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 영상
  • 연구결과물
  • E-카다로그
  • 발전기금
  • HOME
  • 박태준의삶
  • 위대한 만남 - 박정희와 박태준
  • 인쇄
  • 글자크기
  • 확대
  • 초기화
  • 축소

게시판 List
(34) 박정희도 꺾지 못한 박태준의 고집 - 2014.11.10 [프리미엄조선 연재]
등록일 : 2019-04-12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90
1968년 1월 21일 김신조 등 북한 특공대가 청와대 턱밑까지 잠입했다가 무고한 시민들을 희생시키는 이른바 1‧21사태가 발발했으나, 박정희는 흔들림 없이 국정을 챙기는 가운데 1월 25일 대통령령에 의거해 ‘종합제철공장건설사업추진위원회 규정’을 공포하여 추진위에 법적 권한을 부여했다.

2월 14일 추진위는 사무실을 대한중석에서 서울 명동 유네스코회관으로 이전했다. 이날 종합제철 회사의 최초 자본금인 정부 출자금 3억 원과 대한중석 출자금 1억 원이 불입되었다. 이제 회사 탄생은 시간문제로 남아 있었다. 다만, KISA의 차관 도입만 불확실하고 불안한 미결상태 그대로였다.
포철 첫 사무실인 유네스코 회관.
포철 첫 사무실인 유네스코 회관.
경제팀 관료들과 KISA 간의 기본협정을 물려받은 박태준은 그것이 불량품처럼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한국정부의 공식적 국제문서로서의 실효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KISA와 관련해서 두 가지를 중대 현안으로 보았다. 하나는 차관 도입의 실행 여부, 또 하나는 종합제철의 방대한 설비와 기술을 망라한 기본계획에 담긴 적정성과 정직성 검토.

박태준은 KISA의 기술계획에 대한 ‘검토 용역’ 발주를 서둘렀다. 위원장을 맡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독일, 영국, 호주, 일본 등 10개국에 제안서를 발송했다. 호주를 포함한 4개국이 긍정적 답변을 보내왔다. 추진위는 가장 유리한 용역 조건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과 제철공업의 여건이 유사한 일본을 골라잡았다. 그래서 후지제철, 야하타제철, 니혼강관 등 일본의 대표적 철강업체 3사로 구성된 용역단이 전체적인 검토 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그들의 검토 대상에는 KISA가 작성한 사업발전계획, 일반기술계획, 최종 외환비용, 재무계획 등이 두루 포함되었다.

박태준은 박정희가 인정한 완벽주의자다. 그는 경비 지출이 배가되어도 검토 용역을 일본에만 맡길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일본의 검토 결과를 KISA가 기피할 염려도 있거니와 또 다른 객관적 자료를 갖춰야 했다. 그는 미국의 바텔연구소를 찍었다. KISA와 관련이 깊은 바텔연구소를 택한 것에는 그들의 인심을 얻으려는 계산도 담았다.

추진위가 일본 용역단과 ‘검토 용역’의 계약을 체결한 날짜는 1968년 2월 2일이었다. 바텔연구소와도 같은 날짜에 계약을 체결했다. 똑같이 시키는 일이니 공정하게 진행하여 정직한 결과물을 내놔라. 박태준의 메시지는 그것이었다.

그 즈음이었다. 종합제철을 어떤 형태의 회사로 설립할 것인가. 이것이 박정희와 박태준 앞에 놓였다. 박정희는 ‘특별법에 의한 국영기업체’로 하자. 박태준은 ‘상법상 주식회사’로 하자. 서로 의견이 달랐다. 이는 심각한 문제였다. 회사설립 형태에 따라 경영통제, 의사결정, 정부간섭, 자금조달, 세금혜택, 배당정책 등 관리운영의 모든 요소들이 큰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국영기업 형태는 감시와 통제가 심해 관료적인 관리운영이 이루어지기 쉽다는 단점이 있지만, 재정지원과 조세감면의 혜택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상법상 민간기업 형태는 경영효율성을 살리고 시장의 상황에 민첩하게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초기부터 소요되는 막대한 투자자금을 자립적이고 주체적으로 조달하기가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대한중석 경영을 통해 관료주의와 정부의 간섭이 국영기업체에 끼치는 폐해를 체험한 박태준은, 종합제철은 정치적 영향과 관료의 간섭을 적절히 막아낼 수 있는 상법상 민간기업 형태로 해야 하며 미래의 언젠가는 민영화를 하게 될 것이라는 판단을 세우고 있었다.

박정희와 박태준은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국영기업인 ‘대한중공업공사’를 ‘인천중공업주식회사’로 바꾼 당시의 기억들도 들춰냈다. 서로가 선명히 기억하는 일이었는데, 박태준은 상공담당 최고위원이었으니 직접 관장한 업무이기도 했다. 국영기업을 주식회사로 전환한 그때는 경영의 자율성과 효율성을 고려했을 뿐만 아니라 법률을 제정‧공포하여 민영화 전망도 제시했었다. ‘인천중공업주식회사법’에서 가장 주목할 점이 “정부가 소유한 주식을 매각할 수 있다”라는 것이었다. 멀리 내다보며 정부가 소유한 주식을 민간자본에 불하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둔, 다시 말해 장기적인 전망으로 민영화의 길을 열어둔 정책적 결정이었다.

