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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포항제철을 찾은 일본조사단의 아카자와가 박태준에게 받은 인상은? - 2015.01.06 [프리미엄조선 연재]
등록일 : 2019-04-22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32
1969년 9월 17일 포항종합제철 건설 타당성 조사를 위한 일본조사단(단장 아카자와 쇼이치)이 김포공항에 내렸다. 서울 거리가 한창 소란스러운 날이었다. 9월 14일(일요일) 새벽 2시 30분, 이효상 국회의장이 야당 의원들과 학생들의 철야농성장으로 변한 세종로 국회 본회의장을 피해 제3별관 3층 회의실에서 전격적으로 3선 개헌안 통과 방망이를 두드리고 나서 겨우 사흘째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카자와는 정치인이 아니라 관료였다. 동경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엘리트로서 그해 8월 도쿄의 한일각료회담이 ‘대일청구권자금 일부의 포철 건설 전용’을 다루는 자리에는 일본 경제기획청 조정국장으로 참석하고 있었으며, 양국 공동성명 문안의 작성자이기도 했다. 아카자와는 그때 그 자리의 팽팽한 분위기를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나는 외무성, 대장성, 통산성을 뻔질나게 오가며 각료회의 공동성명 문안을 작성했다. 그런데 이 공동성명 문안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식이었다. 지금도 그 문구는 생생히 기억하고 있는데, “양측의 의견을 조정하기 위해 한국에 조사단을 파견하기로 했다” 하는 것으로서, 어떻게 보면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었다. 김학렬 부총리가 김포공항의 귀국성명에서 “한일 양국은 종합제철 건설사업을 추진하는 데에 기본적 합의를 했다”라고 발표했으나, 우리 일본 측에서는 “일단 타당성 조사를 한 후 검토하기로 했다”라는 식의 발표를 했다. 어쨌든 우리 일본정부는 그 공동성명에 따라 20명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한국에 파견하기로 했는데, 내가 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런데 일본조사단이 서울에 도착한 것보다 훨씬 앞선 8월 26일, 박태준은 참으로 속이 시원한 문서를 받았다. ‘한국과 KISA 간 기본계약을 무효로 한다’라는 KISA의 통보가 그것이었다. 그는 오래 앓아온 이빨 몇 개가 한꺼번에 쑥 빠진 것 같았다. 그러고 나서 찾아온 마지막 고비가 일본조사단이었다.
일본조사단의 포철 현장 기념촬영
일본조사단의 포철 현장 기념촬영
일본과 되기는 되겠지만 밑도 끝도 모르게 다시 질질 끌어댈 것인가? 아니면 착착 하나씩 풀어내서 조기에 몇 가지 서명을 마치고 이른 시일 내에 건설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금도 기술도 경험도 없는 포스코의 운명이 꼼짝없이 일본조사단에 맡겨졌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의 보고서, 다시 말해 단장 아카자와의 판단에 달려 있었다. 박태준은 의연하고 정중하고 진솔하게 그를 상대했다. 아카자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다음과 같은 회고를 남긴다.

<우리 조사단의 방한 일정 중에는 포항 현지시찰도 포함되어 있었으며, 교통편은 전세기를 이용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포항 현지 시찰 예정일 전날부터 호우가 쏟아져 비행기가 뜰 수 없었다. 당시 나는 도쿄에서 처리해야 할 중요한 업무가 있었기에 현장시찰을 중지하느냐, 귀국을 하루 이틀 연기하느냐를 놓고 고민을 했다. 그러나 그 고민은 아주 쉽게 풀렸다. 경제기획원으로부터 3량으로 편성된 특별논스톱 열차로 경주까지 우리 조사단을 수송하기로 했다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3량의 특별열차 중 한 칸은 우리 조사단이, 다른 한 칸은 한국 측 사람들이 이용했으며, 가운데 칸은 식당차로 되어 있었다. 내가 박태준 사장과 친히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바로 이 열차 내에서였다.

