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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 주식 단 한 주도 안 가진 포스코 창립자 박태준
등록일 : 2020-11-06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41
청암 박태준은 포항종합제철(현 포스코)의 창립자로 한국 경제 도약을 이끈 산업화 1세대의 대표주자다. 청암은 6·25전쟁 중에는 전선을 지킨 참전용사로, 환란(換亂)의 비상시국을 맞아서는 국무총리로 국가에 헌신했다. ‘짧은 인생을 영원한 조국에 바친다’는 자신의 염원대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아우르는 일생을 살았다. 세계가 인정하는 리더로 살아온 청암에게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은 1990년 11월 서울로 특사를 보내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코망되르를 수여했다. 당시 미테랑 대통령은 이런 치사를 했다.
   
   “한국이 군대를 필요로 할 때 당신은 장교로 투신했습니다. 한국이 기업을 찾을 땐 기업인이 되었습니다. 한국이 미래의 비전을 필요로 할 때 당신은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의 치사
   
   중국의 개방경제를 주도한 덩샤오핑이 신일본제철을 방문하였을 때 이나야마 요시히로 회장에게 “중국에 한국의 포철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요청하자 이나야마 회장이 난색을 표하면서 건넨 말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제철소는 돈으로 짓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짓는데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느냐고, 박태준 같은 인물이 없으면 포철 같은 제철소는 지을 수 없다고 명백히 말해 줬습니다. ‘포철은 기적’이라는 말과 함께요.”(‘세계 최고의 철강인 박태준’·이대환·현암사 간)
   
   청암이 모든 걸 바쳐 일궈낸 포철은 1973년 6월 용광로에서 처음 쇳물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후 청암의 탁월한 솔선수범 경영으로 가동 1년 만에 매출액 1억달러를 기록하며 흑자를 이룩하는 기적을 뽐냈다. 이후 건설과 조업을 병행하며 성장가도를 질주한 포철은 마침내 1992년 광양제철소 4기 설비를 종합 준공함으로써 2100만t을 생산하는 세계 최대 제철소로 우뚝 섰다.
   
   청암의 생애를 빛낸 단어는 청빈이다. 청암이라는 아호처럼 그는 정치인으로나 경제인으로 권력욕이나 물욕을 멀리한 선비의 삶을 살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후 자손들에게 유산을 한 푼도 남기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기도 한다. 이와 관련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는 ‘박태준 사상, 미래를 열다’라는 저서에서 “고 박태준 명예회장은 의지와 옳음, 청렴뿐 아니라 애정까지 갖고 있는 ‘현장의 선비’였다”고 평한 바 있다.
   
   청암은 1927년 9월 29일(음력) 경남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인랑리에서 박봉관과 김소순 사이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한학을 공부한 부친은 ‘장차 크게 잘되라’는 뜻으로 ‘태준’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청암은 1933년 백부의 권유와 일본에서 일자리를 얻은 부친의 부름으로 모친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다. 청암 일가는 처음에 아타미에 정착했지만 1936년 부친이 지쿠마가와(千曲川) 수력발전소로 직장을 옮기면서 나가노현 이야마로 이사한다.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식민지 아이’라는 태생적 한계를 실감한 청암은 공부든 운동이든 모든 걸 잘해서 일본인 학생들을 이겨야 한다는 다짐을 자주 했다. 아타미 시절 수영을 익힌 청암은 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스키(할강·점프)대회에 참가하는 등 심신 단련에 힘을 쏟았다.
   
   1940년 청암은 명문인 도쿄 아자브중학에 합격하지만 가족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부친의 뜻에 따라 이야마 북중학에 입학한다. 중학교 때 그는 교내 수영대회에 1학년 대표선수로 출전하여 2학년 대표선수와 경합을 벌여 이기지만 일본인 심판의 고의적인 편파 판정으로 우승을 빼앗기는 쓰라린 경험도 겪는다. 1944년 청암은 일본 육사 입교 권유를 거부하고 와세다대 공대로 진학을 결심했는데 이즈음 소결로공장에 노력봉사대원으로 배치받아 제철과 인연을 맺게 됐다. 소결이란 인공철광석을 의미한다.
   