하나의 중대 현안을 놓고 대통령과 추진위원장이 두 차례나 토의를 했다. 그러나 결말을 보지 못했다. 서로가 똑같이 그만큼 심각한 문제로 보고 있다는 뜻이었다. 청와대에서 세 번째 토의가 벌어졌다. 이번에는 박정희가 결론을 내리듯 걱정스레 말했다.

“명치 30년 이후 세워진 일본 제철소들을 보아도 50년 이내에 적자를 모면한 제철소가 없었어. 자네는 민간기업으로 가서 어떻게 하겠다는 거야? 종합제철 설립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고 거기에 근거해 회사를 만들고, 단서 조항에다 매년 회사를 경영한 결과를 정부 감사기관이 감사하기로 하고, 감사 결과 경영상 불가피하게 적자가 난 것은 정부 예산으로 보전할 수 있다고 달아놓으면 돼. 이러면 자네도 회사를 경영하기가 쉽지 않나?”

박태준은 박정희의 진심어린 염려와 애정을 느끼면서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염려해주시는 마음은 잘 압니다. 바로 그러한 단서 조항 같은 것 때문에 여태껏 국영기업체들이 적자를 내고 있는 겁니다. 최고관리자의 책임의식이 희박해져서 그렇다고 봅니다. 모든 책임을 맡겨주십시오.”

책임감. 이 말은 박태준의 진심이었다. 종합제철에 인생을 건다는 각오를 세운 그가 내친걸음에 비전도 피력했다.

“각하의 생각도 그러하시지만, 우리가 국내 수요만 생각하는 제철소를 만들 수야 없지 않습니까? 국제경쟁력을 확보해서 수출도 해야 하는데, 수출 대상 국가를 감안해보면 일차적으로는 일본과 미국입니다. 일본은 차치해도 미국에 수출한다고 했을 때, 미국은 무역규제가 까다롭지 않습니까? 한국정부가 경영하는 국영제철회사라고 하면 더 심한 규제조치를 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제철소 장래에 대한 이러한 고려도 중요하지 않습니까?”

박정희가 미소를 머금었다.

“임자한테 졌어. 좋은 방법을 강구해봐.”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창립총회.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창립총회.
박정희의 이해를 얻어낸 박태준은 설립 형태의 장단점을 비교해 장점만 결합한 제3의 회사 형태를 고안했다. 상법상 민간기업 형태로 설립하되, 정부기관이 지분을 인수하여 지배주주가 되는 방식이었다. 경제팀 관료들 중에 반대의견이 나왔다. 선택은 대통령의 몫이었다. 박정희는 박태준의 의견을 수용했다.

박태준이 박정희에게 밝힌 ‘수출’은 그 의지가 분명한 것이었다. 그날로부터 2년쯤 지난 1970년 6월, 포항제철소 1기 착공식으로부터 불과 두 달밖에 지나지 않은 그때, 그는 임원회의에서 다음과 같이 힘차게 독려한다.

<최초 설비인 100만 톤급 제철소에서부터 일본과 경쟁해 나갈 것이다. 제철소가 최초 가동되는 순간부터 일본 제철업계와 같은 가격으로 수출할 수 있는 제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각 설비 부장들이 설비단위별로 조업에 대비한 경영계획을 지금부터 준비하라. 가장 효과적인 공장을 세우고 우수하고 싼 제품을 만들어 일본이 1만 불을 수출하면 우리는 9천 불을 수출할 수 있는 식으로 해내도록 조업 준비를 하라.>

1968년 3월 4일, 종합제철 추진위는 4차 회의를 열어 일정을 확정했다. 3월 6일 발기인 대회, 20일 창립총회. 회사설립에 따른 발행 주식의 모집 방법은 재무부 장관으로부터 주식청약서를 받도록 한다고 결정되었다.

사명(社名)도 중요했다. 아기가 태어나면 아버지가 작명에 심혈을 기울이는 한국문화에서 최대 국책사업을 짊어진 회사의 이름을 함부로 지을 수 있겠는가. 위원장이 곧 태어날 아기와 같은 종합제철주식회사 사명을 아버지 역할의 대통령에게 올렸다. 안은 셋이었다. 고려종합제철, 한국종합제철, 포항종합제철. 박정희는 주저 없이 찍었다.

“포항종합제철이 좋아. 이름을 거창하게 짓는다고 해서 성공하는 게 아니야.”

박태준이 실질을 중시하는 박정희의 특장을 새삼 확인하는 순간, 마침내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POSCO)’란 이름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현판.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현판.
포스코 탄생의 막바지 과정이 보여주는 박정희와 박태준의 대화는 무엇보다도 국가통치 차원의 ‘각별한 가치’로 기억되어야 한다. 두 인물의 특별한 관계를 감안하더라도 국가대사에 대해 그렇게 허심탄회한 토의를 벌일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여태껏도 그렇거니와 앞으로도 길이 청와대의 귀감으로 남겨야 좋을 것 같다.
포철에서 환담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박태준 사장.
포철에서 환담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박태준 사장.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첨부파일 첨부파일 :
No File!
게시판 List
이전글 (35) 구미 철강사들이 한국에 싸구려 시설을 떠넘기려 하자 박태준은 분노하고 - 2014.11.13 [프리미엄조선 연재]
다음글 (33) 마침내 박태준에게 출전 명령을 내린 박정희 - 2014.11.07 [프리미엄조선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