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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마현 총리들 [2004년 11월 16일]
등록일 : 2014-07-28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820



▶ 포철을 방문한 후쿠다 일본 총리(왼쪽)가 필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기념휘호인 '百年製鐵'을 쓰고 있다.


일본 중북부의 군마현(群馬縣) 출신으로 총리에 오른 인물은 세 사람이다. 1970년대 막바지의 후쿠다, 1982~87년의 나카소네, 1998년에 총리가 된 오부치다. 이들 세 사람은 한때 나란히 군마현 지역구에 출마해 나이순으로 1.2.3위로 당선되기도 했다. 이것이 막가파식 대립을 막으면서 아까운 인재도 놓치지 않는 일본식 중대선거구제의 장점이었다.

군마현의 세 총리는 나와 절친한 관계를 맺었다. 후쿠다는 22년 연상이고, 나카소네는 9살 위, 오부치는 나보다 아래였다. 두 선배와는 69년 일본열도에서 대일 청구권자금 막후교섭을 벌일 때 본격적으로 사귀었다.

당시 후쿠다는 막강한 대장성 대신, 나카소네는 운수 대신이었다. 후쿠다와 첫 만남에선 포철 건설 자금이 주요 화제였지만, 군마현이란 지리적 특수성도 괜찮은 양념 역할을 했다. 나는 와세다대에 다니던 45년 여름 군마현의 유명한 온천지대로 소개(疏開)된 적이 있었다. 이곳은 험한 산으로 둘러싸여 미군 폭격에서 안전한 동네였다. 내가 그때 접한 수려한 산세와 온천을 부러워했더니 후쿠다도 아주 즐거워했다. 어디 고향 자랑 싫어할 사람이 있겠는가.

이런 인연으로 후쿠다와 나카소네는 대일 청구권 자금이 포철에 지원될 수 있도록 일본 내각의 분위기를 돌리는 데 앞장서 주었다.

특이한 점은 인생의 두 선배가 한결같이 언제.어디서나 나를 '박 선생'이라 불러준 것이다. 포스코가 갓 걸음마를 떼던 어려운 시절이나 시간이 흘러 포스코가 승승장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후배에게 호칭 하나에도 각별히 신경을 써준 선배들이다.

후쿠다 총리가 갑자기 영일만까지 날아온 것은 79년 6월. 나는 작업복 차림으로 현장을 돌아다니다 연락을 받았다. 일본 총리가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포철 방문은 공식 일정에 잡혀 있지 않았다.

급히 포항 해병사단 비행장으로 영접을 나갔다. 박정희 대통령이 마련해준 비행기를 타고 온 후쿠다 총리는 작업복 차림의 나를 얼른 발견하지 못했다. 그는 박 대통령이 "편히 가보고 싶은 곳이 어디냐"고 묻기에 두 말 않고 "포철에 가서 박 선생을 만나고 싶다"고 했다며 나를 얼싸안았다.

포철을 세우는 데 자신도 한몫한 때문인지 후쿠다 총리는 포철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현장을 두루 돌아다니며 "뭘 더 도울 게 없느냐"고 몇 번씩이나 물었다. 그는 '포철의 영원을 바란다'는 뜻으로 '百年製鐵(백년제철)'이란 기념 휘호를 남기고 떠났다.

나카소네는 통산 대신으로 있던 1972년 포철을 찾은 데 이어 은퇴한 뒤에도 광양만과 영일만을 방문했다. 나는 82년 말 나카소네에게 톡톡히 신세를 졌다. 당시 한국은 마이너스 성장에서 간신히 빠져 나와 일본에 경협자금을 요청했다. 나는 한.일의원연맹 한국 측 대표로 나카소네 총리를 만나러 도쿄로 갔다. 명함에 적힌 직함은 허울일 뿐 믿을 것은 우리의 인간관계뿐이었다. 다행히 나카소네는 나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이듬해 1월 나카소네 총리가 서울을 방문해 경제협력기금 40억달러를 주기로 합의한 것이다. 이때는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파문으로 대일감정이 예민해져 있었는데, 나카소네는 공식 행사에서 한국어로 인사말을 했다.

상대방 국민에게 예의를 지키고 싶다며 숱하게 연습한 결과였다. 얼마 전에는 '정치가는 역사의 법정에 선 피고다'라는 책을 낸 나카소네. 나는 그런 나카소네의 정치적 신조를 높이 평가한다.


2004년 11월 16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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