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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에세이, 미래전략연구를 통한 다양한 연구결과물

연구결과물

연구도서
[2016 청년 에세이 우수상] ‘나’의 행복을 넘어 ‘우리’의 행복으로
  • 저자
  • 김형근 (연세대학교 철학과)
  • 발행일
  • 2016.07.20
요 약

본 에세이는 행복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에서 시작하여 자기 자신으로, 나아가 ‘우리’로 살아가는 한 나의 참된 행복과 행복한 사회가 동시에 가능할 수 있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는 왜 행복을 협소하고 고립된 행복으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나 자신’을 추구하기보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이러한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한낱 물질적 욕망이나 성공에 대한 욕구를 행복과 동일시하는 오늘날의 우리 모습을 반성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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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들어감
2. 행복을 넘어서 ‘나 자신’으로
3. ‘나의 행복’에서 ‘우리의 행복’으로
4. ‘우리의 행복’을 위한 과제
5. 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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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용
[2016 청년 에세이 우수상] ‘나’의 행복을 넘어 ‘우리’의 행복으로
김형근 (연세대학교 철학과)

 

들어감

 

나는 행복한가?”라는 물음은 우리가 살며 끊임없이 제기하고 제기할 수밖에 없는 물음이다. 아울러 이 물음은 오늘날에 이르러 특별히 제기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 이래 줄곧 물어져왔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행복과 관련한 대답은 다양하게 이루어져왔는데,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은 행복을 묻기에 앞서 덕에 대해 먼저 논의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덕이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도덕이 아니라 arete, 즉 탁월함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행복에 대해서 생각할 때, 행복 그 자체를 추구하기보다도 이에 앞서 탁월한 삶에 대해서 성찰하였으며, 그들에게 탁월한 삶이란 타고난 자신의 성향을 사회 속에서 잘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즉 고대 그리스에서 행복은 바로 그렇게 자기 자신을 탁월하게 사회 속에서 실현시켰을 때 주어지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행복은 자신을 실현해나가는 삶 속에 주어지는 것이지 그 자체로 삶의 목적이나 추구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행복 그 자체를 목적으로 두지 않았을까? 그것이 2500년 전 그리스 문명에 우리가 궁금증을 갖는 부분이다. 그리고 생각하면 그 까닭은 오늘날 우리가 쾌락과 안정으로 대변되는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숭배하는 것과 달리, 고대 그리스에서 참된 행복이란 자신의 탁월함을 공동체 속에서 실현해내는 것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탁월함을 실현하고자 했던 그리스인들은 만의 고립된 행복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이 보여주듯 의 삶이 와 더불어 있음을 자각하고 서로 함께 행복하고자 했다. 그 점에서 그들의 행복은 홀로있지 않았고 서로있었다. 생각하면 이 얼마나 당연한 말인가? 내가 공동체를 무시하고 나만의 행복을 추구할 때, 그 공동체의 윤리는 붕괴되고 결국 서로에 대한 공포와 시기, 불안으로 모두가 불행해질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행복에 대한 물음은 너무도 협소하고 고립된 물음이 되어버렸다. 또 그 물음은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나 자기실현에 대한 물음과는 무관한 물음이 되어버렸다. 즉 오늘날 행복한가?”라는 물음은 단지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여유롭게 사는 삶과 뗄 수 없는 물음이 된 것이다. 그리고 설사 그런 안정적인 조건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이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 자신과 삶의 탁월함에 대한 물음은 제쳐두고 그저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 있다. 다시 말해 행복에 대한 물음이 협소해졌다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행복을 가치가 아닌 물질에 한정시켜 버렸다는 점을 가리킨다. 이뿐 아니라 즈음 우리에게 행복은 우리의 행복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묻는 말과 같은 말로 쓰인다. 생각하면 치열한 경쟁시스템을 동반한 교육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를 더불어 살아가는 대상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이요 기껏해야 필요의 대상으로 치부해온 우리에게 행복 또한 나의 행복으로 여겨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물론 우리는 그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제한적이나마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혹은 다양한 집단 속에서 우리의 행복에 대해서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처럼 서로를 짓밟음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사회 속에서 작은 집단 속의 우리의 행복에 대한 고민은 그와 경쟁하는 또 다른 집단의 불행을 고민하는 것과도 같다. 그런 까닭에 이러한 제한적인 울타리 내에서 우리를 생각함 역시 참된 의미에서 더불어 사는 삶이라 볼 수 없고 그런 한 고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루소의 말처럼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에 대한 복종을 의무로 바꾸지 않는 한, 영원히 주인일 수 있을 만큼 강한 것은 없으니, 다른 집단 혹은 사람을 배제하고 고립된 행복을 묻는 것은 실은 불가능한 물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 행복을 어떻게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며 이를 토대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2500년 전의 그리스인들과 달리 우리는 왜 행복을 협소하고 고립된 행복으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나 자신을 추구하기보다 나의 행복만을 추구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이러한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한낱 물질적 욕망이나 성공에 대한 욕구를 행복과 동일시하는 오늘날의 우리 모습을 반성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성찰을 통해 모두가 행복할 수 없는 사회 속에서 나의 행복을 위해 너의 행복을 배제해왔던 우리는 조금씩 나와 너의 행복을 위해 고민하기 시작할 것이다.

