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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주영 회장 [2004년 11월 18일]
등록일 : 2014-07-28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956


▶ 1998년 1월 자민련 총재인 필자와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右)이 주한외국인 신년하례회에서 자리를 함께 했다.



포스코의 최대 고객이 누구인가. 단연 현대그룹이다. 선박을 만드는 현대중공업은 중후판, 차량을 생산하는 현대자동차는 냉연강판의 단골 고객이었다.

현대 정주영 회장은 재계의 거목다웠다. 제2제철 싸움 때 정 회장은 맞서기 힘겨운 상대였다. 민간기업의 효율성을 내세워 제철산업에도 경쟁을 도입해야 한다는 치밀한 논리로 포스코를 압박했다.

정면승부를 걸어온 것도 아니었다. 정 회장은 청와대 비서실장과 경제수석 등을 설득해 자기편으로 끌어들였고, 나는 상공부 장관을 비롯한 각료들을 우군으로 삼아 맞섰다. 말하자면 대리전을 치른 셈이었다. 그래서인지 혈전 뒤의 후유증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우리는 여전히 단골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정 회장은 결정적인 순간에 귀를 열 줄 아는 경영인이었다. 1971년 정 회장이 은밀히 나를 찾아왔다. "밖에는 처음 꺼내는 말인데… 조선소를 세우려 합니다. 어디가 좋겠습니까?" 나는 깜짝 놀랐다. "조선소는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런데 나룻배가 아니라면 쇳물이 많이 들 텐데요…."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오랫동안 대화가 오갔다. 정 회장은 이날 회동에서 현대중공업의 위치를 울산으로 결심했다. "조선소 물류 원가를 줄이려면 포항에서 멀리 떨어지면 안 된다"는 내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울산이라면 포스코 중후판을 바지선에 싣고 값싸게 실어나를 적지였다.

74년 현대자동차 종합공장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정 회장은 미리 자문했고, 나는 망설이지 않고 울산을 추천했다.

오늘날 현대 공장이 울산에 밀집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지고 보면 현대의 주력사업은 포스코와 떼놓을 수 없는 업종들이었다. 정 회장이 결정적인 판단에 앞서 자주 나의 의견을 구한 것도 이 때문이다. 물론 포스코는 사전에 귀띔받은 덕분에 미리미리 준비할 수 있어 좋았다. 앞을 내다보고 중후판이나 냉연강판 생산설비를 일찌감치 갖추어 놓았다.

이처럼 포스코와 현대는 기본적으로 공생관계였다. 현대가 성장할수록 포스코의 판로는 넓어졌고, 현대 역시 포스코에서 싼값에 양질의 철강을 공급받아 쭉쭉 커 나갔다.

정 회장과 내가 다시 만난 곳은 정치판이었다. 정 회장이 92년 국민당을 만들어 갑자기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이다. 당시 나는 정치에서 손떼겠다며 일본에 건너가 있었다. 나를 향한 정주영 후보의 구애공세는 집요했다. 자신이 내건 '경제대통령'에 걸맞은 유일한 파트너라고 했다. 그해 11월 중순에는 편지를 지참한 특보를 도쿄로 보내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정 후보가 내민 손을 뿌리치고 중립을 지켰다. 그럼에도 국민당은 "박 의원이 일본에서 입당 발표를 할 것"이라는 엉터리 주장을 내놓았다. 나는 곤혹스러웠지만 참아야 했다. 정 후보도 나의 거절이 섭섭했을 것이다.

두 달쯤 흘렀을까. 대선에 패배한 정 회장이 일본으로 건너왔다. 맨손으로 굴지의 대그룹을 일군 정 회장답지 않게 초조한 표정이었다.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 서로 위로했다. 제2제철이나 정치판에서 얽힌 앙금까지 모두 흘려보냈다.

정 회장과 나는 그 뒤 오뚝이처럼 재기했다. 나는 DJT연합을 통해 다시 일어섰고, 정 회장 역시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지론처럼 경영에 복귀했다. 98년 10월 소떼를 이끌고 판문점을 넘어가는 그를 보면서 나는 또 한번 감탄했다. 2001년 3월 21일, 나는 타계한 그의 영정 앞에서 오랫동안 머리를 숙였다.


2004년 11월 18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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