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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범루'에서 [2004년 11월 24일]
등록일 : 2014-07-28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6863



▶ 하모니카를 불던 중학 시절의 필자.


1997년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지만, 내 정신력과 체력은 바닥나 있었다. 갑자기 무엇에 끌리듯 어린 시절이 그리워졌다. 그 자취를 더듬어 보고 싶었다. 그렇다면 맨 먼저 가야 할 곳은 일본 시모노세키(下關)였다.

33년 가을, 여섯 살짜리 꼬마가 관부연락선 밑바닥에서 멀미로 하룻밤을 보낸 뒤 첫 발을 디딘 시모노세키. 그곳을 꼬박 64년이 지나 일흔 살에 다시 찾은 것이다. 마침 나카소네 총리 시절에 관방장관을 지낸 와타나베 히데오가 나를 반겼다.

어머니 손을 잡고 부두를 벗어나 기차를 탔던 것 같다. '그렇다면 시모노세키 항구에 내린 우리 모자는 기차역이 있는 왼쪽 방향으로 걸어갔겠구나'. 나는 까맣게 지워진 옛 기억을 더듬었다.

시모노세키 역 부근에는 춘범루(春帆樓)라는 유서 깊은 식당이 있다. 일본 정부가 최초로 허가한 복어요리 식당이다. 이 춘범루가 어떤 곳인가.

청일전쟁 직후인 1895년 4월,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와 청나라의 리흥장(李鴻章)이 '시모노세키 강화조약'을 맺은 역사적 현장이다. 조선의 운명은 이렇게 남의 손에 의해 나락으로 떨어졌다.

나는 춘범루 4층의 그 방을 찾았다. 이토와 리흥장이 102년 전에 먹었을 복어회도 시켰다. 하얗고 반투명한 복어회를 한 점 집으면서 나는 묘한 감회에 젖었다.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가슴에 꽂힌 금배지를 바라보았다.

정치인이 잘못하면 그 나라는 치욕을 겪게 마련이다. 이제부터 금배지 값을 제대로 해야겠다는 각오를 세웠다. 옛 역사의 현장에 앉아 보니, 다 타버린 정신력이 되살아나고 머리도 한결 맑아진 느낌이었다.

다시 길을 더듬어 아다미를 찾았다. 나의 아버지가 철도 공사를 한 이곳은 일본의 대표적인 온천지대다. 아버지는 온천수가 뚝뚝 떨어지는 위험한 터널 공사장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다.

당시 아버지는 '터널토목'에서 알아주는 기술자였다. 어릴 적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아버지, 왜 이런 옷을 입어요?" 어린 고사리손이 아버지의 비옷 같은 시커먼 고무 옷을 만졌다. "그래, 요놈아. 터널에서 자주 온천수가 터져 나오거든. 그래서 무겁고 불편하더라도 이런 옷을 입을 수밖에 없는 거야." 아버지는 나에게 그처럼 살뜰했다.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배우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셨다.

그 덕분에 나는 무럭무럭 자랐다.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 앞바다에서 5리쯤 떨어진 섬까지 왕복하는 원영(遠泳)대회에 나갔다. 왕복에 성공하면 흰 모자에 검은 띠 한 개를 받았다.

그해 여름 나는 두 개의 검은 띠를 달았다. 아홉살짜리 식민지 아이의 생존을 위한 방어본능이 이를 악물고 그 먼 거리를 헤엄치게 한 것이다.

몇 년 뒤 수력발전소 현장에서 일하게 된 아버지를 따라 우리 가족은 나가노현 이야마로 옮겼다. 나가노는 일본 스키의 본고장이다. 아버지는 나에게 스키를 배우게 했다. 6학년 때 나는 학교 스키 대표선수가 됐다. 활강과 점프에서 나를 따라올 친구는 없었다.

중학교 때는 아버지의 권유로 유도를 배웠다. 혼자서 쓸쓸히 하모니카를 불던 사춘기 식민지 소년이 유도 유단자(2단)에 올랐고 후지산도 정복했다. 일본 친구들도 함부로 깔보지 못할 만큼 내 체력은 강하고 탄탄해졌다. 이런 기초체력이 있었기에 험난한 군대시절을 견디고, 포스코를 세울 수 있었을 것이다. 나이 일흔에 다시 더듬어본 일본의 추억여행. 나는 몸과 마음을 재충전하고 돌아왔다.


2004년 11월 24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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