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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이후락의 부탁으로 종합제철사업을 준비했던 신격호 - 2014.10.20 [프리미엄조선 연재]
등록일 : 2019-04-11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227
1965년 가을부터 1966년 봄까지, 박태준이 박정희에게서 종합제철에 관한 특명을 받아 초보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그 언저리에는, 박태준 아닌 또 다른 한국인이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해 도쿄의 김철우와 접촉하고 있었다. 롯데 신격호 사장으로, 그의 배후는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이었다.

1966년 봄날을 기준으로 잡는 경우, 박정희가 중심에 서서 추진하고 있는 ‘한국의 종합제철 건설 프로젝트’는 정부 관료들이 나서서 국제금융기관이나 선진국 철강기업 경영자와 교섭하는 가운데 박태준은 대한중석 사장으로서 그 프로젝트에 대한 공식적 직위가 없는 상태에서 치밀한 준비 작업을 해나가고, 그러한 움직임들과는 별개로 이후락에 의해 신격호도 그 프로젝트에 사업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형국이었다.

실제가 그랬다. 한일국교정상화의 길을 간신히 열어놓은 1965년 9월부터 한국정부는 종합제철소 건설을 위해 IBRD(세계은행), 코퍼스사 포이 회장과 만나는 등 다각적인 철강외교를 전개하고 있었다. 성과가 나왔다. 코퍼스가 한국 종합제철소 건설을 지원할 국제차관단을 구성하려는 행동에 나서고, IBRD는 한국의 100만톤 규모 종합제철소 건설사업의 타당성 조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피츠버그의 한 귀퉁이를 한국의 어느 해안에 옮겨놓는 일과 진배없는 대역사의 엔진에 막 시동이 걸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해 9월 중순에는 니혼강관의 도야마가 단장을 맡은, 일본 6개 철강기업들이 추천한 조사단 10명이 서울로 왔다. 일본조사단의 역할은 백인들이 내놓을 타당성 조사에 대한 ‘정확성’을 검증할 최적의 비교자료를 작성하는 것으로, 이는 박태준이 박정희의 승인을 얻어 취한 조치였는데, 그렇게 그는 “종합제철소 건설 계획단계부터 참여하라”는 박정희의 특명을 수행하고 있었다. 때마침 대한중석은 적자를 완전히 벗어나 흑자의 덩치를 불리는 중이었다.
문학청년 시절의 신격호 롯데 회장.
문학청년 시절의 신격호 롯데 회장.
신격호와 김철우의 만남은 어떻게 된 것이었을까? 재일동포로 일본에서 맨손으로 사업을 시작한 신격호. 와세다대학을 나와 무슨 사업을 할까 고민하던 중에 ‘일본인들이 미군의 추잉껌을 좋아하지만 일본에는 껌 공장이 없다’는 데 착안하여 수공업식 껌을 제조했는데 그 껌이 불티나게 팔려서 기업가로 우뚝 일어설 수 있었다. 롯데가 껌의 힘으로 초콜릿을 생산하면서 창업 100년의 일본 제과회사 모리나가(森永), 메이지(明治)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던 시절의 어느 날이었다. 신격호는 서울에 나왔다가 굉장히 막강한 권력자와 만나게 된다. 그의 회고를 직접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안상기 엮음, 『우리 친구 박태준』참조)

<고향(경남 울산) 친구이자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으로 근무하던 이후락 씨가 나를 만나자고 했다. 이후락 씨는 나를 만나자 대뜸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현재 박 대통령께서 국가의 기초 산업이 될 제철소 건설을 계획하고 계시다네. 그러나 알다시피 우리나라에 뭐가 있는가? 기술이 있나, 자본이 있나. 그러니 계획만 거창할 뿐 이 일을 실행에 옮길 수가 없네. 그러니 자네가 좀 발벗고 나서서 도와 주게. 자네는 일본 정계에도 영향력이 있지 않은가?”

이후락씨의 제안을 받은 나는 얼떨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과업으로 성공을 거두어 유통업에까지 진출한 나였지만, 그리고 박 대통령의 산업입국에 대한 의지를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그 제의가 금방 내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우선 나는 철(鐵)이란 것에 관해서는 문외한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청와대 경제수석 비서관이 “철에 관해서라면 재일동포로서 일본에서도 유명한 K모 박사가 있으니 함께 의논해 보십시오”라면서 말을 거들었다.

