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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박태준의 발품에 감동한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 - 2015.01.02 [프리미엄조선 연재]
등록일 : 2019-04-22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14
박태준은 도리없이 또다시 김포공항으로 달려갔다. 오직 ‘일응’이라는 두 글자의 일본어(한자)를 빼기 위하여. 그러나 그것이 ‘마라톤 같은 장정’이 될 것이라는 예상까지는 하지 못하고 있었다.

박태준은 도쿄에 닿기 바쁘게 이나야마 회장에게 연락을 취했다. 미리 들었던 그대로 이나야마는 도쿄에 없었다. 비서가 하코네에 가서 휴가를 보내시는 중이라고 했다.
다음, 그는 나가노 후지제철 사장에게 전화를 넣었다. 나가노는 고향에 내려가 있었다. 도쿄에서 800킬로미터나 떨어진 히로시마, 그 원폭 피해의 대명사가 그의 고향이었다.
세 번째로 그는 아카사카 니혼강관 사장을 찾았다. 아직 아카사카는 도쿄에 있었다. 휴가 떠날 차비를 하는 중이었다. 간발의 차이로 한 명은 쉽게 만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상대, 가장 확실한 상대는 역시 일본철강연맹 회장이었다.

박태준은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는 심정으로 이나야마의 비서실에 들렀다. 회장에게 연락을 취해달라는 그의 부탁을 받은 비서가 ‘휴가 중’이라며 정중히 거절했다. 어쩌겠는가? 고함을 칠 수도, 빌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구원을 요청할 곳은 딱 한 군데. 박태준은 염치없는 부탁을 들고 하릴없이 야스오카를 찾아갔다. 야스오카는 곤란한 표정부터 지었다. 기껏 ‘일응’ 때문에 휴가 떠난 거물들에게 결례를 해야 하는가. 야스오카의 마음속으로 지나가는 불편한 말들을 박태준은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포항종합제철에 대한 한국 각료들의 노심초사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신의를 의심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의 하나라도 실수가 없도록 예방하고 점검하는 차원입니다. 이 점을 깊이 이해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첫 생산한 열연코일에 '피와 땀의 결정'이라고 휘호하는 박태준 회장.
첫 생산한 열연코일에 '피와 땀의 결정'이라고 휘호하는 박태준 회장.
박태준은 정성껏 간곡한 부탁을 내놓았다. 야스오카의 얼굴에서 좀 망설이는 표정이 깨끗이 스러졌다. 야스오카는 이나야마의 비서에게 전화를 넣었다.
“박 사장님의 곤란한 사정에 대해서는 들었을 테지요. 결례를 할 수밖에 없는 박 사장님의 국사(國事)에 대하여 깊은 이해를 부탁드린다는 나의 뜻을 이나야마 회장님께 잘 전해주기 바랍니다.”

박태준은 야스오카에게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사를 올렸다. 그리고 찻잔을 앞에 두고 담소를 나누는 십여 분이 흘러갔다. 이나야마의 비서가 전화를 걸어왔다. 역시 이나야마는 변함없이 따뜻한 은인이었다. 비서에게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린 것이었다.

‘박 사장이 원하는 대로 해드리라. 나가노 사장에게는 내가 직접 전화를 해두겠다. 도쿄에 계시다는 아카사카 사장에게는 자네가 전화를 드려서 상황을 잘 말씀드리고 승낙을 받아내라.’

이제 박태준 앞에 기다리는 것은 시간과의 다툼이었다. 그는 ‘일응’을 빼고 새로 작성한 협조각서를 품고 자동차로 비행기로 이틀에 걸쳐 세 곳을 찾아다녔다. 이윽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한일각료회담이 하루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해냈어요?”
김학렬이 ‘일응’을 뺀 서류를 보자고 했다.
“여기 있습니다.”
박태준은 웃으며 새 각서를 넘겨주었다. 피로가 몰려들었으나 마음은 잔잔해지고 있었다.

1969년 8월 26일 오후, 도쿄에서 제3차 한일각료회담이 열렸다. 한국정부 대표단은 김학렬 부총리를 중심으로 외무부장관 최규하, 재무부장관 황종률, 농림부장관 조시형, 상공부장관 김정렴, 교통부장관 강수종 등으로 꾸려져 있었다.

회담 사흘째, 드디어 종합제철소 프로젝트가 책상 위에 올랐다. 일본정부 대표단은, 원칙적으로 찬성하지만 일본철강업계와 상의한 후 자세하게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김학렬은 바로 그 순간을 위해 ‘철저히’ ‘완벽하게’ 준비한 서류를 꺼냈다. 박태준이 마라토너처럼 뛰어다니며 확보한, 일본철강업계 3사 대표의 ‘협조각서’였다. ‘일응’마저 삭제한 그 문서에는, 100만 톤 규모는 경제적 타당성이 있다는 요지와 기술협력을 약속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1969년 8월 24일을 전후하여 도쿄와 서울을 세 차례나 오가며 마라토너처럼 뛰어다닌 그때 박태준의 모습에 대해 일본 지도자들은 어떻게 기억하고 있었을까?
그즈음부터 이미 일본정계에서 전도가 양양했으며 뒷날에 일본 최장수 총리(1982∼87)를 지낸 나카소네는 이렇게 회고했다.

<뭐니뭐니 해도 박태준 선생의 노력이 일본의 협력을 도출해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는 보는 이들이 오히려 안타까워할 정도로 열심히 뛰어다녔다. 일본 측은 박 선생의 진지한 노력에 감동을 받았다.>
1999년 6월 광양제철초등학교를 방문한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오른쪽에서 세번째). 박태준 명예회장(왼쪽에서 세번째)과 유상부 포스코 회장(맨 왼쪽)도 보인다.
1999년 6월 광양제철초등학교를 방문한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오른쪽에서 세번째). 박태준 명예회장(왼쪽에서 세번째)과 유상부 포스코 회장(맨 왼쪽)도 보인다.
대장상, 외무상을 거쳐 1978년부터 수상을 맡게 되는 후쿠다 다케오는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철강산업을 일으켜 국가건설의 초석이 되겠다’는 박태준 선생의 기백에 압도되었다. 박 선생은 ‘그것이 내가 이 땅에 태어난 뜻’이라고 단호히 말했다.>

‘한국인으로 태어난 뜻이 철강산업을 일으켜 국가건설의 초석이 되는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일본 지도자들에게 당당히 천명한 박태준, 그리고 불퇴전을 지시한 박정희의 강철 같은 의지를 받들어 박태준에게 ‘일응 빼기 마라톤’까지 부탁한 김학렬의 철저한 협상준비. 이것이 1969년 8월 28일 일본정부의 매우 귀중한 성명을 탄생시킨다. 바로 그날, 일본정부가 ‘한국 종합제철소 프로젝트를 위해 서울로 대표단을 파견한다’고 공식 발표를 하는 것이다. 곧이어 이튿날에는 야하타제철 후지제철 니혼강관 3사의 사장들이 서울로 날아와서 김학렬 경제기획원 부총리를 예방한다.

무려 10년 가까이 끌어온 한국의 종합제철이 극적으로 불임 상태를 벗어날 가능성이 열린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직은 포스코의 씨앗이 완전히 한국경제의 자궁에 착상된 상태는 아니었다. 곧 영일만을 방문하게 되는 일본조사단의 보고서가 어떤 방향으로 가느냐. 이것이 최후 관문이었다.
1979년 포철을 방문해 기념휘호를 쓰는 후쿠다 다케오 수상.
1979년 포철을 방문해 기념휘호를 쓰는 후쿠다 다케오 수상.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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