 


2. 행복을 넘어서 나 자신으로

 

오늘날 행복은 너나할 것 없이 우리 모두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물론 행복이 우리 삶과 사회의 목표임은 애써 언급할 필요 없는 자명한 명제일 수도 있겠으나, ‘모든 인생은 고통임을 통찰한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어쩌면 행복하기만을 원하는 우리의 태도야말로 삶의 결핍과 불행을 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필자가 모든 것을 비우자는 부처의 가르침이나, ‘맹목적인 의지를 완전히 버리라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 교훈을 따르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날 행복을 단지 물질적 안락이나 쾌락, 혹은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김으로써 얻어지는 성공과 동일시 여기는 우리에게 있어서 고통을 배제하는 협소한 행복은 결국 망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임을 우리는 드러내려 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좁고 고립된 행복이 아닌 보다 높은 가치를 포함한 행복, 즉 우리가 삶에서 겪는 갖은 고통과 불행까지 포괄할 수 있는 행복을 넘어선 가치에 대해 생각하고자 한다. 그렇게 우리 삶에서 필연적으로 겪는 불행까지 그 자체로서 긍정할 수 있게 되는 보다 높은 가치의 중요성에 대해 고찰해보려 한다. 그것을 우리는 행복을 넘어선 행복이라 말해 볼 수 있겠다. 또한 니체가 자주 논리성만을 추구하는 이성을 비판하며 신체의 감각과 의지를 포함한 이성을 큰 이성(die große Vernunft)’이라고 표현했듯이, 우리는 불행을 포함한 행복을 하나의 큰 행복(die große Glücklichkeit)’이라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좌우간 그것을 어떻게 부르든 우리에게 중요한 물음은 그저 체념하는 방식이 아니라 삶의 고통을 그 자체로서 긍정한다는 것의 가능 여부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태도가 삶의 고통을 무작정 긍정하자는 무책임한 태도는 아닌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물어야 할 것이다.

 

두 물음에 대해 대답하자면, 첫 번째로 행복보다 중요한 삶의 가치가 있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필자는 그렇다!”라고 힘주어 외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되묻는 다면 필자는 다시 세찬 목소리로 그것은 삶이요 자기 자신이다.”라 대답할 것이다. 그 까닭은 결국 나의 없이는 행복도 없을 것이며 자기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서는 또 어떤 물질적 안락으로도 우리는 결코 온전히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까지도)을 긍정하라고 외쳤던 철학자 니체는 우리에게 문제는 오직 삶이고 모든 예술 형식은 삶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삶이란 살며 마주치는 모든 것들을 자신 만의 불꽃으로 만드는 것이라 말했다. 결국 우리에게 근본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문제가 인 까닭에 행복보다 중요한 삶의 가치는 삶 그 자체요, 참된 삶이야말로 행복한 삶보다 우선하는 가치이다. 그렇다면 삶이란 무엇이며 참된 삶이란 또 무언가? 이 단언할 수 없는 물음에 대해 필자는 단지 삶이란 자기 삶이요 그런 까닭에 참된 삶이란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삶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니체의 삶에 대한 정의는 우리에게 참된 삶이 무엇인지 정확히 지적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 나아가는 참된 삶을 우리가 살아가는 한, 그 속에서의 고통과 불행, 슬픔을 우리는 긍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 자신으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 겪는 고통은 내가 감수하는 고통이요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하나의 자발적 고통’, 헤겔의 말로는 긍정을 예비한 부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헤겔은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삶이야말로 나 자신의 주인이 되는 삶이요 그런 한 그는 자유롭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통찰에 우리가 동의한다면, 진정으로 자기 자신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행복과 고통을 긍정하는 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요 또 자유로운 사람이다.

따라서 필자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고통을 마냥 긍정하자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이는 앞서 제기한 물음 중 두 번째 물음, 즉 모든 삶의 고통을 그저 받아들이자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삶은 고통의 연속이니 우리는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지금도 자기의 삶을 짓누르는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또 하나의 폭력으로 여겨질 뿐이다. 애써 가슴 아픈 사례를 들 필요 없이 지금도 짓누르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 대부분이 아마 저 무책임한 말을 접한다면 분명 분노할 것임은 자명하다.

 

한편 농부 철학자 윤구병은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 주장하며 우리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있을 것이 무엇이고, 없을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 있으면 얼마나 있고, 없으면 얼마나 없느냐를 꼼꼼히 살피지 않는 데에 우리 사회의 병폐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성찰에 우리가 지금껏 놓쳐왔던 점이 숨겨져 있다. 즉 우리는 나의 행복에 고립되어 우리가 함께 겪는 고통을 세세하게 성찰하고 어떤 아픔이 우리에게 없을 것이고 어떤 아픔은 우리가 감수할 아픔인지 온전히 걸러내지 못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여전히 마땅히 없을 것으로서의 고통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와중에 우리는 나와 너의 행복보다도 나의 행복만 찾게 되며 스스로 독방 속으로 기어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것도 참된 행복이 아니라 없어야할고통에 대한 반동으로 추구되는 물질적 안락함을 위해서 말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까닭이며, 그런 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 속에서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첫째로 오늘날의 협소하고 또 고립된 행복을 넘어서 자기 자신이라는 가치를 찾아나서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으로 살아가는 한, 우리는 삶에서 주어지는 행복과 고통 모두 긍정할 수 있으며 또 다가오는 불행 속에 침잠하지 않고 나 자신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새로운 보다 높은 이다. 그러므로 뜻 없는 고통, 그저 우리를 짓누르며 우리로 하여금 고립된 자기가 되어 와의 경쟁을 강요하는 데서 오는 압박과 불행은 우리에게 없을 것이요 우리 사회에서 걷어 내야할 것들이다.



