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박재우(건국대학교)보도일 2017.08.01

요 약
[에세이 우수상 수상작]
직접 겪고 분석한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 사회에서 차별이 생길 수밖에 없는 원인과 그 과정을 분석하고 새로운 차별(역차별)을 만들어내지 않는 선에서 차별 받는 계층을 위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다.
<2017 에세이 공모주제>
- 우리나라 국민들의 시민의식 수준을 진단하고, 보다 성숙한 시민의식 함양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시오.
내 용
[2017 청년 에세이 우수상] 차별,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박재우(건국대학교)
한국장학재단 주관으로 작년에 <다문화학생멘토링> 활동을 할 때였다. 당시 내가 맡은 학생은 동남아시아권 국가에서 온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전형적인’ 한국인과는 거리가 먼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혹여나 학생이 인종차별이나 따돌림 등을 당하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을 했었다. 나 때만 해도(불과 10여
년 전 얘기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따위의 이유만으로 손가락질 하거나 욕을 하곤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내가 배정 받은 학교엔 그런 차별행동이 보이지 않아 안심이 들었다. 내 기우와는 달리 학생은 교우관계가 원만한 편이었으며 적극적으로 의사표현을 할 줄 아는 활발한 중학생이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의 궤도에 오름에 따라 국민들의 전체적인 교양 수준이 상승하고 국제적인
문화를 주고 받을 역량을 갖추게 됨으로써 더는 인종 차별을 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는 것이 그때 나의 생각이었다.
차별은 어디에도 없었다. 허나 나는 그것이 착각에 불과했음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멘토링 활동 과정 안에는 주말마다 학생과 문화체험을 하는 일도 포함되었기에 나는
학생과 시내로 나갈 일이 잦았다. 보통은 버스를 타거나 했을 터이지만 그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걸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에 우리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내가 언젠가 그에게 그가 버스를 싫어하는 까닭을 묻자, 그는 내게 “사람들이 전부 자기를 쳐다보는 게 싫어서”라고 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어쩌면 차별은 사라진 게 아니라
단지 형태를 달리했을 뿐이라는 생각에 닿았다. 기존의 차별의식이 욕설이나 비방 따위의 노골적인 표현으로
드러났다면, 현재의 차별의식은 눈빛이나 표정처럼 보다 완곡적인 표현으로 변모한 채 여전히 존재했다. 사실 차별은 어디에도 있었다.
혹자는 아마 “그래도 이 정도면 옛날에 비해 많이 나아진 게 아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그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확실히 현대 사회는 차별을
없애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중이고 실제로도 지금껏 많은 성과를 내 왔다. 현대에 들어선 대부분의
국가는 정책적으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며 국민들 역시 타인을 존중하는 경향을 보인다. 허나 나는 이런
양상이 오히려 더 위협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위험성은, 현대화된 차별의 은밀함에서
비롯된다. 일 년 전 내가 그랬듯 많은 사람들은 사회에 지금도 남아 있는 차별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정치적 중립 준수에 민감한 뉴스 기사와 매스미디어가 쏟아내는 컨텐츠에선 차별을 찾아내기 힘들고, 따라서 사람들은 본인들이 차별이 없는 평등한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기 쉽다.
예컨대 어느 방송국에서 흑인을 비하하거나 장애인을 조롱하는 내용을 담은 방송을 내보냈다고 하자. 틀림없이
그 방송국은 사람들의 거센 비난을 받을 것이고 정부로부터 징계 조치를 당할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방송국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면 사람들은 이를 보고 역시 세상엔 차별이 설 자리가 없음을 확인하고 넘어갈 게 분명하다.
헌데 그건 우리가 실질적으로 차별을 당하는 입장에 서 보지 않았기 때문에 착각하는
것이다. 방금 들었던 예시를 다시 살펴보면, 사람들은 방송국을
비난하고 사과를 받아내는 것으로써 자기들이 차별을 철폐했다고 믿지만, 사실 방송국이 해당 내용을 송출한
시점서부터 조롱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이미 상처를 입은 후다. 이어지는 사과문 따위는 차별 받지 않은
계층에게 위안이 될지 모르나 차별 받은 계층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른바 “병 주고 약 주는” 식인데, 차이점이
있다면 약을 병에 걸린 사람에게 건네주는 게 아니라 애먼 사람한테 준 셈이다.
