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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기업 [2004년 11월 28일]
등록일 : 2014-07-28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126


▶ 정부의 편법 매각 움직임을 뿌리치고 포스코 주식은 1988년 6월 국민주로 상장됐다.


1993년 6월 1일 나는 일본 도쿄여대 부속병원에 누워 '포철 공로주를 받았다면 내 재산이 얼마나 됐을까'를 처음 생각해 보았다. 그날 내 재산이 360억원이라며 한국 국세청이 부정축재자처럼 매도했기 때문이었다. 4년 뒤 국회의원에 당선돼 신고한 재산이 관보(官報)에 나온 대로 36억원이었으니, 국세청 발표가 얼마나 엉터리였는지는 시간이 증명해 주었다.

인생 황금기 25년을 포스코에 몽땅 바친 공로가 손톱만큼만 인정됐어도 내 재산은 36억원의 몇 배를 넘었을 것이다.

한편으론 쫓겨난 임원들을 생각하니 미안하기 그지 없었다. 그렇게 고생하고도 나와 똑같이 빈손으로 쫓겨난 창업 멤버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포스코 주식을 공개할 때 우리가 왜 정부와 맞서면서까지 그렇게 속을 끓였는지 허망한 생각마저 들었다.

85년에 나는 발행 주식의 20%를 사원에게 주는 '사원지주제' 도입을 건의했다. 이 제안은 정부에 의해 부결됐다.

2년 더 기다려 주총에서 '기업공개 때 사원에게 10%의 주식을 배당한다'고 결정했다. 그런데 87년 3월 하순 재무장관이 "과열된 증시 안정을 위해 포철 주식을 장외시장에서 입찰 방식으로 매각하겠다"고 발표했다. 즉각 몇몇 재벌이 군침을 흘리며 달려들었다. 포철을 손아귀에 넣는 기업은 곧바로 한국 재계 1위로 등극할 상황이었다. 특히 SK가 재빨리 움직였다. 80년대 초반 유공을 가져가는 등 SK는 공기업 인수에 남다른 수완을 보인 그룹이 아닌가.

우리는 특단의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우선 여론부터 끌어들이기로 했고, 이것마저 실패하면 내가 직접 청와대와 담판짓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재무를 맡은 박득표 부사장과 홍보 담당자들을 불렀다. 그들도 포스코를 특정 재벌에 변칙 매각해 대선 자금을 마련하려는 게 아니냐며 우려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지시했다.

"선열의 피로 만든 회사야. 정치 논리에 따라 통째로 먹히는 일은 막아야 해."

이대공.윤석만.조용경. 포스코 홍보라인의 맹장들이 맨 먼저 언론사로 뛰어나갔다. 막강한 정부와 상대하는 매우 위험한 게임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몸을 던졌다. 언론사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포스코의 어려운 처지와 한국 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호소했다.

언론은 곧바로 포스코의 손을 들어줬다. 사설.특집기사.해설기사로 재무부 결정을 공격했다. 민족기업 포스코를 지키는 데 언론이 앞장서서 두 팔을 걷어붙인 격이었다. 여기에다 당시 어수선한 정치 상황도 한몫했다. '호헌'과 '직선쟁취' 구호가 거리에서 맞부닥치면서 권부는 포스코 매각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다.

하루는 재무부 공보관이 포스코에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조용히 있어라. 안 그러면 다친다"고 말했다. 포스코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홍보 책임자는 "당신이 건 전화 내용까지 모두 언론에 공개하겠다"고 맞섰다.

결국 재무부는 한 달 만에 꼬리를 내렸다. 포스코를 투명하게 공개한다는 방침에 따라 포스코 주식은 88년 6월에 국민주로 상장됐다. 포스코 사원에게는 10%인 약 920만 주가 돌아갔다.

요즘도 나는 퇴역한 동지들의 생활에 여간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포스코의 창업과 성장에 큰 몫을 한 그들 중 누구 하나라도 생활이 어렵다는 소문이 들리면 나도 모르게 신경이 곤두선다. 흡사 나를 흉보는 소리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2004년 11월 28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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