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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에세이, 미래전략연구를 통한 다양한 연구결과물

연구결과물

연구도서
[2017 청년 에세이 우수상] 역사와 시민의식: 개인주의의 시대에 “성숙한 시민의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 저자
  • 문병준 (서울대학교)
  • 발행일
  • 2017.08.01
요 약

[에세이 우수상 수상작]


“성숙한 시민이식”이란 현대의 도덕이다. 그러나 개인주의적 이익추구를 근간으로 하는 현대 사회에서 이런 도덕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을 기대하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도덕적 가치를 개인에게 의미있는 것으로 만들어준다면 그 때 비로소 가능성을 기대해 볼 수 있다. 의미의 가장 강력한 원천은 역사이며, 개별 시민이 자기 자신의 존재와 행위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때 그는 “성숙한 시민의식”을 자신에게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2017  에세이 공모주제>

- 우리나라 국민들의 시민의식 수준을 진단하고, 보다 성숙한 시민의식 함양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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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성숙한 시민의식”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2. 시민의식의 위기 1 : “성숙한 시민의식”의 도덕적 성격

3. 왜 이기주의의 배격이 중요한가?

5. 의미와 역사

6. 시민의식의 위기 2 : 개인주의와 그들의 역사성 상실

7. 대안은 있는가?

8. 역사와 시민의식, 그리고 새로운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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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용
[2017 청년 에세이 우수상] 역사와 시민의식: 개인주의의 시대에 “성숙한 시민의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문병준 (서울대학교)

1. “성숙한 시민의식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성숙한 시민의식은 매일같이 요구되고 있다. 하지만 시민의식이라는 단어는 무언가 분명하게 와닿지 않는 추상적인 말이다. 한국의 시민의식의 수준을 진단하고 그 성숙화의 방향을 논하기 전에 먼저 성숙한 시민의식이란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필자는 성숙한 시민의식이라는 말의 다양한 사용방식들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뜻들을 추출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뉴스 등의 멘트에 이용되는,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바는 아마도 질서정연함일 것이다. 대규모의 스포츠 또는 공연을 관람하는 동안에는 말 그대로 질서정연하고, 끝난 후에는 주변을 스스로 정리하여 쓰레기가 남지 않게끔 한다든가. 도로에 차가 가득한 상황에서도 구급차가 나타나면 모두 멈추고 길을 비켜준다든가 하는 실천들 말이다.

둘째, 첫번째로 다룬 그런 시민들의 모습이 나타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개인들이 자신의 이기심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오로지 그 순간의 자기만의 편리함, 오직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개인들이 좇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지향을 갖고 있을 때 아름다운 질서라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시민의식은 사실 우리 시대의 도덕, 윤리와 같은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은, 윤리는 전통적으로 시공간을 넘어서는 초월적 보편성을 가지는 것을 뜻한다는 점과 비교해 볼 때, 성숙한 시민의식이라 함은 시민의 시대 즉 근대사회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다.

셋째, 이는 주로 학술적 연구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용법이다. 이들에게 시민의식이란 "민족국가"의 성립과 함께 출현, 발전하였고, 바로 그 정치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시민이 가지고 있는, 혹은 마땅히 가져야 할 그런 정신으로서의 시민의식이다. 이 경우 성숙한 시민의식이라는 것은 과거의 백성이나 인민들과 달리, 정치 공동체의 주체적 일원으로서 권리와 책임을 동시에 갖는 그런 존재인 "시민"에게 요구되는 덕목이다.

, 성숙한 시민의식이라는 말이 어떤 뜻들로 쓰이느냐를 간략하게 추려보면 세 가지 - 질서정연함을 통한 선good의 추구, 이기주의의 배격, 적극적인 정치적 주체로 나서는 것의 세 가지인 것이다. 이 셋은 조금씩 다른 듯도 하지만 사실 서로 이어져 있고, 이 에세이에서 본 필자는 두번째의 것, "이기주의 배격"이 성숙한 시민의식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기주의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지만, 사실 이를 둘러싸고 더 복잡한 구조, 역관계가 자리잡고 있기에 이에 대해서 더 깊이 있는 분석적 사유는 반드시 요구되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성숙한 시민의식을 사회적으로 함양하고자 할 때 부딪히게 되는 가장 큰 장애물이바로 이 개인의 이기주의이다. 또한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기주의의 배격이라는 것은 성숙한 시민의식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를 어떻게 이룰 수 있겠는가?