내가 맡은 학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실제로는
버스 승객들이 그를 아무 생각 없이 쳐다봤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대중교통을 기피할 정도의 트라우마를 입은 후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 인간을 차별하는 게 당연히 나쁘다는 걸 알고 있고 그러므로 하지 않으려 애쓰는 편이지만, 왜인지 나와 다른 듯한 사람을 보면 눈길이 가는 게 사실이다. 물론
내 눈길엔 경멸의 의도가 담겨 있지 않고, 이는 다른 사람들의 경우도 나와 비슷할 거라 생각한다. 그렇지만 날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눈빛은 본래 의도와는 상관 없이 한 청소년에게 마음의 상처를 입히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우리는 사회적 약자 계층이 명백히 상처를 받았음에도 우리 사회엔 차별이 없다고(혹은 드물다고) 굳게 믿는다.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이다.
세상에 어떤 나쁜 것이 존재한다는 걸 알고 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고쳐나갈 수 있다. 허나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 지속된다면 이 세상은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뒤틀린 모습으로 자라나다가 결국 터지고 말 것이다. 이건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이다.
1998년 독일의 교사는 히잡을 착용한 채 수업을 진행했다는 이유로 교사 자격을 박탈당했으며, 프랑스
상하원은 2004년에 학교와 공공시설에서의 종교적 상징물 착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비교적 최근인 2010년에 독일 메르켈 총리가 자국의 다문화주의가
실패했음을 선언함을 효시로 영국과 프랑스 등의 유럽 국가가 뒤를 따랐다. 특히 프랑스의 정책 변경은
프랑스가 오랜 역사에 걸쳐 다문화 정책을 장려해왔음에 더불어 전통적으로 자유, 평등, 연대를 국가 핵심 이념으로 표방해다는 점에서 세상에 충격을 줬다. 그리고 2015년 11월,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폭탄 테러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으며, 2017년 현재도 유럽 국가들은 테러의
위협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이처럼 수면으로 드러나지 않은 차별의식은 우리 사회를 큰 위험에 빠뜨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차별하지 않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국어사전에 따르면 차별이란 ‘둘 이상의 대상을 각각 등급이나 수준
따위를 두어서 구별함’이라고 한다. 사전적 정의로 보자면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차별의 속성이 설명 된다. 사실 그렇다. 인간이 모인 곳이라면 어디든 차별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이유는 간단하면서도 복잡한데, 우리 모두는 저마다
다른 특징을 갖고 있고 개인은 살아가면서 본인과 타인을 끊임없이 구분 지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 간의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생각은 현실적인 상황을 외면한 채로 갖는 강박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차별이 결코 사라질 수는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하고 싶다. 차별이란 소파 밑에 들어간 겁 많은 강아지와 같아서, 억지로 빼내려고
할수록 더 깊은 곳으로 도망칠 뿐이다. 단순히 “우리 이제부터
남을 차별하지 말고 동등하게 대우해줍시다.” 식의 구호나 정책 같은 건 누구를 위한 정답도 되지 않는다.
우선은 차별이란 문제 아래에서 가해자과 피해자는 명백하게 구분 되지 않는다는 걸
인지해야 한다. 누구나 순식간에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돌변할 수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일례로 1960년대 미국에서 인종차별을 완화하기 위해 만든 ‘적극적 우대조치’는 현대에 와서 흑인이 아닌 인종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고,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남성에만 한정된 징병제나 각종 여성지향 정책에 대한 반발의 목소리가
새어나오다 못해 ‘혐오’라는 키워드로 압축이 되는 사회적
현상까지 만들어냈다. 특히 후자의 경우엔 가해자-피해자 간의
관계가 여러 번 뒤바뀌다 못해 이제는 경계가 흐려져 모두가 자기들이 피해자라 주장하는 지경에까지 치달았다. 이처럼
차별은 해결하려 들 때마다 꼬리에 꼬리를 물어 근본적으로 없앨 수 없는 문제이다.