   이 무렵 일제는 학병제를 실시했다. 인문계 대학생은 모두 징집되고 이공계는 면제됐지만 조선인 학생은 여기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징집의 위기에서 청암은 일본 정착 시절부터 부친과 친하게 지낸 소메야 사장이 위장(僞裝) 양자 입양을 허용해 결국 이듬해 와세다대 공대에 입학했다. 하루 4시간씩 자면서 열심히 공부한 결과였다.
   
   
▲ 1 1997년 12월 31일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가운데), 김종필 총재(왼쪽)와의 오찬. photo 국가기록원
2 1992년 10월 3일 박정희 묘소에서 “각하의 명을 받아 25년 만에 제철입국의 업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했다”며 보고하는 모습.
3 1977년 포철을 방문한 이병철 회장(왼쪽)과 함께.
4 6·25전쟁 당시 박태준 중령(왼쪽).

   학병에서 가까스로 면제되다
   
   청암은 8·15 광복 이후에도 일본에서 학업을 이어가려 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자 와세다대 기계공학과 2년을 마치고 중퇴한다. 이후 고국으로 돌아와 취업이 안 돼 칩거하다시피 지내다가 국방경비대가 창설되자 군인의 길을 선택한다. 1948년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6기생으로 입학해 고된 훈련을 받으면서 전술학, 지형학, 독도법, 화기훈련, 총검술, 행군과 수영, 국사와 영어를 포함한 교양과목 등을 공부했다. 이 시기 제2중대장으로 탄도학을 강의하던 박정희 대위와 만나는데 박 대위는 수학 실력이 탁월한 청암을 눈여겨봤다고 한다. 단기과정 수료 후 청암은 육군 소위로 임관되어 육군 제1여단 제1연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1950년 6·25전쟁 때 청암은 포천 1연대의 중대장으로 참전했다. 서울 미아리 서라벌중학 부근에서 중대장 10명 중 그를 포함 단 2명만 살아남는 격전을 치르면서 부대원들과 전선을 지켰다. 소련제 탱크의 소음을 들으면서 ‘최후의 순간’을 각오하기도 했으나 육군본부로부터 ‘한강 이남으로 집결하라’는 전문을 받고 후퇴했다.
   
   전쟁이 끝난 뒤 청암은 육군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육사 교무처장으로 부임했다. 이 무렵 친척 소개로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세 살 아래 장옥자씨를 만나 결혼했다. 그녀가 신혼 휴가 뒤 남편에게 첫 선물로 건넨 것이 자기 은사 최호준 교수의 ‘경제학 원론’이었다. 청암이 인생에서 ‘경제’와 처음 인연을 맺은 순간이었다.
   
   
   거사 전 박정희가 가족을 부탁하다
   
   1960년 부산군수기지사령관으로 발령받은 박정희가 청암을 참모장으로 발탁하면서 두 사람의 인연은 다시 이어진다. 이듬해 5·16군사정변 직후 박정희는 그를 찾아온 청암에게 “우리 계획이 실패하면 우리 군과 내 가족을 부탁하려고 했었네”라고 실토했다는 건 잘 알려진 얘기다.
   
   혁명 후 청암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재정경제위 상공담당 최고위원에 취임하며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참여해 무연탄 개발을 통한 국토녹화사업을 적극 진행한다. 1963년 민정 이양을 앞두고 청암은 박정희의 정치참여 권유를 사양하고 미국 유학을 준비하면서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다. 그러나 박정희의 강력한 요청으로 미국 유학을 포기하고 한·일 국교 재개 임무를 맡는다. 일본으로부터 자본을 유입하기 위한 정지작업으로 일본특사를 맡았다.
   