이기주의가 지나쳐 그것이 타인에게 심대한 피해를 줄 경우 우리 사회는 그것을 법으로서 제한한다. 따라서 이기주의의 배격과 시민의식의 성숙화라는 것을 법으로 강제할 수 있다는 생각도 있을 수 있겠으나 그것은 "준법의식"일 뿐 시민의식이 아니다. 물론 준법의식은 시민의식의 일부일 수 있다. 그러나 성숙한 시민의식이란 법의 제한을 통해서 그 바깥에 더욱 자유롭게 열려 있는 인간의 가능한 행위들 중 가운데에서도 공익이나 공공성에 부합하는 것을 따르게 만드는 것이다. 이처럼 법의 제한범위 바깥에서 더 바람직한 행동들을 만들어 나가려 한다는 점에서 역시 성숙한 시민의식이라는 것은 도덕과 유사한 성격을 지닌 것이다. "왜 한 명의 시민이 오로지 자신만의 이익을 고려하는 대신 질서를 추구하고 정치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해야만 하는가? 그런 것들을 방기하면 더욱 큰 이익을 취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와 같은 질문은 결국 "인간(시민)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더 큰 질문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기본적으로 도덕적인, 윤리적인 탐구가 될 수 밖에 없다.

 

2. 시민의식의 위기 1 : “성숙한 시민의식의 도덕적 성격

 

현실 속에서 윤리나 도덕 같은 것은 위기에 봉착한 지 오래다. 윤리나 도덕 같은 말은 이제 말 뿐인 것, 달콤한 이익이나 쓰디쓴 부당한 권력 등 현실적인 것 앞에서 무력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사회를 발전시키고 이롭게 하는 데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담론이 횡행하고 있다. 오히려 니체가 "도덕의 계보"에서 개진한 유명한 주장 가운데 하나처럼, 도덕은 특수한 집단이 자신들의 현실적 이익을 얻기 위하여 타인들을 속이고 이용하기 위한 의도를 숨기고 있다는 논의들도 점점 더 힘을 얻어간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도덕은 주로 감정적인 방식으로 논의되고 장려된다. 고통스럽고 슬픈 처지에 놓여 있는 사람에 대한 감정이입을 통해서, 도덕적이라고 여겨지는 실천에 대해서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는 집단적인 혹은 미디어에 의한 찬미를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자기 이익을 넘어선 어떤 행동의 가치가 의문시되고 있는 이 시대에 아무리 감정적으로 도덕이나 성숙한 시민의식 등을 고무시키려고 해도 성공 가능성은 요원하다.

윤리는 사실 감정적인 것이 아니라 이성적인 논증에 기반한 것이었다.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은 근대 계몽주의의 등장과 함께 그 기반이 무너지기 시작한 종교적 도덕을 이성적 도덕으로 대체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시민들의 시대인 근대를 지배하는 근대적 합리성의 자기파괴적 성격을 짚어내는 데 누구보다도 중요한 관찰을 수행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도덕론은 도덕 자체가 아무런 근거가 없다는 의식에서 나오는 일종의 폭력 행위이다. 상호 존중의 의무를 이성의 법칙으로부터 도출하려는 칸트의 시도는 서구 철학 전체에서 가장 사려깊은 것이지만, 이를 지지해줄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찾을 수 없다."고 평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근대사회에서의 윤리의 무력한 처지에 대해서 논하기 위하여 마르퀴 드 사드의 소설 "쥘리에트 혹은 악덕의 번영"을 인용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 쥘리에트는 인간이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오로지 단 하나 - 쾌락 뿐이며 유일한 의무는 인간에게 주어진 이성을 사용하여 이 쾌락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쥘리에트에게는 인류 역사가 품고 이어온 여러 이상이나 도덕, 문화적 가치들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다.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 2001, 김유동 역, "계몽의 변증법", 을유출판사 : 136-173

  필자는 이 책을 읽으며 여전히 굵직한 사건들을 일으키며 사회면을 장식하고 있는 "일베저장소" 이용자들을 떠올렸다. 일베를 일종의 사회문제로 여겨지도록 만드는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은 유머, 재미를 위해서 모든 도덕적 담론들을 비웃고 그것들을 철저하게 무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에 대한 여러 반대와 문제제기들을 "이 세상에 재미보다 더 위에 놓일 수 있는 가치는 없다."는 논리로 반박하는 것이다. 이는 성욕의 극대화를 위해서 성 파트너들을 체육 팀이나 관료제처럼 일사불란한 조직으로 만들어내는 쥘리에트의 모습과 겹쳐진다.

