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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눈물 [2004년 11월 23일]
등록일 : 2014-07-28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780



▶ 포항 보궐선거에 출마한 필자가 손을 들어 유권자의 환호에 답하고 있다.



1997년 5월 초순. 포항 보궐선거를 준비하면서 나는 5년 전 시민에게 제시한 '영일만 구상'을 떠올렸다. 포항을 중심으로 일본.러시아.북한 등 동해안을 아우르는 환(環) 동해권 구상이었다. 이것은 미래의 포항이 살아나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또 영일만 구상에는 오랫동안 묵묵히 포스코에 협조해준 포항시민에 대한 보은의 뜻이 담겨 있었다.

92년 10월까지 장장 25년의 포스코 대역사 동안 나는 한눈 팔 틈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지역사회의 세세한 곳까지 따뜻한 시선을 보낼 여유도 없었다. 특히 초창기의 포스코는 오직 전진해야 한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 때문에 80년대 한때 포스코와 포항시민은 불편한 관계에 놓이기도 했다. 하필 표현도 '강남-강북'이었다. 포스코가 형산강 너머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보궐 선거운동은 무더위 속에서 진행됐다. '세계적 철강인이자 실물경제의 대가'라는 나의 이미지는 양날의 칼이었다. 이런 이미지는 한편으론 나에 대한 유권자의 기대를 불러일으켰지만, 다른 한편으론 나를 멀어 보이게 할 마이너스 요인이기도 했다. 나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몸으로 때워야 했다. 마주치는 유권자를 붙잡고 영일만 구상이 왜 필요한지 목이 쉬도록 설득했다.

아내도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새벽부터 자정이 넘도록 뛰어다녔다. 서울.호남 등 각지에서 달려온 자원봉사자도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힘을 보태주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내 마음에 큰 상처를 남기는 흑색선전이 튀어나왔다. 누군가가 3년 전에 돌아가신 나의 모친을 일본 여자라고 소문낸 것이다. 나를 친일분자로 몰아가려는 수작이었다. 내가 지일(知日).용일(用日).극일(克日)을 좇았지, 친일(親日)은 철저히 배격해 왔다는 것을 포항시민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투표일을 하루 앞둔 7월 23일 아내가 병원으로 실려갔다. 자원봉사자들과 민가에서 회의를 하는데 상대편 젊은이들이 담을 넘어 쳐들어온 것이다. 일흔을 코앞에 둔 아내가 맨손으로 맞섰으니, 큰 곤욕을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음날 아내는 기어이 휠체어를 타고 투표를 했다. "당장 한 표가 아쉬운데 병원에 누워있을 수는 없다"고 우겼다.

투표 결과 나는 50%에 가까운 몰표를 얻었고, 차점자와는 1만2000여표의 격차가 났다. 5년 전에 쫓겨난 나를 포항시민들이 다시 한번 따뜻하게 안아준 것이다. 나는 마음 속으로 수없이 포항시민들에 대한 보은을 다짐했다.

여의도에 가서 금배지를 받은 나는 곧바로 포항으로 내려갔다. 공항에 마중나온 축하객들이 내 가슴에 금배지가 안 보인다며 의아해 했다. 나는 말없이 병원으로 직행했다. 보름쯤 입원해야 한다는 진단을 받은 아내는 초췌한 몰골로 병상에 누워 있었다.

"이 배지는 당신이 달아줘." 내가 금배지를 아내에게 내밀었다. 주위 시선이 많기 때문인지 아내는 한발 뺐다. "당신이 다세요." "이건 당신 손으로 안 달아주면 의미가 없어. 형산강에 던져 버려?" 그제야 아내가 상반신을 일으켰다. 나는 아내의 눈에 이슬이 맺히는 것을 보았다. 4년 넘게 해외 유랑생활을 하면서 겪었던 온갖 설움과 회한이 북받쳤을 터였다. 아내가 내 신사복의 왼쪽 가슴에 금배지를 달아준 순간, 병실은 온통 울음바다가 되었다. 나도 답답하기 짝이 없었는데, 하물며 4년간 말없이 옆에서 지켜보던 아내의 가슴 또한 얼마나 멍이 들었을까.


2004년 11월 23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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