   당시 박정희는 경제 발전을 위해 차관 도입과 함께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로 대일청구권을 행사할 생각이었다. 이보다 앞서 일본 정부는 국교 정상화를 위한 비공식적 대화 채널을 트자는 뜻을 통보해오면서 박 대통령의 의사를 통역자 없이 충분히 전달해줄 수 있는 사람을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박 대통령은 그런 인물로 박태준을 지목하고 대통령특사로 파견한 것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청암은 일본 전역을 10개월간 순방하면서 야스오카 마사히로(安岡正篤) 등 정치권 막후 실세들과 두루 만났다. 특히 야스오카는 여러 권의 명저를 낸 일본의 저명한 양명학자로 당대 일본 지성을 대표하는 학자들의 정신적 지주 격이었다. 그의 철학과 사고는 일본 내에서 명성이 높았다. 야스오카를 만난 청암은 자신이 특사로 맡은 임무를 설명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인사말을 전했다. 야스오카는 그 자리에서 청암이 면담하려는 인사들을 만나도록 적극 주선했다. 다음은 야스오카의 제자인 야기 노부오(일제 말 전라도지사를 지낸 지한파 일본인)가 그 무렵 청암에 대해 한 인상평이다.
   
   “저희 선생님께서 박 장군님을 보고 흡사 거대한 무쇠 덩어리가 앞에 앉아 있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과 서른예닐곱밖에 안 되었는데, 과연 오모노(大物)’라고 박 장군님을 칭찬하셨습니다.”(‘한국자본주의의 개척자들’·월간조선 간)
   
   
▲ 모래벌판을 일구며 공장을 건설하는 박태준 사장.

   만정적자 대한중석을 흑자로
   
   1964년 청암은 당시 가장 중요한 국영기업체로 꼽혀온 대한중석 사장 자리에 올라 만성적자 회사를 1년 만에 흑자로 전환시키는 신통력을 발휘한다. 당시 청암은 집에다 군인 시절의 좌우명인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라는 표어를 걸어놓고 대한중석의 정상화를 다짐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현장 경영을 중시한 청암의 일화가 있다. 청암은 사장에 부임하자마자 상동광산 현장을 직접 방문해 사택 개울가에서 빨래하고 있는 광부 부인들에게 애로사항을 캐물었다. 그러자 나이 지긋한 부인이 “사택에 빈대약 좀 쳐주세요”라고 부탁했다. 빈대 때문에 직원들이 밤잠을 설친다면 회사 일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청암은 즉각 소독을 지시하고 아예 사택을 재건축하도록 조치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중석 사장직을 맡겨 경영능력을 시험해본 후 청암에게 종합제철을 맡기겠다는 생각을 이미 하고 있었다. “해외 출장 갈 기회가 있으면 선진 제철소를 유심히 살펴보라”고 청암에게 특별 당부까지 했다. 1965년 6월 청암으로부터 일본 철강업계에 대한 보고를 받은 후 박 대통령은 “나는 고속도로를 직접 감독할 테니 자네는 제철소를 맡아. 고속도로가 되고 제철소가 되면 공업국가의 꿈은 실현되는 거야. 자네의 능력과 뚝심을 믿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청암은 포항제철 건립에 착수하나 1억달러에 이르는 자금 염출이 문제였다. 1969년 1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세계 5개국 8개 회사 연합체(KISA)와 IBRD(국제부흥개발은행)에 자금지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청암은 귀국길에 하와이에 잠시 들러 낙담한 채 해변을 걷다가 대일청구권 자금을 떼내 제철소를 지으려는 ‘하와이 구상’을 하게 된다. 국제전화로 박 대통령에게 이 구상을 알리고 도쿄로 직행하여 일본의 정·재계 인사들을 만나 자금지원 협상을 벌이기 시작한다. 청암은 일본정부간행물보관소까지 뒤져 설득 논리를 제시하여 일본 통상상 오히라를 감복하게 했다.
   