천관율, 시사인, 20140929, http://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21341

 

단순히 인터넷 커뮤니티를 이용하는 어떤 청년 세대 뿐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적인 계층과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서 작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타인이나 사회를 위한 어떠한 고려도 하지 않고, 법망까지 피해가는 행동들에 대한 무감함은 전 사회적인 문제이다. 이들 중 다수는 물론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는다는 것이 좋다는 것에 동의한다. 다만 자기 자신이 그에 따라 행동하려고 하지는 않는 것이다.

 

3. 왜 이기주의의 배격이 중요한가?

 

그러나 근대사회의 경제적 근본원리인 "자본주의"는 개인들의 이익추구와 이기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체계이다. 현대 사회의 경제적 번영의 공이 자본주의에 있기 때문에 이러한 개인적 이기주의를 함부로 죄악시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이러한 개인들의 자유로운 이익 추구를 허용하면서 적절한 제도적 개입들을 통해서 그것들이 긍정적 결과를 낼 수 있는 질서로 만들어내며 발전해 온 것이다. 최종적으로 더 큰 이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공멸로 나아가는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자제하고 협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개인들의 이익 추구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그것들을 협력적인 질서로 이끌어가는 방안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신뢰" 이론이다.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는 다년간의 대규모의 조사와 방대한 국제비교연구를 수행하여 시민들 간 혹은 시민과 제도·조직 사이의 자발적이고 안정적인 사회적 협력을 가능케 하는 사회적 신뢰가 국가의 경제적 퍼포먼스는 물론이요, 사회의 질을 높인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다. 서울대학교 사회발전연구소, 2015, “한국 사회의 질”, 한울

 그러나 타인들을 신뢰한다는 것과 그가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현대의 도덕으로서의 성숙한 시민의식이라는 것은 필요 없는 것은 아닐까? 도덕무용론 혹은 도덕적 회의주의가 팽배할 수록 성숙한 시민의식을 시민의 의무로서 갖는 것은 점점 더 요원한 일이 되어갈 것이다. 따라서 사회적 신뢰의 문제를 더욱 깊이있게 살핌으로써 그러한 문제를 예방하려 한다.

그런데 한 가지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이러한 "신뢰"는 한 개인이 가지고 있는 타인들에 대한 압축적이고 요약적인 정보이지 Aoki, Masahiko, 2001, Toward a Comparative Institutional Analysis, Cambridge University Press

 문화적으로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어떤 안정적 감정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신뢰의 작동 원리를 시뮬레이션을 통해서 명쾌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로버트 액설로드의 "협력의 진화"론이다. 연속적인 "죄수의 딜레마" 게임 상황에서 협력적인 상대에게는 나도 협력으로, 배반하는 상대에게는 나도 배반으로 맞서는 팃포탯Tit-for-Tat 전략은 액설로드가 주최한 컴퓨터 프로그램 시뮬레이션 대회에서 가장 높은 이익을 내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예전의 한 수업에서 교수님이 보여주셨던 게임 시뮬레이션 영상을 보았던 것을 잊을 수 없다. 그 영상의 결론은 다음과 같았다. 몇 번 게임을 반복하며 협력을 지속할 것이라고 여겨지는 플레이어들은 계속해서 서로 협력하면 자신들만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나간다. 그러면서 이 견고한 협력 네트워크는 신뢰를 얻지 못하여 그 안에 포함되지 못한 다른 플레이어들을 압도하는 성과를 보인다. 그러나 마침내 게임이 끝날 때가 되어 마지막 상호작용을 하게 되면 협력의 네트워크는 순식간에 무너지며 모든 플레이어들은 서로를 배반해 협력의 이익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 이런 신뢰의 협력 네트워크가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참여자들이 직전 상호작용에서 협력과 배반 중 어느 전략을 택하였는가의 정보를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는 점이다. 즉 좁은 공간 안에서 서로를 잘 알고 그들이 어떤 행위를 했는지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겉으로는 그들이 마치 성숙한 시민의식에 따라 협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둘째, 더 이상 상대방과 관계가 유지되지 않을 것 같으면 신뢰도 그 쓸모를 다한 것이므로 얼마든지 배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의 시민들은 점점 더 거대하고 무정형적이며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사회관계망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 시민들의 실생활과 비교해보면 40여명이 연속적인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하는 것은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서 살아가는 것과 다름 없는 것으로 결코 현실에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존 메이너드 스미스의 "볏짚 모형"이 보여주는 것처럼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상대방을 배반하는 전략을 추구하는 행위자가 소수만 있어도 그러한 전략은 금방 전염되고 사회적 신뢰는 큰 타격을 받게 된다. 최정규, 2013, “게임이론과 진화 다이내믹스”, 이음