3. ‘나의 행복에서 우리의 행복으로.

 

여기서 혹자는 우리에게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삶이야말로 고립된 삶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점에서 를 넘어선 의 행복에 대한 고민에 있어서는 자신이 속한 가족 혹은 집단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느냐고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해서는 다행히도 우리의 철학자 김상봉의 는 오직 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가 될 수 있다는 대답으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니, 우리는 그가 밝힌 바를 되새기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는 자유는 자기형성에 존립합니다. 하지만 자기가 과연 무엇입니까? 나는 오직 너와의 만남 속에서 더불어 우리가 됨으로써만 내가 됩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오직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 세상에 오고 그 만남 속에서 내가 됩니다. 그런즉 나를 형성한다는 것은 우리를 형성한다는 것, 곧 너와 나의 만남을 형성한다는 것과 정확하게 같은 말입니다.”이라 말하며, ‘로 사는 삶이 결코 와의 만남을 배제할 수 없음을 밝혀 놓았다. 그리고 를 이루는 와의 만남에서 는 단지 나의 가족이나 소속 집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만남으로 나를 새로운 나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의미에서 자기 자신으로 나아가는 삶을 위해서, 우리는 모든 와의 만남에 대한 가능성을 확보해야 한다.

 

한편 자기로 산다는 건 하나의 주체가 된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주체의 본질은 활동성에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주체로 정립하는 활동을 통해 주체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때 객체로 전락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만의 일일 수 없다. 오직 와의 만남을 통해 는 참된 의미에서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체성의 서로형성에 대해서 김상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냐하면 주체는 오직 타자의 부름에 응답함으로써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부르는 이름에 대답하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의식하는 주체로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가 될 때 비로소 그는 자기를 자기로서, 다시 말해 로서 의식할 수도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부르는 자와 대답하는 자는 부름과 응답 속에서 너와 내가 되고 또 우리가 됩니다. 주체성이란 그런 부름과 응답이 교차하는 만남 속에서 생성되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라는 인격성입니다. 그 속에서 주체는 부름받는 이면서 응답하는 이며 부름과 응답 속에서 생성되는 우리인 것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함으로써만 참된 의미에서 가 된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기억해보면 지금의 가 있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수많은 들과 만나왔는가?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각자의 삶 속에서 와의 만남에 응답하고 있으며 또 대답하려 하고 있다.

 

이처럼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삶이 결코 를 배제한 채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 속의 무수한 들과의 만남을 지속해나가는 삶인 한, 우리의 큰 행복또한 와의 만남에 있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만남으로 진정한 가 되고, 자기로 살아갈 수 있으니 김상봉의 지적처럼 만남은 자유이며 자유는 그 본질에서 사회적이다. 그런 까닭에 나의 자유는 너와의 만남이 온전해지는 만큼 확장될 수 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사회 속에서 와 온전히 만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 까닭에 의 행복은 결코 의 행복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국가에서 사는 국민들의 삶의 행복지수가 OECD 34개국 중 최하위이며 자살률은 1위인 까닭은 바로 우리가 각자의 고립된 섬에서 행복을 찾으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한 한국사회를 위해서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 등 다양한 차원 속에서 각각의 구체적인 사안들을 고찰해야겠으나, 무엇보다도 의 행복이 의 행복과 무관치 않다는 우리 사회의 진지한 성찰이 없는 채로는 우리 사회는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없다.

    

 

4. ‘우리의 행복을 위한 과제


이제 우리는 나의 행복너의 불행이 아니라 너의 행복과 하나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를 이어주는 매개는 다름 아닌 만남인 바, 우리의 큰 행복은 서로간의 만남의 온전한 만큼만 온전해질 수 있다. 까닭에 우리가 생각해야할 바는 의 만남을 저해하는 바를 하나씩 고민해내고 성찰하여 그것을 우리 사회에서 걷어내는 데 있다.