   포항제철을 어떤 형태의 회사로 만들 것인가에 대해서도 청암은 야무진 비전을 담는다. ‘특별법에 의한 국영기업체’로 하자는 박 대통령의 주장에 맞서 청암은 ‘상법상 주식회사’로 하자고 했다. 대한중석을 경영하는 과정에서 관료주의와 정부의 간섭이 국영기업체에 끼치는 폐해를 절감하면서 포항제철이 민간기업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세 차례에 이르는 긴 토론 끝에 줄담배를 태우던 박 대통령이 마침내 말했다.
   
   “임자한테 졌어. 좋은 방법을 강구해봐.”
   
   
▲ 모친 김소순 여사(가운데), 부인 장옥자 여사(왼쪽)와 박태준 회장.

   박정희가 건네준 포스코 보호막 ‘종이마패’
   
   박 대통령은 이후 청암에게 전권을 준다는 의미로 자신의 서명이 들어간 서류, 이른바 ‘종이마패’를 주어 정치권으로부터 포철을 지키는 보호막이 되게 했다. 청암 스스로 ‘소유와 경영’에 대한 신념을 철저히 지켜 포스코 회장 재임 중은 물론 퇴임 뒤에도 포스코 주식을 단 한 주도 보유하지 않았다.
   
   1969년 청암은 박 대통령으로부터 3선 개헌 지지서명에 동참할 것을 요구받았지만 거부한다. 당시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은밀히 포항으로 사람을 보내자 “제철소 하나만으로 바빠. 정치에는 끼지 않겠어”라는 말로 동참 권유를 잘랐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박 대통령도 “그 친구 원래 그런 친구야” 하고 받아넘겼다.
   
   청암은 박정희뿐 아니라 이병철의 제안도 거절한 바 있다. 1980년대 초기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은 청암을 자주 불러 삼성그룹 경영에 대한 의견을 묻곤 했는데 어느날 무한 신뢰하는 후배에게 ‘삼성중공업을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했다. 존경하는 경영계의 선배이자 와세다대학 선배이긴 하지만 청암은 이 제안 역시 단칼에 잘랐다. “너무 과분한 선물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아직 저는 제 일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국가의 일을 맡아 중도에 그만둘 수야 없지 않습니까?”
   
   1971년 4월에 착공한 포철은 공장 건립 과정에서도 난관이 적지 않았다. 건립 일정에 차질이 빚어지자 그해 8월 일본 미쓰비시의 설비담당자는 청암에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기일 내에 공사를 마칠 수 없다”면서 설비 발주를 늦추자고 제안했다. 이에 맞서 청암은 근로자들을 모아놓고 이같이 말했다.
   
   “이 제철소는 식민 지배에 대한 보상으로 받은 조상의 핏값으로 짓는 것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해야 합니다. 실패하면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청암은 1980년 신군부 세력이 만든 국가보위입법회의 위원을 거쳐 이듬해 민정당 비례대표 의원으로 정치에 참여하는데 이는 자기가 일군 포항제철을 보호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하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의 3당 합당으로 민자당을 함께하게 된 김영삼 대표의 대선 지원을 거부해 김영삼 대통령 시절 세무조사를 당하고 외국을 떠도는 신세가 된다. 이 무렵의 청암에 대해 아들 성빈씨는 이렇게 말했다.
   
   
▲ 박태준 포스코 회장의 1남4녀 중 막내인 박성빈 대표.