 

이처럼 도덕적인 함의를 지닌 성숙한 시민의식의 함양 없이 공공선을 달성하려 했던 신뢰의 이론은 결국 구성원들의 상호 감시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누가 언제 어떤 방식으로 행동했는지, 공동체의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을 하지는 않았는지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사회가 점점 더 복잡해질 수록 구성원들 사이의 상호감시를 수행하는 것도, 그 감시한 정보를 모두에게 전달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결국 성숙한 시민의식에 의한 도덕적 동기를 내재화하는 것을 방기한 채 개인들의 이익추구를 허용하는 것은 질서 유지를 위해 초고도 감시사회로 나아가는 방법만을 논리적 결론으로 내게 된다. 실제로 저명한 주류경제학자이자 구글의 수석 경제학자 할 배리언은 전 세계의 거의 모든 행위자들의 경제적 실천에 관한 기록을 수집하고 있는 구글에 의하여 모든 시민들은 경제적 거래 시 상대방의 계약위반 등을 걱정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며 구글이 경제의 새 시대를 열었다고 자평했다.  Zuboff, Shoshana, 2015, ‘Big other : surveillance capitalism and the prospects of an information civilization’, Journal of Informational Technology

그러나 설령 감시비용의 문제는 구글이 자신들의 수익 모델을 위해서 그들이 지불해준다고 해도 초고도감시의 부작용은 어떻게 감수할 것인가의 문제는 남는다.

현대의 도덕으로서의 성숙한 시민의식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 것. 이 문제를 명확히 인식함으로써 우리는 시민의식이나 도덕,윤리 같은 것들을 필요없는 것으로 다루는 담론들을 논파할 수 있어야 하고 동시에 시민들이 성숙한 시민의식을 자기의 것으로 가져가고 그에 따라 행위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들을 탐구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를 달성하지 못한다면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성숙한 시민의식에 기반한 사회의 도덕은 그것을 지켜가는 집단의 희생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희생의 큰 부분은 그들이 스스로의 이익을 포기한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의도와 실천을 이용하는 타인들에 의한 것일 확률이 매우 높다.

 

5. 의미와 역사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이성적으로, 특히 근대의 특징적 이성 양식인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적 합리성에 의해서는 그 근거를 찾을 수도, 유지시킬 수도 없는 도덕적 행위를, 윤리를 어떻게 개인들이 준수하게끔 할 것인가?

반사작용이나 동물로서의 본능을 넘어서는 인간의 의식적 행동들은 모두 의미에 기반하고 있다. 인간은 오로지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행동만을 한다. 우리 사회에서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이유는 돈이라는 하나의 매체는 메타적인 차원에서 교환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으로 아주 많은 의미들과 손쉽게 교환이 되기 때문이다. 즉 부를 추구하는 것은 반사나 본능이 아니라 의미론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돈은 결국 매체이기 때문에 그 자신의 의미값은 비어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는 그 의미들의 근거를 쉽게 찾을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에 결국 역으로 가장 많은 돈을 끌어들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하는 것이다.

의미와 무의미의 구별을 모든 사회체계들의 근본적 작동원리로 본 독일의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은 사회와 언어 뿐만 아니라 개인들도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어가는 시대로 진단했다. 그는 만약 어떤 것이 한 사람에게 의미있는 것이기 위해서는 그것이 "자기서사"와 관련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서사는 타인과의 얽힘 속에서,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가운데에서 생성되는 그러한 이야기이다. 서사 즉 이야기는 당연히 시간성을 지니고 있고 사회가 시간을 따라 흐르면서 역사가 만들어진다. 이러한 자기서사를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어떤 것이야말로 한 개인에게 있어서 유의미한 것이 되는 것이다. 루만은 이러한 Meaningful한 것과 Meaningless한 것 사이의 구별이 점점 더 개인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 될 것이라고 본다. 루만, 2014, 윤재왕 역, “체계이론 입문”, 새물결

 

