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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박정희의 주목을 받은 박태준의 수학 실력 - 2014년 7월 29일 [프리미엄 조선 연재]
등록일 : 2016-03-17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291

위대한 만남-박정희와 박태준(5) 


박정희의 주목을 받은 박태준의 수학 실력


“……견딜 수 없는 바를 견디고 참을 수 없는 바를 참아갑시다.”


일본 왕 히로히토의 저 목소리가 라디오 전파에 실린 것은 1945년 8월 15일 정오였다. 이른바 ‘무조건 항복’ 선언. 이것을 박태준은 일본 산골의 온천마을에서 들었다. 와세다대학 기계공학과 1학년에 다니다가 도쿄를 아비규환의 불바다로 만드는 미군 대공습을 피해 산골로 와서 방공호 따위나 파며 견뎌내는 중이었다. ‘조센진 청년’이 견딜 수 없고 참을 수 없는 것은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북받치는 감격이었다.


1945년 가을에 박태준 가족은 가장(家長)의 솔가를 따라 ‘되찾은 빛’이 비치는 광복의 땅, 고향(현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으로 돌아왔다. 그때 박태준은 만18세. 신체도 정신도 청년의 기골을 완성하고 있었다. 세밑에 그는 상경했다. 서울 거리는 시위인파가 휩쓸고 있었다. 1945년 12월 27일 보도된 모스크바협정(모스크바 3상회의)에 5년 동안 조선을 신탁통치 한다는 내용이 포함된 것이었다.



서울에서 학업의 길도 취업의 길도 찾지 못한 박태준은 스스로 현해탄을 건너갔다. 일본에서 대학을 마치고 실력을 갖춘 인재가 되어 조국으로 돌아와 동량이 되겠다는 계획이었다. 1946년 봄, 그는 도쿄에 도착했다. 도쿄 역시 서울에 못잖은 아수라장이었다. 도쿄에서도 학구열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학을 작파한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1947년 가을과 겨울을 집에서 칩거했다.


1943년 학창시절의 박태준.
1943년 학창시절의 박태준.



1948년 새봄, 어느덧 박태준은 스무 살을 넘어섰다. 해방을 맞았을 때보다 세상을 읽어내는 눈이 한층 더 밝아졌다. 이제 그의 시선은 분단 확정의 초읽기에 몰린 신생독립 조국의 초췌한 몰골을 외면할 수 없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그는 부산의 국방경비대를 택했다. 병사들 중에 사관학교 후보생을 발탁한다는 것이 매력적인 유혹이었다.


“아버지. 군인이 되겠습니다. 건국(建國)에는 반드시 건군(建軍)이 있어야 합니다. 국가를 위해 뜻 있는 일을 하겠습니다.”


박태준의 새로운 삶을 맞아준 부산 국방경비대. 그러나 박정희는 그곳에 없었다. 천 리나 떨어진 서울 태릉의 남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전신)에서 속성 장교들을 길러내고 있었다.


1944년 만주군 시절의 박정희.
1944년 만주군 시절의 박정희.



박태준보다 정확히 열 살 많은 박정희. 서로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단 한 번 옷깃이 스친 적도 없는 두 사내의 첫 만남이 이뤄질 수 있을 것인가? 인생이 인연의 자계(磁界) 안에서 이뤄지거늘, 박정희의 인생을 위해서든 박태준의 인생을 위해서든, 장차 두 사내가 가슴에 품게 되는 새로운 시대의 개벽을 위해서든, 불가사의한 운명이라는 것이 개입한다면 미상불 두 사내는 돈독한 인연을 맺게 될 것이었다.


박태준이 부산 국방경비대를 떠나 남조선경비사관학교 6기생(277명)으로 입교한 때는 1948년 5월 6일이었다. 5기까지는 학병으로 일본군대를 체험했거나 일본군 장교 경력을 지닌 ‘군인 출신’이 대다수였으나, 6기는 국방경비대의 하사관이나 사병 중에서 선발했다. 해방 조국에서 처음 군복을 입은 청년들, 그래서 그들은 ‘메이드 인 코리아’라 부르며 자부심을 뽐내기도 했다.