대표적으로 우리 사회의 경쟁주의는 서로를 만남의 대상이 아니라 대립적 대상으로 고착시키는 원인 중의 하나이다. 교육현장에서부터 서로를 짓밟고 승자와 패자가 나눠지는 섬뜩한 현실을 아이들에게 체화시키는 우리 사회에서 경쟁주의가 도달하지 않은 곳은 찾기 어려워 보인다.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수반하는 치열한 경쟁주의로 우리는 만남은커녕 나·남으로 분열되고 더욱 고립되어 왔다. 나아가 열악한 노동환경을 방치하는 것은 이미 폐허가 된 만남의 도시에 재차 포격하는 바와 같다. 자본과 상품의 자유로운 흐름으로 시장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는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본질적 삶의 활동인 노동마저 상품으로 전락시켰다. 상품이 된 노동자들은 남보다 잘 팔리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착취해야 하는 끊임없는 경쟁 속으로 내몰렸다. 시장의 자유로운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한 노동자들은 불안정한 삶을 강요당해야 했다. 까닭에 신자유주의 확산 아래 이 땅의 국민들은 오늘날 정규직으로 살아남기 위해 와 치열하게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경쟁에서 도태된 자들은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해 자유를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내 가족, 이웃 간에도 나는 너이며 너도 나가 되는 만남의 지평을 열어젖히지 못하는 지금, 국가적 차원에서 만남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저 공허하기만 해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하나의 노동하는 인간인 한, 우리네 노동환경을 개선하지 않고서는 고립된 자기로부터 벗어나 너를 만나 자기를 형성함으로써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이뿐 아니라 우리의 정치는 또 어떤가? 실은 정치야말로 만남이다. 정치가 우리의 공동체를 이끄는 지평임을 감안한다면, ‘가 만나 우리가 되는 만남이 가장 활발해야할 곳이 정치 영역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는 만남이 아니라 분열과 대립이 가장 활발히 이루어지는 곳이다. 진보와 보수, 지역과 지역 간의 해묵은 대립은 물론이고 뜻이 아닌 오직 자신의 당선만을 고려하며 정치적 행보를 이어나가는 모습이 오랫동안 우리가 지금껏 보아온 정치 풍경이다. 정치란 그 나라의 거울과도 같다. 그러므로 우리네 정치는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국민을 위한다는 큰 뜻 아래서 만나야만 한다. 오직 그런 한, 우리 사회도 서로 간의 다름을 인정하며 각자의 모습으로 만남을 이루어 나갈 것이다.

 

경제와 정치가 아닌 보다 넓은 사회적 지평에서 보자면, 인권은 우리가 서로 만나기 위해 닦아야할 초석이다. 생각건대 삶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것이며, 그렇게 더불어 사는 삶이란 가 자유롭고 동등한 인격체로 서로 만남을 형성하는 것이다. 나아가 인권이란 우리가 사회 속에서 만나기에 앞서서 ’, 그리고 로 서있기 위한 하나의 땅과도 같다. “따라서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 는 온전한 의미에서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만남은 두 주체를 전제로 하기에 하나의 주체도 되지 못한 우리는 결코 더불어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까닭에 우리는 삶다운 삶을 형성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서로의 인간다움의 권리를 살펴야 하며, 세계인권선언문과 그 밖의 국내법, 국제법에 제시된 인간으로서 지녀야할 천부인권에 기초하여 그것이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온전히 지켜지고 있는지 끊임없이 살펴야할 것이다. 그러한 인권의 기초 위에서 우리는 서로 간에 만남을 형성할 수 있으며, 그런 한 자기 자신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삶 위에서 우리는 없을 것으로서의 고통과 뜻 있는고통을 분별하고 전자의 고통은 배제하면서도 후자의 고통에 대해서는 긍정할 수 있다. 그러한 삶들이 모여서만이 비로소 행복한 한국사회는 온전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행복은 우리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5. 나감

 

이로써 우리는 행복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에서 시작하여 자기 자신으로, 나아가 우리로 살아가는 한 나의 참된 행복과 행복한 사회가 동시에 가능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아울러 우리에게 행복에 대해 반성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그리스인들의 탁월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탁월성은 올바른 이성과 결부되지 않을 수 없는 개념이었다. 소크라테스는 탁월성을 이성(logos)이라 생각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성은 올바른 이성을 동반한(meta) 품성상태로 보았다. 소크라테스는 탁월성 그 자체가 하나의 이성이라 본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성이 이성을 동반한다고 보았다. 두 주장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두 철학자의 공통된 의견은 탁월성이 이성, 생각함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통찰은 오늘날 삶과 사회의 탁월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부족한 우리에게 우리에 대해 진지하게 반성할 것을 제안한다. 오직 그러한 지속적인 성찰을 통해서만 우리 사회의 행복이라는 씨앗은 씨앗이길 그치고 비로소 하나의 새싹으로 움트기 시작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상봉, 철학의 헌정, 한길사, 2015.

김상봉, 서로주체성의 이념, 도서출판 길, 2007.

김형근,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 노동자 인권과 노동자 경영참여에의 길, 인권법평론16, 2016.

윤구병, 철학을 다시 쓴다, 보리출판사, 2013.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정성환 옮김, 홍신문화사, 2007.

HPI(Happy Planet Index), <http://www.happyplanetindex.org/data>, 검색일: 2016.05.13.