이러한 논의에 힘입어 생각해보자면 윤리, 도덕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것이 의도에 있어서, 결과에 있어서 모두에게 얼마나 좋은 결과를 가져다준다 한들 그것이 오로지 자신에게 돌아오는 물적, 경제적 이익을 통해서만 그 가치가 계산된다면 그것은 결국 따라야 할 근거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루만이 이야기한 "자기서사"의 구성요소가 되어줄 수 있다면 더 이상 개인적 이익추구에 의해 뒤로 밀려나는 것이 아니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윤리나 시민의식에 따른 행위를 그저 개인들의 의미 추구, 자기서사의 구성에 맡겨둔다면 그것은 오로지 개인들의 변덕스러운 심정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의미는 개인이 마음대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미는 사람들의 소통과정 속에서, 소통적 행위 속에서만 생성, 유지, 변화, 발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의미와 관련하여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인정'이다. 특히 의미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할 수 밖에 없는 회의주의적 현대 사회의 현실 속에서는 타자들의 인정, 그들의 지지와 사랑이 어떤 것이 의미있는가의 길을 밝혀주는 데 큰 힘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역시 단순 다수의 인정과 지지가 곧바로 흔들림 없는 의미의 제공으로, 더욱이 성숙한 시민의식에 부합하는 내용의 의미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수의 구성원이 앞서 논의하였던 쥘리에트와 같은, 일베저장소의 이용자들과 같은 사고방식과 가치관을 갖고 상호 간의 인정을 수행하며 의미를 만들어낸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겠는가? 인접해 있는 동시대인들 다수의 인정만으로는 시민의식을 구해낼 수 없다.

따라서 필자는 성숙한 시민사회에 어울리는 올바른 의미의 판별이란 오로지 역사로부터만 나올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이 결국 어떠한 역사를 만들어나가고, 또 후대로부터 어떠한 평가를 받을 것인가를 심사숙고하는 그러한 역사적 의식으로부터 말이다. 집단기억으로서의 역사는 있었던 모든 사물과 상태들의 총합이 아니다. 역사는 사건적이고 또한 사건들의 연쇄로서 서사적인 것이다. 이것이 갖는 가장 중요한 의미는 바로 역사의 공간은 한정되어 있고, 그 안에는 유의미하다고 판별된 것들만이 포함되어야 하기에 어떤 것이 유의미하고 무의미한지를 구별하는 인간들의 의식이 드러나게 되고, 또한 그 안에 자신의 존재와 행위를 포함시키기 위한 노력이 발생하게 된다.

필자가 성숙한 시민의식을 도덕과 깊이 관련시켜서 논하였으나 중요한 것은 도덕적 행위를 할 수 있기 위해서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포기할 수 있는가이다. 이러한 사례는 멀리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청암 박태준, 그리고 그와 함께 포항과 광양에 양대 제철소를 건립하고 제철보국이라는 기치를 위하여 신종이산가족이 되는 것을 감수해가며 자신의 인생을 조국의 산업발전에 바친 수많은 노동자들은 분명히 자신의 이기성을 제한한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실천이 가능했는가? 그것은 자기 스스로만을 돌보는  데에서 벗어나 "조국" "민족"을 위한 미래를 만들어가는 데 기여하는 것을 제일가는 가치로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해 있는 정치공동체의 안녕과 발전을 고려하는 공적 사유와 실천은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에서 성숙한 시민의식의 덕목으로 손꼽혔던 바로 그것이다. 시민은 아무런 조건도 갖지 않는 완전히 탈맥락화된 개인이 아니다. 시민은 스스로를 정치 공동체의 주인()으로 의식하는 그런 개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시민이 백성이나 신민, 인민과 다른 것이다.

 

6. 시민의식의 위기 2 : 개인주의와 그들의 역사성 상실

 

그러나 이것은 2017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특히 청년세대에게 어려운 것이 되었다. 물론 이는 장기적인 경제불황와 좀처럼 개선되지 못하고 있는 소득 재분배 구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1960-70년대 이제 막 산업발전을 이루어나가려고 하고 있던 때의 국민들이 겪은 고난에 비하면 지금이 더욱 궁핍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현재에는 왜 이렇게 자기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 절대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지는 담론이 확산되어 있는 것일까? 왜 자기 자신을 넘어선 어떤 더 큰 가치 - 공공선 같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회피되는 것일까?