차별을 뿌리 뽑지는 못한다는 게 나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차별을 아예 방치해서는 안 될 일이다. 작년
경험이 계기가 되어 나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차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봤다. 현대 사회에도
여전히 차별은 존재한다. 단지 은밀하고 완곡하게 변모해 쉽사리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한번 그런 시각을 갖고 나니 생각보다 많은 영역에 걸쳐 차별 사례가 관측된다는 점이 놀라웠다. 종류도 다양해 성차별, 인종차별,
학력차별, 외모차별 등 일일이 셀 수조차 없었지만 모든 차별의 발생과 전개 과정은 서로
비슷한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이뤄졌다.
먼저 최근까지도 우리나라에서 뜨거운 이슈인 성차별을 예로 들겠다. 한국 문화는 전통적으로 유교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왔고, 따라서
이런 분위기 아래 세대가 이어지며 남성중심적인 풍토가 조장/형성되어 왔다. 이 시기에 여성은 명백한 사회적 약자였다. 하지만 한국이 발달하여
개방적인 사회가 되자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늘어났고, 지적 사회 활동의 척도가 되는 대학 진학률에 있어서도 2009년을 기점으로 현재까지 여성이 남성에 비해 계속 높아왔다. 여성의
활동 반경은 점점 넓어져 한동안 금녀의 영역 취급을 받아온 군대에도 여군이 1만 명이 넘을 정도로 이제는
소위 ‘여풍당당’ 시대가 되었다.
여성의 활발한 사회 활동이 부각됨과 동시에 남성에 대한 역차별 문제가 대두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남성들의 불만은 거의 비슷해 주로 군대와 취업에 관련하여 본인들이 여성에 비해
불이익을 받고 있다는 주장을 중심으로 한다. 이 논점에 대해선 지금도 반론과 재반론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여성들은 자기들이 여전히 사회적 약자라고 주장하고, 남성들은
이제 자기들이 사회적 약자가 되었다고 반박한다. 두 주장 모두 옳다.
여전히 여성은 사회적 약자일 수 있고, 이제는 남성이 사회적 약자가 되었을 수도 있다. 남녀차별 이슈는 현재 침체기 과정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차별의 전개 과정은 어느 정도의 유사한 패턴을 따른다. 필자는 이를 크게 네 단계로 나눠 다음과 같은 순차로 나열했다.
1. 인지기:
명백한 사회적 약자가 존재하고, 사람들은 그것을 인지한다.
(여성, 흑인, 장애인 등)
2. 개선기:
그들을 장려하기 위해 사회가 움직인다. (적극적 우대조치,
지원금, 인식 개선 캠페인 등)
3. 회복기:
사회적 약자가 정당한 위치를 회복한다. (현대 한국 여성,
현대 미국 흑인)
4. 침체기:
이후에도 사회는 옛 약자들에 대해 조치했던 움직임을 그치지 않고, 그러다 보니 기존의 상대적
강자에 속했던 계층의 불만이 발생한다. (주로 역차별 문제)
나의 4단계 모델에서는 이전 단계가 선행되지
않고는 다음 단계가 이어지지 않는다. 예컨대 장애인의 경우, 현재
정부에서 시행 중인 여러 배려 정책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단계적으로는 개선기와 회복기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장애인 의무 고용제 혹은 장애인 전용 주차구역 등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장애인들은 약자에 속해 있다. 정해진 비율만큼 장애인을 고용한다고 해서 모든 장애인들이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편리한 주차가 가능하게끔 배려해준다고 해서 그들의 신체적 불편함이 근본적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침체기, 즉 장애인이 아닌 사람들이 반발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고 있다.
반면 이전 단계가 선행될 시엔 반드시 다음 단계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침체기가 지나면 기존의 가해자와 피해자 관계가 역전되며 ‘차별
사이클’은 인지기 단계로 되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진행된다. 우리는
이를 역차별이라고 부른다. 역차별은 하나의 차별을 없앤답시고 그만큼의 새로운 차별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라
궁극적으론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차별을 심화시킨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식 개선을 위해선 역차별을 줄이는 방안을 중심으로 접근해야 한다.