 

들어감

 

나는 행복한가?”라는 물음은 우리가 살며 끊임없이 제기하고 제기할 수밖에 없는 물음이다. 아울러 이 물음은 오늘날에 이르러 특별히 제기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역사 이래 줄곧 물어져왔다. 그리고 역사 속에서 행복과 관련한 대답은 다양하게 이루어져왔는데,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은 행복을 묻기에 앞서 덕에 대해 먼저 논의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덕이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도덕이 아니라 arete, 즉 탁월함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행복에 대해서 생각할 때, 행복 그 자체를 추구하기보다도 이에 앞서 탁월한 삶에 대해서 성찰하였으며, 그들에게 탁월한 삶이란 타고난 자신의 성향을 사회 속에서 잘 실현시키는 것이었다. 즉 고대 그리스에서 행복은 바로 그렇게 자기 자신을 탁월하게 사회 속에서 실현시켰을 때 주어지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행복은 자신을 실현해나가는 삶 속에 주어지는 것이지 그 자체로 삶의 목적이나 추구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행복 그 자체를 목적으로 두지 않았을까? 그것이 2500년 전 그리스 문명에 우리가 궁금증을 갖는 부분이다. 그리고 생각하면 그 까닭은 오늘날 우리가 쾌락과 안정으로 대변되는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두고 숭배하는 것과 달리, 고대 그리스에서 참된 행복이란 자신의 탁월함을 공동체 속에서 실현해내는 것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 자신의 탁월함을 실현하고자 했던 그리스인들은 만의 고립된 행복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이 보여주듯 의 삶이 와 더불어 있음을 자각하고 서로 함께 행복하고자 했다. 그 점에서 그들의 행복은 홀로있지 않았고 서로있었다. 생각하면 이 얼마나 당연한 말인가? 내가 공동체를 무시하고 나만의 행복을 추구할 때, 그 공동체의 윤리는 붕괴되고 결국 서로에 대한 공포와 시기, 불안으로 모두가 불행해질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에게 행복에 대한 물음은 너무도 협소하고 고립된 물음이 되어버렸다. 또 그 물음은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자유나 자기실현에 대한 물음과는 무관한 물음이 되어버렸다. 즉 오늘날 행복한가?”라는 물음은 단지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고 여유롭게 사는 삶과 뗄 수 없는 물음이 된 것이다. 그리고 설사 그런 안정적인 조건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이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자기 자신과 삶의 탁월함에 대한 물음은 제쳐두고 그저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에 처해 있다. 다시 말해 행복에 대한 물음이 협소해졌다는 말의 의미는 우리가 행복을 가치가 아닌 물질에 한정시켜 버렸다는 점을 가리킨다. 이뿐 아니라 즈음 우리에게 행복은 우리의 행복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묻는 말과 같은 말로 쓰인다. 생각하면 치열한 경쟁시스템을 동반한 교육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부터 를 더불어 살아가는 대상이 아니라 경쟁의 대상이요 기껏해야 필요의 대상으로 치부해온 우리에게 행복 또한 나의 행복으로 여겨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다.

 

물론 우리는 그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제한적이나마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혹은 다양한 집단 속에서 우리의 행복에 대해서 고민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처럼 서로를 짓밟음으로써만 생존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사회 속에서 작은 집단 속의 우리의 행복에 대한 고민은 그와 경쟁하는 또 다른 집단의 불행을 고민하는 것과도 같다. 그런 까닭에 이러한 제한적인 울타리 내에서 우리를 생각함 역시 참된 의미에서 더불어 사는 삶이라 볼 수 없고 그런 한 고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루소의 말처럼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에 대한 복종을 의무로 바꾸지 않는 한, 영원히 주인일 수 있을 만큼 강한 것은 없으니, 다른 집단 혹은 사람을 배제하고 고립된 행복을 묻는 것은 실은 불가능한 물음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늘날 행복을 어떻게 다시 생각해야 할 것이며 이를 토대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그리고 2500년 전의 그리스인들과 달리 우리는 왜 행복을 협소하고 고립된 행복으로 생각하게 되었으며, ‘나 자신을 추구하기보다 나의 행복만을 추구하게 되었는가? 우리는 이러한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한낱 물질적 욕망이나 성공에 대한 욕구를 행복과 동일시하는 오늘날의 우리 모습을 반성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성찰을 통해 모두가 행복할 수 없는 사회 속에서 나의 행복을 위해 너의 행복을 배제해왔던 우리는 조금씩 나와 너의 행복을 위해 고민하기 시작할 것이다.

 


2. 행복을 넘어서 나 자신으로

 

