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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효자의 한 [2004년 11월 25일]
등록일 : 2014-07-28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045



▶ 어머니 장례식날 맏상주인 필자가 영정을 든 아들을 앞세우고 장지로 향하고 있다.


이 세상에 태어나 어떤 길을 걸어왔든 일흔 고개를 넘기면 아쉬움과 한(恨)이 남을 수밖에 없다. 내 가슴엔 아버지와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스러움이 쇳조각처럼 박혀 있다.

아버지는 유난히 경우가 바르면서도 '호주가'로 통할 만큼 술을 좋아하셨다. 이 점은 부전자전이란 생각이 든다. 일제 말기에는 6남매의 장남(필자)을 일본 육사나 일본군에 보내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하셨다. 내가 우리 육사(남조선경비사관학교)에 들어갔을 때도 크게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런 분이 한국전쟁으로 장남이 곧바로 포탄이 빗발치는 최일선에 투입되자 아예 체념을 하셨다. 그 후로는 "첫째는 나라에 바쳤다"고 선언하고는 집안일에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쓰셨다.

1981년 5월 나는 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소식이었다. "의사가 오늘을 넘기기 어렵다고 해 모두 모여 있다. 갑자기 아버지가 몸을 일으켜 몇 시간이나 자식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느낌이 이상하다…."

촛불의 최후 같은 게 아닐까. 나는 이런 걱정이 들어 당장 부산으로 내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포스코 사장이던 나는 국회 재정경제위원장과 한.일의원연맹의 한국 측 대표를 겸하고 있었다. 마침 그날 저녁에는 차기 일본 총리로 유력시 되던 아베 신타로 자민당 의원과의 약속이 있었다. 우리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하는 상황에서 일본 정계 지도자에게 해야 할 아쉬운 소리가 적지 않았다. 아버지는 바로 그날 밤 80세로 눈을 감으셨다.

동생들이 유언을 전했다. "울지 마라. 나는 열심히 살았고, 이제 갈 길을 간다. 언젠가 너희도 올 텐데, 울지 마라." 그래도 향리 뒷산에 당신을 묻는 나는 자꾸만 눈물이 났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 장남을 챙기고, 중위 시절 늑막염에 걸린 아들을 업고 병원으로 뛰어다니던 분이셨다.

어머니는 94년 10월에 여의었다. 집안 기둥인 장남은 해외 유랑길에 올라 있었다. 당신이 생을 놓는 시간에 우리 부부는 홍콩으로 가는 비행기에 있었다. 하필이면 막내 외손자 백일잔치에 참석하러 가는 길이었다. 미국계 증권회사 홍콩 부지점장으로 있던 막내 사위는 외국을 떠도는 장인과 장모를 모시겠다며 우리 부부를 불렀다. 그러나 홍콩에 내리자마자 당장 귀국 비행기를 잡아야 했다.

내가 유랑길에 오른 뒤 어머니는 장남이 무슨 '대역죄인'이나 되는 것으로 오해했다. 나뿐만 아니라 당신의 피붙이들이 모두 샅샅이 조사를 받았으니, 왜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겠는가. 93년 봄 내가 일본에서 장기 입원하자 "자식의 억울함을 대신하겠다"며 단식까지 하셨다. 아내가 부랴부랴 달려가 눈물로 단식을 만류해야 했다.

임종 소식을 들은 나는 "어머니의 빈소를 지키기 위해 감옥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며 김해공항에 내렸다. 맏상주를 기다리느라 아직 관을 덮지 못한 당신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땐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너무 기가 막히면 눈물조차 말라버리는 것일까. '맏이에 대한 그리움'으로 앙상해진 당신의 가슴을 보았다. '나 때문에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는 생각이 스치자 슬픔과 회한의 둑이 한꺼번에 무너져내렸다. 88세였다.

어머니는 13년 동안 마을 뒷산에서 외롭게 기다려온 아버지 곁으로 돌아갔다. 58년 연대장 시절에 갈라터진 당신의 열 손가락에 미제 반창고를 골무처럼 감아주었던 그 불효자의 손으로 나는 관 위에 마지막 황토를 뿌렸다.


2004년 11월 25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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