나는 일본으로 돌아오자마자 도쿄(東京) 근교의 지바(千葉)에 있는 ‘동경대학 산업기술연구소’에 비서를 시켜서 전화를 걸게 했다. 그곳에는 일본 문부성의 기술연구관 겸 동경대학 교수인 K박사(본인의 요청에 따라 이름은 밝히지 않기로 한다)가 근무하고 있었다. K박사는 나와 같은 재일동포였으나 이전까지 우리는 서로 아무런 면식도 없었다. 내 비서의 전화를 받은 K박사는 처음에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그도 나의 회사인 ‘롯데’는 알고 있었지만, 그 회사의 사장인 나를 일본인인 줄로만 알고 있었으며, 더군다나 철(鐵) 전문가인 자신과 롯데와의 관계로 보아서는 도무지 만날 일이 없었기에 만나자는 의도가 무엇인지를 짐작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그 이튿날, 그와 나는 동경 시내의 한 중화요리집에서 만나게 되었다.

음식점에서 만나 K박사에게 나의 소개를 한 다음 이후락씨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K박사는 기뻐하면서 조국을 위해 기꺼이 그 사업에 동참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겠노라고 했다.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사실 나는 일본에서 어느 정도 사업적 성공을 거두고 있었으나, 한국인을 경시하는 일본의 사회 풍토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고로(高爐) 전문가인 K박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긍지를 가지게 되었고 그 후로도 그와 매우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그와 나는 대번에 의기투합되어 연간 100만 톤 규모의 종합제철소의 기본기술계획(Master Plan)과 타당성조사(Feasibility Study)에 착수했다. 나는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3천만 엔 이상을 투입하였고, K박사는 모든 일을 제쳐두고 이 작업에 몰두하였다. 현재는 후지제철과 야하다제철이 합병되어 ‘신일본제철’로 되어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두 회사는 서로 다른 별개의 회사였다.

나는 K박사로부터 두 회사 중 K박사의 동경대학원 동료교수가 기술개발본부장으로 근무하던 후지제철의 나가노 시게오(永野重雄) 사장을 소개받았다. 나가노 사장도 이 일에 적극 찬성하였다. 나가노씨의 협조를 얻은 우리는 후지제철 기술자 22명과 동경대학의 전문인력 및 기술자 12명을 합쳐 이 작업에 착수한 것이었다. 일을 착수한 지 8개월 만에 우리는 종합제철소에 대한 기본 기술계획과 타당성 조사를 마칠 수 있었다.>
1985년 포항제철 기술연구소에서 열처리 시물레이션을 살펴보는 김철우 부사장(가운데).
1985년 포항제철 기술연구소에서 열처리 시물레이션을 살펴보는 김철우 부사장(가운데).
신격호 롯데 회장이 말하는 ‘K박사’는 물론 ‘김철우 박사’다. 그러면 김철우의 회고를 들어보자.

<롯데 신격호 사장이 비서를 시켜서 만나자는 연락을 넣고 차를 보냈다. 울산이 고향인 그는 나에게 동향의 이후락 씨로부터 “한국에서 제철소를 해봐라. 박정희 대통령이 어떡하든 하라는 엄명이다”라는 부탁을 들었다며 도움을 청했다. 나는 조국을 위해 좋은 일이니 도와 드리겠다고 답했다. 내 주변의 제철 전문가는 20명쯤 되었다. 특히 후지제철소 기술본부장으로 있는 은사가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 은사의 소개로 신 사장과 함께 후지제철 나가노 사장을 만나러 갔다.

이때 나가노 사장한테서 ‘터키’에서 온 제철소 관계자 얘기를 들었다. 터키에 50만 톤짜리 제철소를 짓기로 했는데, 중간에서 다 뜯어 먹히고는 20만 톤도 하기 어렵게 됐으니 도와 달라는 부탁을 하더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제철소 건설’과 ‘못난 권력’의 위험한 관계를 알아챘다.