카프만Karpman의 드라마 삼각형 모델에
따르면, 인간 간의 관계는 크게 가해자, 피해자, 조력자의 세 역할로 나뉜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가해자와 피해자와
조력자의 구분이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세 역할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면서 삼각형 사이를 빈번히
이동한다. 예를 들어 조력자가 희생자를 돕는 과정에서 그의 힘이 먼저 소진해 버린다면, 그는 즉시 희생자의 자리로 이동을 하고, 반대로 그동안 그가 도우려
했던 희생자가 조력자에 대한 가해자로 돌변하는 식이다(카프만은 이것을
‘비극’이라고 불렀다). 이 모델은 역차별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역차별이란, 드라마 삼각형
모델로 표현하자면, 가해자(사회적 차별)의 핍박으로부터 조력자(사회적 강자)가
희생자(사회적 약자)를 도우려 하지만 둘의 관계가 역전되는
현상이다.
말했듯 조력자가 피해자로 전락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그가 타인을 돕는 행동을 통해
본인을 소모시켰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어린 시절부터 타인을 돕는 것이 옳은 행동이라고 가르친다. 물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적절한 조치를 해주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고 또 윤리적으로도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하지만 누군가를 도우려 하다가 정작 본인이 피해를 입은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다음부터 타인을
돕는 데 소극적이 되거나 심지어 부정적으로 변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경우 전체적으로는 피해자가 한 명
더 늘어나는 동시에 조력자 역시 한 명이 줄어드는 셈이 되어 차라리 돕지 않는 것만도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약자에게 도움을 제공할 때의 균형이다. 우리 사회는 지금까지 수많은 실제 사례들을 겪으며 단순한 제도적 혜택을 비롯한 고전적인 차별 철폐 노력은 결국
새로운 차별을 만들어낼 뿐이라는 것을 익혀 왔다. 사실 ‘누군가를
돕는’ 행위 자체부터 지극히 차별적인 대우가 될 수밖에 없다(차별의
정의는 ‘둘 사이에 차이점을 둬 구분함’이고, 만약 본인과 타인이 완전히 똑같다면 그를 굳이 도울 이유조차 없을 테니까).
그러므로 조력자가 피해자가 되고 피해자는 가해자가 되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의 기저에 숨겨져 있는 차별로부터 떨어질 수 없을
거다. 따라서 우리는 피해 계층을 지원하면서도 역차별을 발생시키지 않는, 이른바 ‘지속 가능한 도움’을
구현해 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본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타인과 함께 나아갈 수
있을까.
하나의 대안은 성경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의 일화에서 찾아낼 수 있다. 신약성경 루카 복음서 제10장
25절부터 37절엔 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를 당한 사람을 도와주는 일화가 나온다.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길에 쓰러진 사람을 돕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한다. 그는 기름과 포도주를 부상자의 상처에 붓고 싸맨 뒤 자기가 타고 있던 짐승에 같이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간다. 그러고는 이튿날이 되자 주막 주인에게 비용을 지불한 뒤, 추가적으로
돈이 필요하면 자기가 돌아오는 길에 치르겠다고 말하고는 그대로 훌렁 떠나 버린다.
사마리아인은 다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 하는 와중에도 희생자에게 필요한 일정한
정도의 도움만을 제공했다. 그는 마침 갖고 있던 물품을 활용해 상처를 치료했고, 자기가 타고 있던 짐승의 남는 자리에 희생자를 태워 옮겼으며, 금전적으로도
앞으로의 여정에 무리가 되지 않을 만큼만 도왔다. 덕분에 그는 조력자의 입장으로 희생자를 돕는 과정에서
스스로를 희생자로 전락시키지 않아도 됐다. 위 이야기에서 보이는 ‘본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의 타인을 위한 도움’은 이렇듯 ‘지속 가능한 조치’를 구현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앞서 설명한 ‘본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의 타인을 위한 도움’은 조력자가 피해자를 오랜 기간 동안 도울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적절한
대안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에는 한계도 있다. 인간관계에는
근본적으로 상호작용이 있어야 하는데, 사마리아인의 예시처럼 본인과 타인 사이에 벽을 정해 두고 침범하지(침범 받지) 않으려는 태도는 뭔가 개운하지가 않다. 물론 여전히 사마리아인의 방식은 좋은 대안이다. 다만 타인을 돕는
행위가 단순한 일방적인 노력 차원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조력자를 성장시킬 수 있다면 훨씬 좋을 것이다. 우리는 그걸 윈-윈win-win관계라고
칭한다.
