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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만 사나이들<下> [2004년 12월 01일]
등록일 : 2014-07-28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613



▶ 포스코 초기에 필자(左)가 현장사무소인 롬멜하우스에서 창업요원들과 공사 현안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안병화와 노중열은 모두 영어 실력이 빼어났다. 그러나 밥 짓는 솜씨는 단연 안병화가 뛰어났다. 1969년 2월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과 협상할 때 우리는 출장비를 아끼느라 미국 피츠버그의 살림집에 진을 쳤다. 차관을 끌어내지 못했지만 우리는 안병화가 지은 맛있는 밥을 실컷 얻어먹었다.

이들은 대한중석 때부터 운명을 같이한 창업동지다.

통역장교 출신의 안병화가 대한중석에 먼저 와 있었다. 노중열은 황경노의 추천을 받아 내가 대한중석으로 불렀다. 그는 미 육군경리학교를 다닌 공인회계사였다.

포스코로 옮기면서 노중열은 외국계약부장, 안병화는 업무부장으로 출발했다.

포스코를 적은 비용을 들여 최고의 회사로 지으려면 노중열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는 외국인과 협상할 때 밀고 당기기를 귀신처럼 해냈다. 10여년간 무르익은 협상 솜씨가 완숙의 경지에 이른 곳이 광양제철소였다. 이 무렵 국제컨소시엄끼리 입찰이 붙었는데, 노중열은 컨소시엄마다 최저가격으로 공급할 회사만 따로 빼내 새 컨소시엄을 만들더니 당초 가격의 60% 선에서 낙찰시키는 솜씨를 발휘했다.

노중열은 외국회사와 흥정할 때 나름대로 '십계명'을 정해놓았다고 한다. "포스코는 반드시 약속을 지킨다는 것을 보여주라. 의견이 상반돼도 신사적으로 대하라…." 그는 어떻게 알아냈는지 상대방 외국인의 장단점을 파악해 협상 때마다 요긴하게 써먹었다.

업무관리에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온 안병화는 85년 3월 포스코 제3대 사장에 취임했다. 건강 문제로 물러나는 고준식 사장의 뒤를 이었다. 당시 포스코는 포항과 광양의 '1사 2제철소 체제'를 정착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쓸 때였다. 광양제철소 1기 공사를 하면서 2기 건설을 준비하고, 포항공대까지 설립해야 하는 시기였다. 안 사장은 이런 복잡한 일들을 오차 없이 마무리했다. 87년 재무부의 주식 장외매각 계획도 그는 사표를 쓸 각오로 막아냈다.

대한중석에서 내 비서실장을 하던 곽증도 포항제철로 왔다. 전북 김제 출신인 그는 한마디로 '정직한 신사'였다. 비서실장은 공정해야 하며, 편향된 정보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 박정희 의장 비서실장을 지낸 내가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안다. 내가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데 곽 실장의 공평무사한 자세가 큰 도움이 됐다.

창업요원은 아니지만 정명식의 노고도 컸다. 70년 입사해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의 건설본부장을 역임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황경노의 뒤를 이어 회장을 지내고 포항공대 재단이사장으로 퇴임했다.

대한중석에서 상동광산 소장을 하던 박종태는 특이한 인물이다. 나는 '대한중석을 위해 한 명은 남겨야 한다'는 심정으로 그를 빼내지 않았는데, 기어이 제 발로 포항을 찾아왔다. 금속학을 전공한 그는 뚝심 있고 성품이 좋아 '소(牛)'로 통했다. 나는 그를 포철 소장으로 내려보냈다. 역시 기대했던 대로 모래바람 몰아치는 롬멜하우스에서 터줏대감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가장 힘겨웠던 포항 1기 공사가 끝난 뒤 나는 박종태를 본사 기술본부장으로 빼내 좀 편하게 지내도록 했다. 그러나 이 친구는 그게 불만이었는지 제 발로 나가고 말았다. 요즘도 만나면 내가 나무란다. "이봐. 자네는 우리가 300만t쯤 하고 치우는 줄 알고 도망갔지? 자네가 아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 이러면 박종태는 씩 웃기만 한다.

이렇게 그립고도 고마운 영일만 사나이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2004년 12월 01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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