초콜릿과 껌과 과자로 일본에 널리 알려진 신 사장은 나가노 사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얇은 것은 잘 만들지만 두꺼운 것은 못 만드는데 한국 청와대에서 김철우 박사를 만나면 잘 풀릴 거라고 하여 오늘 여기 같이 왔습니다.” 이 자리에서 나가노 사장이 소개한 사람이 뒷날 포항제철의 JG(일본기술단) 단장으로 가는 아리가 부장이었다. 그도 돕겠다고 했다. 물론 롯데와 제철소는 멀어졌다.>
포항제철 기술연구소 3연구동 착공 버튼을 누르는 김철우 부사장.
포항제철 기술연구소 3연구동 착공 버튼을 누르는 김철우 부사장.
신격호와 접촉하는 동안 ‘대한중석 박태준 사장’과 만난 사실을 알리지 않고 있던 김철우가 전격적으로 신격호에게 박태준을 소개한 때는 1967년 어느 봄날이었다. 신격호의 회고를 더 들어보자.

<K박사가 나를 찾는다는 전갈이 왔다. 나는 순간 의아해했다. 이때까지 내 쪽에서 K박사를 청했으면 청했지 K박사가 나를 청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중대한 일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런 생각을 하고 약속 장소인 동경대학으로 가면서도 나는 은근히 ‘무슨 일일까?’ 궁금해 했다.

동경대학에 도착하여 K박사의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아! 저 사람 때문에 나를 이곳으로 불렀구나’ 하고 느꼈다. 그곳에는 짙은 눈썹에 형형한 눈빛을 하고 있는 호랑이 같은 인상의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마치 거대한 산이 버티고 앉아 있는 듯한 강렬한 느낌을 주었다. 그가 바로 박태준이었다.

그날 밤, 우리 세 사람은 밤을 새우며 얘기를 나눴다. 그러는 동안 나도 모르게 점차 그에게 이끌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은 내가 그의 신념에 찬 어조와 장부다운 기백에 이끌린 것만이 아니라, 마치 계곡을 흐르는 물처럼 맑은 서로의 교감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박태준은 나에게 담백하고 솔직한 사람이라는 첫인상을 남겼다. 그 느낌은 20년이 훨씬 지난 오늘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그는 산중의 물처럼 맑고 깨끗한 사람이다. 그러나 노자(老子)가 얘기하는 물처럼 그는 자기를 고집하지 않는다. 노자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고 했거니와 만물을 이롭게 해줄 뿐 결코 다투지 않는 물처럼, 그는 오늘날까지 자기를 고집하지 않으면서도 결코 자신을 잃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어떤 일본인은 그를 ‘고대 무사풍(武士風)의 인물’이라고 평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그를 잘 모르는 데에서 나온 말이다.

그렇게 박태준과 나와의 첫 대면은 퍽 인상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그때 자신이 종합제철소의 기획 및 건설 책임자로 ‘내정’되어 있다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그의 설명을 들은 나는 그동안 조사해 두었던 자료를 그에게 넘겼다.

박태준을 만나기 이전에 종합체철소 건설 프로젝트에 매진하고 있었던 나는 아주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것은 미국에서 제철소 건설을 맡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일은 내게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박태준과 나의 인연을 맺게 해주려는 하늘의 배려로 생겨났던 사건인지도 몰랐다. 하여튼 나는 미국측의 프로젝트를 면밀히 검토해 보기로 했다.>
경제기획원 내에 구성되었던 종합제철사업계획서 작성 전담반.
경제기획원 내에 구성되었던 종합제철사업계획서 작성 전담반.
박정희와 박태준, 한국 관료들과 미국 코퍼스사의 포이 및 세계은행, 이후락과 신격호. 이렇게 1965년 하반기부터 1967년 상반기에 걸쳐 한국의 지도력은 종합제철 건설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답답하고 막연해도 그들의 마음은 바빴을 것이다. 오리가 몸통을 물속으로 빠뜨리지 않기 위해 물속의 두 발을 분주히 젓고 있는 것처럼, 종합제철이 수면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사태를 막기 위해 흡사 그렇게 마음들을 젓고 있었을 것이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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