오늘날 행복은 너나할 것 없이 우리 모두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물론 행복이 우리 삶과 사회의 목표임은 애써 언급할 필요 없는 자명한 명제일 수도 있겠으나, ‘모든 인생은 고통임을 통찰한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생각하면 어쩌면 행복하기만을 원하는 우리의 태도야말로 삶의 결핍과 불행을 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필자가 모든 것을 비우자는 부처의 가르침이나, ‘맹목적인 의지를 완전히 버리라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적 교훈을 따르자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오늘날 행복을 단지 물질적 안락이나 쾌락, 혹은 타인과의 경쟁에서 이김으로써 얻어지는 성공과 동일시 여기는 우리에게 있어서 고통을 배제하는 협소한 행복은 결국 망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임을 우리는 드러내려 한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좁고 고립된 행복이 아닌 보다 높은 가치를 포함한 행복, 즉 우리가 삶에서 겪는 갖은 고통과 불행까지 포괄할 수 있는 행복을 넘어선 가치에 대해 생각하고자 한다. 그렇게 우리 삶에서 필연적으로 겪는 불행까지 그 자체로서 긍정할 수 있게 되는 보다 높은 가치의 중요성에 대해 고찰해보려 한다. 그것을 우리는 행복을 넘어선 행복이라 말해 볼 수 있겠다. 또한 니체가 자주 논리성만을 추구하는 이성을 비판하며 신체의 감각과 의지를 포함한 이성을 큰 이성(die große Vernunft)’이라고 표현했듯이, 우리는 불행을 포함한 행복을 하나의 큰 행복(die große Glücklichkeit)’이라 말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좌우간 그것을 어떻게 부르든 우리에게 중요한 물음은 그저 체념하는 방식이 아니라 삶의 고통을 그 자체로서 긍정한다는 것의 가능 여부이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태도가 삶의 고통을 무작정 긍정하자는 무책임한 태도는 아닌지에 대해서도 우리는 물어야 할 것이다.

 

두 물음에 대해 대답하자면, 첫 번째로 행복보다 중요한 삶의 가치가 있는지 누군가 묻는다면 필자는 그렇다!”라고 힘주어 외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되묻는 다면 필자는 다시 세찬 목소리로 그것은 삶이요 자기 자신이다.”라 대답할 것이다. 그 까닭은 결국 나의 없이는 행복도 없을 것이며 자기 자신을 긍정하지 않고서는 또 어떤 물질적 안락으로도 우리는 결코 온전히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까지도)을 긍정하라고 외쳤던 철학자 니체는 우리에게 문제는 오직 삶이고 모든 예술 형식은 삶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삶이란 살며 마주치는 모든 것들을 자신 만의 불꽃으로 만드는 것이라 말했다. 결국 우리에게 근본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문제가 인 까닭에 행복보다 중요한 삶의 가치는 삶 그 자체요, 참된 삶이야말로 행복한 삶보다 우선하는 가치이다. 그렇다면 삶이란 무엇이며 참된 삶이란 또 무언가? 이 단언할 수 없는 물음에 대해 필자는 단지 삶이란 자기 삶이요 그런 까닭에 참된 삶이란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삶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니체의 삶에 대한 정의는 우리에게 참된 삶이 무엇인지 정확히 지적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자기 자신으로 나아가는 참된 삶을 우리가 살아가는 한, 그 속에서의 고통과 불행, 슬픔을 우리는 긍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 자신으로 나아가는 과정 속에 겪는 고통은 내가 감수하는 고통이요 근본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하나의 자발적 고통’, 헤겔의 말로는 긍정을 예비한 부정이기 때문이다. 또한 헤겔은 자기 자신과 일치하는 삶이야말로 나 자신의 주인이 되는 삶이요 그런 한 그는 자유롭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통찰에 우리가 동의한다면, 진정으로 자기 자신으로 나아가는 사람은 행복과 고통을 긍정하는 보다 높은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요 또 자유로운 사람이다.

따라서 필자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고통을 마냥 긍정하자고 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리고 이는 앞서 제기한 물음 중 두 번째 물음, 즉 모든 삶의 고통을 그저 받아들이자는 것은 아닌가 하는 문제제기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삶은 고통의 연속이니 우리는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지금도 자기의 삶을 짓누르는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또 하나의 폭력으로 여겨질 뿐이다. 애써 가슴 아픈 사례를 들 필요 없이 지금도 짓누르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는 우리 대부분이 아마 저 무책임한 말을 접한다면 분명 분노할 것임은 자명하다.

 

한편 농부 철학자 윤구병은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사회가 좋은 사회라 주장하며 우리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있을 것이 무엇이고, 없을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 있으면 얼마나 있고, 없으면 얼마나 없느냐를 꼼꼼히 살피지 않는 데에 우리 사회의 병폐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 단순하면서도 당연한 성찰에 우리가 지금껏 놓쳐왔던 점이 숨겨져 있다. 즉 우리는 나의 행복에 고립되어 우리가 함께 겪는 고통을 세세하게 성찰하고 어떤 아픔이 우리에게 없을 것이고 어떤 아픔은 우리가 감수할 아픔인지 온전히 걸러내지 못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여전히 마땅히 없을 것으로서의 고통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는 와중에 우리는 나와 너의 행복보다도 나의 행복만 찾게 되며 스스로 독방 속으로 기어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것도 참된 행복이 아니라 없어야할고통에 대한 반동으로 추구되는 물질적 안락함을 위해서 말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가 불행할 수밖에 없는 근본적인 까닭이며, 그런 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한 반성 속에서 이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첫째로 오늘날의 협소하고 또 고립된 행복을 넘어서 자기 자신이라는 가치를 찾아나서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자신으로 살아가는 한, 우리는 삶에서 주어지는 행복과 고통 모두 긍정할 수 있으며 또 다가오는 불행 속에 침잠하지 않고 나 자신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이 우리가 추구해야할 새로운 보다 높은 이다. 그러므로 뜻 없는 고통, 그저 우리를 짓누르며 우리로 하여금 고립된 자기가 되어 와의 경쟁을 강요하는 데서 오는 압박과 불행은 우리에게 없을 것이요 우리 사회에서 걷어 내야할 것들이다.