빗속을 달리는 열차 안인 탓일까? 편안하고 여유 있게 나와 박 사장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신의 섭리라고나 할까, 아니면 사바세계의 인연에 의한 것이라고 할까? 우리는 아주 오래전에 만났던 사람들처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때때로 차창 밖에 펼쳐지는 시골 풍경을 감상하기도 하면서 우리는 한국의 경제, 포항제철의 구체적인 건설계획과 원료문제, 장차 대제철소로 발돋움할 포항제철과 일본의 제철회사 간의 관계 등 생각나는 대로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박 사장과의 장시간에 걸친 대화를 통해서 나는 그의 인품에 대해 강한 신뢰를 갖게 되었다. 대화 중 나는 박 사장이 참으로 솔직하며 오로지 제철산업의 발전을 위해 목숨까지 아끼지 않는 순수하고 박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고, 과정에서의 어려움은 많겠지만 박 사장이 지휘를 한다면 한국에서의 제철소 건립과 경영이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다.

경주에서 하루를 묵은 우리 조사단은 다음날 포항 현지를 시찰할 수 있었다. 말이 현장시찰이지 그곳은 황무지 바로 그것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황량한 풍경이었다. 그 황무지 위에 사람이 세운 것이라곤 ‘롬멜하우스’라 불리는 목조건물 하나와 브리핑용 공장 조감도 하나뿐이었다. 우리 조사단 일행은 기가 막혔고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나는 담담했고, 이 일은 일본정부가 꼭 협력해야 한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 이유는 박 사장이 나로 하여금 반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인품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결국 조사를 마치고 일본에 돌아온 나는 매우 긍정적인 보고서를 쓰기에 이르렀고, 양국 정부의 승인을 받아 포항제철 건설이 착수된 것이다.>

아카자와가 일본조사단 단장 자격으로 처음 ‘황량한 영일만 현장’을 다녀간 그날로부터 대략 15년쯤 세월이 흐른 뒤의 어느 저녁이었다. 경주 보문단지의 호텔에서 한일경제인협회가 열렸다. 한국 측 회장은 박태준이고, 일본 측 경제인 일행에는 아카자와도 포함돼 있었다. 공식회의를 마치고 만찬과 함께 여흥을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문득 박태준이 와인 잔을 들고 마이크 앞으로 성큼성큼 나갔다.
“여러분. 우리 포항제철은 포항 1고로를 ‘아카자와 고로’라고 부릅니다. 아카자와 고로를 위하여, 건배!”
원탁에 앉아 잔을 들고 박태준을 쳐다보고 있던 아카자와는 눈시울이 뜨끔하고 가슴이 짠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속담, 바로 그 인간적 감화가 일어난 순간이었다.
1985년 한일경제인회의에서 아카자와 씨와 옛일을 회상하는 박태준 회장
1985년 한일경제인회의에서 아카자와 씨와 옛일을 회상하는 박태준 회장
박태준이 아카자와에게 천 냥 빚을 감동적으로 갚아준 그해 가을 저녁은 어느덧 ‘박정희 5주기’를 헤아리는 즈음이었다. 이때 세계철강업계의 신흥 강자로 부상한 박태준의 포스코는 광양제철소를 짓고 있었다. 세계철강협회가 ‘세계철강경기 침체와 철강 과잉공급’이란 이유를 들이대며 개발도상국의 철강생산능력 증대에 반대하고, 일본 철강업계가 이른바 ‘부메랑’을 노골적으로 날려대며(일본철강업계가 포항제철이라는 호랑이 새끼를 키워서 드디어 역으로 공격을 당하게 되었다는 뜻) 협력을 거부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박태준은 ‘역사의 선순환 의지에 대한 신뢰 논리’(중진국은 선진국을 따라가고 개도국은 중진국을 좇아가는 것이 역사의 상식적 법칙인데, 앞선 나라들이 항상 한 손을 뒤로 내밀고 있어야 역사의 선순환 의지가 지속적으로 작동될 수 있다는 것)로써 막아내고 받아치며 오히려 광양제철소 건설에 더욱 속도를 내는 중이었다. 고인(박정희)과 철석같이 약속했던 ‘철강 2000만 톤 시대’를 향하여 박태준이 자신의 뛰어난 장점인 과학적인 판단력과 불굴의 리더십을 마치 쉬지 않는 엔진처럼 돌리며 당당하고 꿋꿋하게 전진하는 것이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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