조력자와 피해자가 함께 성장하는 윈-윈win-win관계. 이런 형태의 도움은 언뜻 보면 이상적인지라 실제로도
이런 경우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의외로 우리의 주변에서 자주 보이곤 하는 형태다. 같은 반 친구의
시험공부를 도와주는 학생을 생각해 보자. 어디까지나 학생은 친구가 어려워하는 문제를 도와주고 있을 뿐이지만, 그 과정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것은 학생 스스로 여러 문제를 돌아보는 복습 활동이다. 즉 조력자가 피해자를 돕는 동시에 스스로를 돕고 있는 것이다. 봉사활동을
하며 새로운 시각을 얻거나 깨달음을 찾아낸 자원봉사자의 경우도 이에 속한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유명인들의
봉사활동 경험을 익히 들어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봉사활동이 자기들에게 영감을 주는 놀라운 경험이라고
말한다. 필자가 느낀 바도 이와 비슷하다. 내가 멘토링 활동을
시작한 동기는 순전히 ‘대학생으로서의 미덕’과 호기심이었지만, 활동이 진행됨에 따라 나는 그동안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들(차별의
모습, 나의 행동 등)을 한번쯤 짚어보게 되었다. 덕분에 내 삶의 태도는 조금이나마 건설적인 방향으로 바뀌었으며 이는 현재에도 내 태도 전반을 이루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내가 1년간의 활동을 마친 후에도 올해 멘토링
사업에 재차 지원을 한 까닭도 내가 누군가를 도우면서 스스로도 성장하는 경험을 겪어 봤기 때문이다.
피해자가 조력자의 위치로 올라가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런 경우는 꽤 잦다. 이 세상엔 고단한 옛 시절을 견뎌낸 끝에 사회적으로 인정 받는 훌륭한
인물로 성장한 사람들의 일화가 가득하다. 이순신 제독, 오프라
윈프리, 넬슨 만델라, 마틴 루터 킹 같은...... 일일이 열거하자면 끝이 없어 본 에세이를 20장 넘게 늘릴지도
모르니 이만 갈음하겠다. 핵심은 이들 모두 한때는 피해자였으나 특정한 도움을 받은 덕에 이제는 피해자를
벗어나 조력자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로써 대략적인 갈피는 잡혔다. 역차별을
발생시키지 않는 도움이 성립하기 위해선 ①조력자에게 부정적인 효과를 줘서는 안 되며, ②추가적으로 조력자에게 긍정적 효과를 줘야 한다. 다음 문단에서는
정부 및 기관 차원에서 ‘역차별 없는 도움’을 실행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겠다.
현행 제도는 오로지 사회적 약자만을 중심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단기적으로는 효과를 볼 수 있을지 모르나 장기적으로 이뤄진다면 역차별을 일으킬 여지가 다분하다. 상술했다시피 역차별은 우리 사회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차별의식을 은밀히 감추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제도의 개선 방향은 역차별을 유발하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첫 번째 개선안은 적극적 우대조치를 의무화하지 않는 것이다. 본래 이 표현은 미국에서 온 것이지만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여성
할당제’, ‘장애인 의무고용제’ 등의 형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거의 모든 인간은 어느 집단에 소속되어 경제활동을 하게 마련이고, 경제활동은
인간의 삶에 있어 아주 중요한 영역이므로 사람들은 이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적극적 우대조치의
혜택 대상에 해당 되지 않는 계층의 경우엔, 의무적인 할당제가 본인의 정당한 권리를 빼앗고 있다는 판단을
할 가능성이 높다. 극단적인 예시이지만 독일 나치 정권도 마찬가지로 외국인들에게 일자리를 빼앗긴 국민들의
분노를 선동한 덕분에 권력을 잡지 않았는가.