3. ‘나의 행복에서 우리의 행복으로.

 

여기서 혹자는 우리에게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삶이야말로 고립된 삶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점에서 를 넘어선 의 행복에 대한 고민에 있어서는 자신이 속한 가족 혹은 집단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느냐고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물음에 대해서는 다행히도 우리의 철학자 김상봉의 는 오직 와의 만남을 통해서만 가 될 수 있다는 대답으로 대신할 수 있을 것이니, 우리는 그가 밝힌 바를 되새기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는 자유는 자기형성에 존립합니다. 하지만 자기가 과연 무엇입니까? 나는 오직 너와의 만남 속에서 더불어 우리가 됨으로써만 내가 됩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오직 누군가와의 만남을 통해 세상에 오고 그 만남 속에서 내가 됩니다. 그런즉 나를 형성한다는 것은 우리를 형성한다는 것, 곧 너와 나의 만남을 형성한다는 것과 정확하게 같은 말입니다.”이라 말하며, ‘로 사는 삶이 결코 와의 만남을 배제할 수 없음을 밝혀 놓았다. 그리고 를 이루는 와의 만남에서 는 단지 나의 가족이나 소속 집단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만남으로 나를 새로운 나로 거듭날 수 있도록 하는 에는 제한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참된 의미에서 자기 자신으로 나아가는 삶을 위해서, 우리는 모든 와의 만남에 대한 가능성을 확보해야 한다.

 

한편 자기로 산다는 건 하나의 주체가 된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주체의 본질은 활동성에 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주체로 정립하는 활동을 통해 주체가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할 때 객체로 전락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만의 일일 수 없다. 오직 와의 만남을 통해 는 참된 의미에서 주체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체성의 서로형성에 대해서 김상봉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왜냐하면 주체는 오직 타자의 부름에 응답함으로써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를 부르는 이름에 대답하기 시작하면서 스스로 의식하는 주체로서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가 될 때 비로소 그는 자기를 자기로서, 다시 말해 로서 의식할 수도 있게 됩니다. 그리하여 부르는 자와 대답하는 자는 부름과 응답 속에서 너와 내가 되고 또 우리가 됩니다. 주체성이란 그런 부름과 응답이 교차하는 만남 속에서 생성되는 나와 너 그리고 우리라는 인격성입니다. 그 속에서 주체는 부름받는 이면서 응답하는 이며 부름과 응답 속에서 생성되는 우리인 것입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함으로써만 참된 의미에서 가 된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기억해보면 지금의 가 있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수많은 들과 만나왔는가?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각자의 삶 속에서 와의 만남에 응답하고 있으며 또 대답하려 하고 있다.

 

이처럼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삶이 결코 를 배제한 채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삶 속의 무수한 들과의 만남을 지속해나가는 삶인 한, 우리의 큰 행복또한 와의 만남에 있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는 만남으로 진정한 가 되고, 자기로 살아갈 수 있으니 김상봉의 지적처럼 만남은 자유이며 자유는 그 본질에서 사회적이다. 그런 까닭에 나의 자유는 너와의 만남이 온전해지는 만큼 확장될 수 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사회 속에서 와 온전히 만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 까닭에 의 행복은 결코 의 행복과 무관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국가에서 사는 국민들의 삶의 행복지수가 OECD 34개국 중 최하위이며 자살률은 1위인 까닭은 바로 우리가 각자의 고립된 섬에서 행복을 찾으려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한 한국사회를 위해서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환경 등 다양한 차원 속에서 각각의 구체적인 사안들을 고찰해야겠으나, 무엇보다도 의 행복이 의 행복과 무관치 않다는 우리 사회의 진지한 성찰이 없는 채로는 우리 사회는 참된 행복에 이를 수 없다.

    

 

4. ‘우리의 행복을 위한 과제


이제 우리는 나의 행복너의 불행이 아니라 너의 행복과 하나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를 이어주는 매개는 다름 아닌 만남인 바, 우리의 큰 행복은 서로간의 만남의 온전한 만큼만 온전해질 수 있다. 까닭에 우리가 생각해야할 바는 의 만남을 저해하는 바를 하나씩 고민해내고 성찰하여 그것을 우리 사회에서 걷어내는 데 있다.