 

조선경비사관학교 교문(태릉).
조선경비사관학교 교문(태릉).


조선경비사관학교 본부건물.
조선경비사관학교 본부건물.


최초의 메이드 인 코리아 장교. 그러나 장교가 되기에는 한참 모자라는 청년들을 메이드 인 코리아 장교들로 길러내는 교사 역할은 일본군 출신의 한국인(조선인) 장교들이 맡아야 했다. 그들 중에 박정희가 있었다. 


1946년 6월 15일 제1기생 졸업기념 사진. 박정희 등이 45일간 교육을 받고 한국군 장교로 거듭났다.
1946년 6월 15일 제1기생 졸업기념 사진. 박정희 등이 45일간 교육을 받고 한국군 장교로 거듭났다.



박태준이 남조선경비사관학교 6기생으로 들어간 1948년 5월, 박정희는 1중대장이었다. 박태준은 강창선의 2중대 소속이었다. 드디어 박정희와 박태준이 처음 마주칠 시간이 다가왔다. 그 장면은 어떠했을까? 이대환의 『박태준』 평전은 이렇게 묘사한다.


<탄도학 첫 시간. 강의실에 들어서는 박정희 교관을 쳐다본 순간, 박태준은 싸늘한 새벽 공기가 앞문으로 불어 닥치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신선한 긴장감으로 돋아났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자세를 빳빳이 고쳐 앉았다. 깐깐하게 생긴 교관의 작은 체구는 온통 강한 의지로 똘똘 뭉쳐진 것 같았다. 강의실 공기가 삽시간에 팽팽해졌다. 목소리도 카랑카랑했다.


탄도학은 대다수 생도들에게 버거운 과목이었다. 탄도궤적 계산법에는 해석기하학, 미분, 삼각함수 등 각종 수학 원리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강의 중간에 박정희가 어려운 문제를 칠판에 적었다.


“어느 생도가 나와서 풀어보겠나?”


아무도 선뜻 손을 들지 않았다.


“자원이 없으면 지명해야지.”


강의실을 탐조등처럼 훑어나가던 교관의 시선이 박태준 생도의 동공에 딱 머물렀다. 수학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박태준에겐 벅찬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를 술술 풀어내자 교관의 차가운 얼굴에 살짝 미소가 피었다. 무언의 칭찬 같았다.


그날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이었다. 박태준은 복도에서 박정희와 스치듯 지나쳤다. 생도가 거수경례를 붙였다.


“탄도학 문제를 푼 생도로군.”


교관이 미소를 지었다. 이번엔 눈웃음도 곁들였다.


중대장 박정희는 생도 박태준의 영혼을 건드렸다. 그는 박정희가 비범해 보였다. 무언가 속이 꽉 차고 굉장히 무거운 사람이라는 첫인상을 받았다. 그것이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박정희가 내무반을 사열하러 실내에 들어서면 갑자기 어떤 기운이 꿈틀대는 것을, 그는 번번이 느낄 수 있었다.


박정희와 박태준은 키가 작았다. 164센티미터와 165센티미터. 체격은 박정희가 마른 편이고 박태준은 다부진 편이었다. 얼굴 생김새도 체격처럼 달랐다. 그런데 사내와 사내, 선배와 후배, 스승과 제자, 상관과 부하의 인간관계에서, 그것을 초월하는 동지적 인간관계에서 신체와 생김새 따위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그들의 시대는 술잔을 얼마나 함께 기울일 수 있느냐가 훨씬 더 중요했다. 술자리는 인생을 살아가는 신념과 정신, 당대를 감당해 나가는 비전과 이상에 대한 확인과 공감의 자리였다.

과연 박정희와 박태준은 어느 날부터 그 술잔을 숱하게 주고받을 것인가.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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