 

첫째, 개인주의는 계속해서 심화되어 이제 개별 시민들은 이전의 국민과는 달리 자신이 속해 있는 국가나 기업, 공동체의 발전과 번영을 더 이상 자기 자신의 역사적 의미로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동시에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단위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것은 점점 더 규범적으로 불가능한 것으로, 어떠한 이유로도 용납할 수 없는 것이 되어갔다. 공동체나 기업, 국가 같은 단위들은 개별 시민보다 역사적으로 지속되는 것이,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훨씬 용이하다. 따라서 이들 단위들에 대해서 일체감을 느끼는 개인들은 매우 안정적이고 지속적으로 역사적인 의미를 획득할 수 있었는데 이제 그러한 경로가 끊어져 버린 것이다. 이제 시민들은 대단히 개인화된 방식으로만, 반드시 자기 자신의 기여를 직접 확인하고 확인받을 수 있을 때에만 스스로의 역사성을 확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역사와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은 다시 개인주의를 강화시키고, 경제적 부를 통해서 그런 사적인 공간 안에서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을 제일의 목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둘째, 만약 상황이 위와 같다면 시민들은 혼자서 혹은 더 작은 단위에 기반하여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것은 점점 더 어려운 일이 되어간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알렉상드르 코제브와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 테제를 원용하여 말하자면 한국의 역사가 종언해버렸기 때문이다. 후쿠야마는 자신의 저술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에서 1968년 유럽 학생과 청년들에 의한 대규모 사회운동이 일어난 이유를 2차대전 이후 유럽의 경제성장이 안정되고 민주주의가 공고화되면서 역사가 그 끝을 고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 바람에 68년의 학생과 청년들은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추구할 수 있는 역사적인 목적을 상실해버렸다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와 행위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것으로 판정될 결과를 남기는 실천으로부터 나오는데 그들은 그런 기회를 박탈당해 버렸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에 뚜렷한 대안도 없는 채로 기성 체제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수행했다는 것이다. 다소 과격하지만 그의 이러한 논변을 "한국 역사의 종언" 상황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는 데 활용할 수 있다. 한국은 80년대에 이르러 선진국의 대열에 오를 수 있는 경제적인 발전을 마무리지었다. 지금 한국이 겪고 있는 경제적 문제들이 있다면 그것은 세계의 모든 선진국들이 함께 경험하고 있는 그런 문제이다. 또한 그 후 87년에는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후쿠야마가 정치사의 끝이라고 보았던 바로 그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도달했고 그 이후로도 여러 정치적 격변들을 겪으며 현재에는 민주주의가 상당한 수준으로 공고화 된 것이다. 만약 지금 여기서부터 새로운 역사가 도래할 수 있다면 그것은 현재까지의 학술적 혹은 사회적 담론이 한 번도 제시하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상상들을 해내고, 그것을 실현하면서 열리는 그런 국면이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치와 경제에 있어서 그러한 상상들, 모형들, 실천의 상들은 만들어지지 못했고, 있다 한들 시민들에게 확산되어 있지 않다. 그러니 우리 시대의 시민들은 자신의 존재와 실천의 역사적 성격, 역사적 의미를 감지할 수도 없고 확신할 수도 없는 것이다. 청암과 포스코의 노동자들이 과거에 경험했던 바로 그 감각, 제철소의 건립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한민국사의 빛나는 한 장으로 만세에 기록되리라는 그러한 확신을 우리 시대의 시민들은 어디서도 가질 수 없는 상태에 놓여 있다. 이러한 시대에 역사적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소수의 경영자, 정치가, 예술가들이며, 절대다수의 시민들은 이러한 점차 우상화-아이돌화 되어가는 소수의 팬이 되어 지지·응원하고 감정이입함으로써 역사에의 욕망을 대리충족한다.

 

 