   외국 떠돌 당시 아들과 보낸 시간
   
   “제가 1남4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 이듬해 포스코가 생겨났지요. 어려서부터 늘 바쁘게 나다니셔서 (아버지를) 자주 뵙지도 못했지요. 저에게 늘 하신 말씀이 포철은 국가 자산이니 아예 넘볼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마치고 일본 미쓰비시상사에 취직하여 13평 아파트에 정착하던 때 정치낭인이 되신 부친께서 오셨습니다. 불운한 가운데도 저는 그동안 제대로 모실 수 없었던 한을 풀 수 있어 오히려 즐거웠지요. ‘13평 둥지’ 생활을 만끽한 셈이지요. (아버지의) 일본 친구들이 베푸는 여러 배려 중에는 그분들이 퇴직금을 털어 매월 100만엔씩의 생계비를 마련해주신 것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후 청암은 1997년 김대중 국민회의 대선후보의 지원요청을 수락하고 김종필과 함께 DJP 공동 정권 만들기에 참여하여 산업화+민주화 세력의 통합 비전을 제시한다. 그리고 정권 출범과 함께 2000년 1월 국무총리에 취임한다. 당시 청암은 김대중 후보에게 ‘당신은 거짓말쟁이 아닌가’ ‘당신의 색깔은 진짜 어떤 색깔인가’ ‘당신이 집권하면 호남 사람들이 통·반장까지 다 해먹을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 등 다섯 가지 항목의 질의응답을 하면서 일종의 ‘면접시험’을 봤다고 한다.(2011년 12월 14일 자 중앙일보 보도)
   
   이후 청암은 2011년 12월 13일 서울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서 급성 폐손상으로 인한 호흡부전으로 세상을 떴다. 그는 서울 국립현충원 국가사회유공자묘역에 안장됐다.
   
   청암은 장옥자씨와 사이에 1남4녀를 두었다. 아들 성빈(55·매사추세츠공대, 스탠퍼드대 경영대학원 졸업)씨는 트랜스링크캐피털 대표이다. 맏딸 진아(64·이화여대 시청각교육과 졸업)씨는 MC파빌리온 대표인 윤영각(64·시카고대 경영대학원 졸업)씨와 결혼하였으며, 차녀 유아(60·이화여대 동양미술과 졸업)씨는 화가이다. 3녀 근아(58·이화여대 건강교육과 졸업)씨는 둘디자인 대표이며, 4녀 경아(56·이화여대 생활미술과 졸업)씨는 MBK파트너스 대표인 김병주(58·하버드대 경영대학원 졸업)씨와 결혼했다.
   

   내가 본 청암 박태준
   첫 쇳물이 나올 때 그의 눈에선 눈물이…
   

이대공 애린복지재단이사장·전 포스코 부사장

1973년 6월 9일 새벽 5시 포항제철 용광로에서 첫 쇳물이 나오던 그때 박태준 회장님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 쇳물이 나오자 만세를 부르는 회장님의 얼굴에는 눈물이 반짝거렸다.
   
   나는 회장님의 유명한 안광을 잊을 수 없다. 눈이 부리부리했던 그분은 화를 낼 때면 눈빛이 워낙 강렬했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그분의 안광을 제대로 맞으면 정력이 약해진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포항제철 공보과장이었던 나는 1975년 사보 ‘쇳물’에 그해 10대 ‘어글리 뉴스’ 중 하나로 “직원 부인들도 목욕을 깨끗이 하라”고 했던 회장님의 목욕론 논란을 실었다. 직원들 사이에서는 ‘가정생활까지 간섭한다’는 불만이 나오고 있다는 보고도 덧붙였다.
   
   사보를 본 회장님이 나를 불러 안광을 쏘기에 이제 잘렸구나 했으나 “홍보과장이 내 경영철학을 모르면 되느냐”면서 그 이후 모든 간부회의에 참석하라는 특혜성(?) 특명까지 받았다. 회장님의 신임을 받는 전화위복 계기가 되어 오히려 회장님을 밀착하면서 평생을 모시게 되었다. 그리고 회장님의 ‘목욕론’도 알게 됐다. 자기 몸을 깨끗이 하듯이 품질도 완벽하게 하라는 뜻이었는데 이후 이를 알리는 전도사 역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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