳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대화의 장에 그 목소리들이 앉을 자리를 내어주고 앞으로의 방향을 함께 논의할 수 있을 때 우리 사회가 더욱 건전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걸리버가 소인국과 대인국을 거치며 본 것은 아마 인간의 나약함이나 추악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걸리버는 그 이후에도 여행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다른 삶의 가능성을 발견하려 애썼다. 그리고 나는 걸리버가 지구에 있는 어느 섬, 어느 나라에 도착하더라도 걸리버로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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