이는 이러한 국가사회 수준에서의 전망의 결여에만 의한 것이 아니다. 과거 포항제철의 노동자들은 평생동안 한 기업에서 국가적인 기획의 사업에 동참하면서 앞서 논의하였던 "자기서사"를 써 나갈 수 있었다. 정부나 기업 등 하나의 조직에 참여하여 자신의 역할을 담당하고 과업을 수행해 나가는 것은 한 개인이 정치 공동체에 영향을 미치고 긍정인 기여를 할 수 있는 가장 주요한 장場이다. 이러한 이해는 청암의 시대에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기에 그는 한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썼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 젊고 똑똑하다는 사람들 중에는 자신의 전문성이나 장래에 대한 심사숙고도 없이 월급 얼마 더 받기 위해 철새처럼 직장을 옮겨다니는 일이 허다하며, 일부 기업들까지 이런 분위기에 편승, 스스로 인재를 키우려는 노력 없이 다른 회사 사람을 금전으로 유혹하는 사례 또한 적지 않은 것 같다. … 우선 사람을 뽑을 때 회사에 평생근무할 결의를 가진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 자질이나 능력면에서 좀 부족해도 평생직장이라는 각오로 일하는 사람의 기여도가 더 클 것으로 기대된다.” 박태준, 1995, 조용경 엮음, “각하! 이제 마쳤습니다.”, 한송 : 55-56

 

 

너무나도 아이러니한 것은 취업난에 시달리는 우리 시대의 청년들은 모두가 뽑아만 준다면 평생을 바칠 각오로 무장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고용 현실은 설령 취업이 된다 한들 시민 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과 직장 생활을 동일시하고 일체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장기적이고 안정적 고용이 말살되고 있는 상황이다. 현대 세계의 수많은 인류의 거대한 성취와 발전은 많은 경우 기업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과학기술과 결합하는 자본주의 기업들은 이렇게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장場임에도 불구하고 선진화된 국가일수록 기업 내부의 그 누구도 그 기업의 성취를 자신의 성취로 생각할 수가 없는 구조이다. 지속하는 것은 오로지 기업조직일 뿐 그 내부의 구성원은 말단의 직원부터 최고경영자까지 모두 끊임없이 교체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현대에 개인들의 활동은 파편화되어 연속성을 상실하고 만다.

 

7. 대안은 있는가?

 

성숙한 시민의식을 갖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시민들의 행위와 결과가 역사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확신이라면, 작금의 역사성 상실의 시대를 위한 대안은 무엇인가?

 

만약 정말로 코제브와 후쿠야마의 주장대로 역사가 종말을 맞이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정치사와 경제사의 종언일 뿐 예술의 역사 혹은 지식정보와 과학기술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오히려 이 분야의 역사는 멈추어 버렸다고 말해지는 정치와 경제에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고 있다. 구글로 대표되는 정보기술과 자본주의의 결합이 경제 뿐만 아니라 정치에까지 미치고 있는 영향을 보면 이러한 주장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과 자본주의의 결합은 또한 환경 문제의 해결 같은 것을 향해서도 나아가고 있다. 전기차, 민간 우주로켓 산업, 태양광 에너지 사업 등을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공학자이자 경영자인 엘론 머스크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그의 기획의도나 사업의 실제 등이 실로 그러한 목적에 부합하는가의 여부는 별개의 문제이다. 그것은 단 한 사람이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실로 모든 시민들의 협력을 요구하고 있는 그런 종류의 문제이며 현재 인류에게 주어져 있는 역사적 과업인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한국에 요구되었던 기술의 시대적 과업이 한국의 자체적 철강 생산이었다면 이후 우리에게 주어진 과업의 모델을 머스크의 사례가 잘 보여주고 있다. 성숙한 시민의식은 자기 자신이 과학자 혹은 기술자가 아니더라도 과학기술과 사회 사이의 관계, 과학기술정책, 과학기술과 자본주의 사이의 결합 등의 주제들에 대해서 높은 관심과 충분한 지식을 포함해야만 하는 것이다. 현대의 시민들은 과거 어느 시기보다도 가장 뛰어난 역량을 지닌 개인들이다. 이 영역에서의 역사는 그들이 얼마나 제대로 각자가 필요한 위치에 자리매김 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둘째, 역사의 기술記述 방식이 달라져야 한다. 필자가 주목하고 있는 하나의 모델은 서구의 과학기술의 역사를 연구하는 일련의 모임이 수행하고 있는  유지보수자들The Maintainers” 학술 운동이다. 앞서 다루었던 엘론 머스크로 대표되는 친환경 운송수단 및 에너지 사업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과연 오롯이 혼자서 그 많은 업적들을 이루어내고 있는 것인가? 흔히 과학기술과 산업의 결합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는 혁신인 천재적인 과학자 혹은 공학자, 영웅적인 경영자들 개인의 탁월함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으로 기술하는 경향이 주류적이다. 그러나 그렇게 대외적으로 빛나는 성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수없이 많이 수행된 기초연구들, 그러한 연구와 창의적 의사결정들을 가능케 해 주기 위한 인프라스트럭처들의 개발과 유지보수, 하나의 기술적 아이디어가 실제 제품으로 생산되고 유통되어 산업적인 성공을 거두기까지 필요한 모든 과정들을 가능케 만들어 주는 일견 평범해 보이는 유지보수자들의 평범하지 않은 업적들이 뒷받침되어 있는 것이다. 역사에 대한 이들의 기여를 정당하게 확인하고 그것이 역사 속에 기록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이들유지보수자들연구 그룹의 지향인 것이다. 전치형, 한겨레, 20170601,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97187.html;http://themaintainers.org/