물론 취약 계층에 대한 배려는 필요하다. 따라서
고용 동향도 함께 변화하여야 한다. 각기각층의 사람들은 저마다 잘할 수 있는 분야가 다르다. 예컨대 남성은(일반적으로) 힘이
센 편인 반면 여성은 공감 능력이 높다. 이러한 특성을 살려 개인이 실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분야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보완해나가는 방식으로 고용을 해야 한다. 어떤 분야의 구성원 비율을 맞추기 위해서 억지로
비율을 조정한다면 반발심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집단이 추구하는 목표의 효율도 감소하고 만다.
두 번째 개선안은 피해자를 돕는 조력자에게 돌아가는 보상을 상향하는 것이다. ‘보상’이라는 표현이 다소 어색할 수도 있다. 돈을 바라고 남을 돕다니? 허나 필자는 금전적인 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소하지만 일상적인 예시로 길거리에서 지갑(또는
핸드폰)을 줍는 상황을 들겠다. 사람들은 습득물을 팔아치우는
편이 돌려주는 것보다 금전적으로 이득이 큼에도 불구하고 대개 돌려주곤 한다. 이는 개인에게는 타인을
도우려 하는 기초적인 본성이 있다는 증거이자, 인간의 선행에 따르는 보상이 반드시 금전적인 보상이여야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생존에 필요한 기초 욕구를 제외한 인간의 나머지 욕망은 전부 ‘인정의 갈망’에서 비롯된다. 개인의
선행을 이끌어내는 데는 인정, 칭찬, 개인 양심의 충족 등의
심리적인 보상으로도 충분하다. 타인을 돕는 행위가 모두의 존경을 받는 문화가 뿌리 내린다면 인간은 지금보다
누군가를 돕는 데 거리낌이 없어질 거다. 예컨대 국가기관 차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타인을 도운 시민들에게
표창장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자발적으로 남을 도울 것이다.
세 번째 개선안은 위 조치와 동시에 적용되는 엄격한 처벌 기준이다. 혹자는 내가 방금까지만 해도 강제가 아닌 자발적 움직임을 장려하자고 했으면서 이제 와서 처벌을 언급하는 까닭에
의문을 표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차별적인 사고를
갖지 마시오”가 아니라 “차별적인 행동을 하지 마시오”에 가깝다. 원칙적으로 인간은 다른 인간의 사고에 개입해서는 안 되며
그럴 수도 없다. 생각은 개인 내면에서 이뤄지는 자유로운 흐름이기 때문이다. 허나 그것이 행동으로 옮겨졌을 때 개인의 자유는 외부 세계로 드러나게 되고 개인은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비록 필자의 주장은 ‘인간이 결코 개인의
차별의식과 떨어질 수 없음’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지만, 그렇다고
노골적인 차별 행동을 용인하는 입장은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차별을 한다. 그렇지만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걸 이용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나갈 수 있기도 하다. 나는 이것을 인간이 타고난 선함이라고 믿는다. 그러므로 차별의식을
공격적인 수단으로 표출해 사람들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행위는 용납되어선 안 된다.
차별을 억제하려는 자정 의식이 전제된다면, 처벌
주체는 정부가 정한 법이 되어도 좋고 사람들 사이에 존재하는 시민 의식이 되어도 좋다 본다. 따지자면
후자의 경우가 조금 더 낫겠다. 그리고 후자의 상황이 자연스럽게 진행되기 위해선 마지막 개선안이 필수적이다.
네 번째이자 마지막 개선안은 올바른 교육의 실행이다. 교육은 이미 언급한 세 가지의 제도적 개선안에 지속성과 정당성을 부여한다. 우리
모두는 정해진 제도 아래에서 살고 있으므로 제도를 고치는 것이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준다는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어디까지나 제도는 우리의 합의가 만들어낸 산물에 지나지 않으므로,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우리의 의식 수준이 그대로라면 결국 제도든 뭐든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올바른
교육을 통해 (제도적 조치에 앞서는) 인간 차원의 의식 개선을
해야 한다. 이것이 본 에세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이자, 앞선
세 가지의 개선안을 가능하게 하는 핵심이다.