대표적으로 우리 사회의 경쟁주의는 서로를 만남의 대상이 아니라 대립적 대상으로 고착시키는 원인 중의 하나이다. 교육현장에서부터 서로를 짓밟고 승자와 패자가 나눠지는 섬뜩한 현실을 아이들에게 체화시키는 우리 사회에서 경쟁주의가 도달하지 않은 곳은 찾기 어려워 보인다.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수반하는 치열한 경쟁주의로 우리는 만남은커녕 나·남으로 분열되고 더욱 고립되어 왔다. 나아가 열악한 노동환경을 방치하는 것은 이미 폐허가 된 만남의 도시에 재차 포격하는 바와 같다. 자본과 상품의 자유로운 흐름으로 시장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려는 신자유주의는 인간의 본질적 삶의 활동인 노동마저 상품으로 전락시켰다. 상품이 된 노동자들은 남보다 잘 팔리기 위해 인간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착취해야 하는 끊임없는 경쟁 속으로 내몰렸다. 시장의 자유로운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한 노동자들은 불안정한 삶을 강요당해야 했다. 까닭에 신자유주의 확산 아래 이 땅의 국민들은 오늘날 정규직으로 살아남기 위해 와 치열하게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경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은 끝까지 살아남기 위해, 경쟁에서 도태된 자들은 말 그대로 생존을 위해 자유를 포기해야 했다. 그렇게 내 가족, 이웃 간에도 나는 너이며 너도 나가 되는 만남의 지평을 열어젖히지 못하는 지금, 국가적 차원에서 만남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저 공허하기만 해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하나의 노동하는 인간인 한, 우리네 노동환경을 개선하지 않고서는 고립된 자기로부터 벗어나 너를 만나 자기를 형성함으로써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이뿐 아니라 우리의 정치는 또 어떤가? 실은 정치야말로 만남이다. 정치가 우리의 공동체를 이끄는 지평임을 감안한다면, ‘가 만나 우리가 되는 만남이 가장 활발해야할 곳이 정치 영역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정치는 만남이 아니라 분열과 대립이 가장 활발히 이루어지는 곳이다. 진보와 보수, 지역과 지역 간의 해묵은 대립은 물론이고 뜻이 아닌 오직 자신의 당선만을 고려하며 정치적 행보를 이어나가는 모습이 오랫동안 우리가 지금껏 보아온 정치 풍경이다. 정치란 그 나라의 거울과도 같다. 그러므로 우리네 정치는 서로의 차이를 극복하고 국민을 위한다는 큰 뜻 아래서 만나야만 한다. 오직 그런 한, 우리 사회도 서로 간의 다름을 인정하며 각자의 모습으로 만남을 이루어 나갈 것이다.

 

경제와 정치가 아닌 보다 넓은 사회적 지평에서 보자면, 인권은 우리가 서로 만나기 위해 닦아야할 초석이다. 생각건대 삶은 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사는 것이며, 그렇게 더불어 사는 삶이란 가 자유롭고 동등한 인격체로 서로 만남을 형성하는 것이다. 나아가 인권이란 우리가 사회 속에서 만나기에 앞서서 ’, 그리고 로 서있기 위한 하나의 땅과도 같다. “따라서 인권이 보장되지 않는 곳에서 는 온전한 의미에서의 주체가 될 수 없으며 만남은 두 주체를 전제로 하기에 하나의 주체도 되지 못한 우리는 결코 더불어 살아갈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까닭에 우리는 삶다운 삶을 형성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도 서로의 인간다움의 권리를 살펴야 하며, 세계인권선언문과 그 밖의 국내법, 국제법에 제시된 인간으로서 지녀야할 천부인권에 기초하여 그것이 오늘날 우리사회에서 온전히 지켜지고 있는지 끊임없이 살펴야할 것이다. 그러한 인권의 기초 위에서 우리는 서로 간에 만남을 형성할 수 있으며, 그런 한 자기 자신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삶 위에서 우리는 없을 것으로서의 고통과 뜻 있는고통을 분별하고 전자의 고통은 배제하면서도 후자의 고통에 대해서는 긍정할 수 있다. 그러한 삶들이 모여서만이 비로소 행복한 한국사회는 온전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행복은 우리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5. 나감

 

이로써 우리는 행복에 대한 본질적인 성찰에서 시작하여 자기 자신으로, 나아가 우리로 살아가는 한 나의 참된 행복과 행복한 사회가 동시에 가능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아울러 우리에게 행복에 대해 반성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그리스인들의 탁월함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탁월성은 올바른 이성과 결부되지 않을 수 없는 개념이었다. 소크라테스는 탁월성을 이성(logos)이라 생각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성은 올바른 이성을 동반한(meta) 품성상태로 보았다. 소크라테스는 탁월성 그 자체가 하나의 이성이라 본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탁월성이 이성을 동반한다고 보았다. 두 주장이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두 철학자의 공통된 의견은 탁월성이 이성, 생각함과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통찰은 오늘날 삶과 사회의 탁월성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성찰이 부족한 우리에게 우리에 대해 진지하게 반성할 것을 제안한다. 오직 그러한 지속적인 성찰을 통해서만 우리 사회의 행복이라는 씨앗은 씨앗이길 그치고 비로소 하나의 새싹으로 움트기 시작할 것이다.

    

 

참고문헌

 

김상봉, 철학의 헌정, 한길사, 2015.

김상봉, 서로주체성의 이념, 도서출판 길, 2007.

김형근, 신자유주의 세계화 속 노동자 인권과 노동자 경영참여에의 길, 인권법평론16, 2016.

윤구병, 철학을 다시 쓴다, 보리출판사, 2013.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정성환 옮김, 홍신문화사, 2007.

HPI(Happy Planet Index), <http://www.happyplanetindex.org/data>, 검색일: 2016.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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