 이러한 지향은 단순히 대안적인 역사 기술을 해내려는 연구자 집단 안에 머물러서는 안 되며 더욱 보편적인 관점이자 사고 방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단순히 기술을 이렇게 한다고 하여 사람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쉽게 속일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왜 한국사회가 다시 진지하게 고용보장의 문제를 숙고해야 하는가의 근본적 이유이다.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고용이라는 것이 단순히 개인들의 경제적 복지와 삶의 안정을 보장해 주기 위해서라는 이해는 단순한 것이다. 기업의의 역사성과 직원의 역사성이 일체화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이며, 개별 시민들로 하여금 역사적 책임감을 통해 이기주의를 넘어서는 책임감을 느끼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각 계에서 이렇게 활동하는 전문인력들 가운데에서 뛰어난 역량과 성취를 보이는 자들이 정부의 공직을 담당하게 되는 시스템을 전면화시키는 것도 한 방법이다. 부르디외가 이야기하였듯 국가는 의미의 기반이 되어주는, 하지만 결국 일뤼지오-허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사실은 허약한 상징자본들을 보증해주는 최후의 메타적 기관이다. 부르디외, 1999, 하태환 역, “예술의 규칙”, 동문선

 고용 안정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방안은 동일한 업무영역이나 기술을 활용하는 시민들 전체를 하나의 거대한 무정형의 집단으로 일체화해 줄 것이다. 자신이 종사하는 분야에서 최고의 수준에 다다른 자가 가장 강력하면서도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상징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정부의 공직에서 일을 하게 된다면, 그 업무와 기술 종류의 동일성을 통해 일체화되는 다수의 시민들에게 역사적 의미를 간접적으로나마 제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8. 역사와 시민의식, 그리고 새로운 미래

 

이런 것이 왜 시민의식의 함양과 관련이 되어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처럼 시대적 과업에 대한 소명의식을 개인화된 방식으로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때, 모든 개인들이 자신과 역사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을 스스로 가질 수 있을 때 그것은 총체적인 세계관을 사고방식을 바꾸어주는 힘을 발휘한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단순히 내 한 몸에 국한되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인 결과를 남긴다는 것을 알고 있을 때 비로소 나 자신을 넘어선 생각을 하는 것이 그에게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고 실제로 시민의식에 따른 윤리적 고민들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역사적 의미를 인식하는 것은 확인하는 것이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환경으로서 제공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이 갖추어질 때 개인들은 자신의 역사성을 확신하게 되고 그로부터 좁게는 조국과 정치공동체의 미래부터 넓게는 인류의 역사까지 주체적으로 고민하게 되는 그러한 공공성을 확보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선진국의 탈물질주의적 가치관을 부러워하는 이유도 그것이 공공성의 확보로 이어지기 때문 아니었는가. 또한 탈물질주의를 달성할 수 있게 될 때에만 우리가 성숙한 시민의식의 핵심이자 기본 조건으로 확인했던이기주의의 배격역시 가능해지는 것이다. 아직까지 눈 앞에 보이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미래를, 역사의 흐름을 염두에 두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탈물질주의의 핵심이다.

 

단순히 이기주의의 배격 뿐이겠는가. 만약 시민 한 명 한 명이 스스로 실감할 수 있을 만큼, 그들 자신의 손에 정치 공동체의 미래를 쥐어 준다면, 그들의 존재와 행위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게끔 할 수 있다면 그 무겁고도 진지한 책임은 성숙한 시민의식이라는 것은 자연스럽게 샘솟게 할 것이다. 이 때 나타나는 시민의식의 성숙함은 고정적이고 단순한 과거의 도덕의 수준을 뛰어넘어 매 순간 새로운 사회, 새로운 미래를 위해 필요한 문화의 기초가 되는 풍부하고도 창의적인 내용들을 갖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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