우리 사회는,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장애인을 동정할 줄 알며 약자를 보호하라며, 어린 시절부터 타인을 배려하라고 가르친다. 헌데 그 의도 자체는 이해할 만하나 방향 면에서는 어딘가 잘못된 듯싶기도 하다. 왜 여자는 무조건 약자여야 하고, 왜 장애인은 무조건 불쌍해야만
하는가? 애초에 강자와 약자를 나누거나 누군가를 불쌍히 여긴다는 시각 자체가 본인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걸 전제로 하는 사고방식이지 않은가? 계속 말했다시피 우리 안에 존재하는 차별의식은 사람들 간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지, 그걸
두고 우열을 가리거나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반면 우리나라의 교육은 차별을 없앤답시고 학생들에게 무의식적인
우열의식을 주입하고 있다.
실제로 특별대우의 대상이 되는 당사자들 가운데엔 그런 일방적인 사고방식이 싫어 도움을
거부하는 경우도 많다.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마저 그 도움을 뿌리치고 싶어할 정도라면 우리의 본래
의도와 실질적인 결과가 얼마나 크게 빗나가 있는지에 대해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본인이 차별을 하는 중인지도 모르는 채로 살아갈 수밖에 없을 거다.
줄이자면, 교육은 인간의 약점을 부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장점을 살리는 데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장점과 단점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지닌 장점과 약점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하나의 특성으로 받아들인다면 차별의 근원이 되는
우열의식이 설 자리를 잃는다.
시각장애인은 앞을 보지 못하지만 다른 이들에 비해 발달된 촉각을 갖고 있을 것이며
그건 그들만의 장점으로 작용한다. 마찬가지로 다문화 가정 자녀들은 대개 한국어에 서투른 반면 어린 시절부터
두 개국 이상의 문화를 접하기 때문에 입체적인 사고에 능숙할 거다. 이 밖에도 개인의 개성이 대체할
수 없는 자기만의 자산으로 기능하는 사례는 많다. 예컨대 여성은 남성에 비해 육체적으로 약함에도 불구하고
여성 특유의 이해력과 포용심을 바탕으로 현재 사회의 각 분야에서 눈부신 성취를 이루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시각이라면 개인의 부족함은 메워 놔야 하는 구멍을 넘어, 서로의 개성으로 마땅히 보완할 수 있는 모두의
영역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사회적) 동물이다”라고
처음 설파한 고대 그리스 시대 이후로 그의 말에 이견을 단 사람은 지금까지도 없다.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인간은 ‘인간다워지’기 위해서 타인과의 관계를 필요로 한다는
역설에 모두가 동감하기 때문이다. 이 공감대는 곧 모든 인간이 소중하다는 인류애의 차원으로 이어진다. 인간이 인간성을 귀중하게 여기는 건 옳은 일이다. 그러므로 타인을
차별하지 않으려 애를 쓰는 현대 사회의 움직임 자체에는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우리의 내면에서 상충하는 ‘차별하려는
본성’과 ‘차별하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두 요소는 지금껏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끊임없이 부딪쳐
왔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기 전에 개인적인 동물이므로 당연한 현상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차별을 떼어낼 수 없는 인간성의 일부로 인정한 다음 그걸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인 방식으로 전환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인류 역사 전체를 놓고 보면 차별은 언제나 어떤 형태로든 존재해 왔다. 나는 그런 부조리를 묵인하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차별을 차별하는” 행위를 그만두자는 말이다.
차이점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바꾸면 세상에서 절대적인 약자는 사라진다. 대신 그 자리에 도움이 필요한 인간이 보일 뿐이다. 그러고 나면
인간은 겸손한 태도로 휴머니즘에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다. 그렇지 않은가.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고 또 도움을 받기를 원한다. 나는
이런 마음을 인간성이라고 믿는다. 한 인간의 특징에 높낮이를 두지 않고 수평적으로 바라보는 자세, 그리고 각자 나란히 뻗은 수평선에서 빈 틈을 발견해 서로를 채워주는 것. 나는
그것을 인간성이 능히 이뤄낼 수 있는 우리의 성숙한 미래 모습이라고, 우리 모두는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을
이겨내고 더 아름다운 미래로 나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