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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년 묵은 체증 [2004년 11월 15일]
등록일 : 2014-07-28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915


▶ 자페(왼쪽)가 1988년 포철을 방문해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1986년 4월 로마에서 열린 세계철강협회(IISI) 이사회에 참석했다. 모처럼 기분이 좋았다. 만나는 철강인마다 88서울올림픽과 광양제철소의 진척 상황을 물어왔다. 다음번 제22차 IISI 정기총회는 서울에서 열기로 결정됐다.

IISI는 문턱이 높기로 유명하다. 또 철저히 자본주의적이다. 철강 생산량이 200만t을 넘어야 정회원이 될 수 있고, 연산 1000만t을 초과한 회원에겐 두 표의 의결권을 준다. 포스코는 77년에야 간신히 정회원이 될 수 있었다.

로마 이사회에서 나타난 선진국들의 입장 변화는 인상적이었다. 미국은 3년 전 빈에서 열린 IISI 이사회 때 포스코의 광양제철 건설에 가장 반대했다. 유에스스틸(USS) 로데릭 회장은 광양제철에 참여한 오스트리아와 독일 철강업계를 노골적으로 비난했고, 미국 상무성 차관도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IISI 사무총장까지 연례보고에서 "개도국의 철강 생산 점유율이 76년 6%에서 90년에는 20%까지 상승할 것"이라며 대놓고 거들었다.

그런데 불과 3년 만에 세상 인심은 달라져 있었다. 한결같이 광양제철에 호감을 표시했다. 더구나 USS의 로데릭은 로마 이사회 바로 직전에 포스코와 손잡고 내연강판공장인 UPI를 설립하지 않았는가. 역시 국제사회에선 힘이 가장 중요하다. 누가 뭐라든 힘과 실력을 갖추면 당당히 대접받고, 그렇지 않으면 불쌍해지게 마련이다.

로마에서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며 발걸음을 옮긴 곳은 런던. 국제입찰에서 광양 1기(270만t 생산 규모) 고로를 처음 낙찰받은 영국의 데이비 매키와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런던으로 가기 전 한영수 이사에게 좀 특별한 임무를 맡겼다. 영국인 자페의 연락처를 수소문해 저녁 약속을 잡아보라는 지시였다.

자페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나의 뇌리에 압정처럼 박혀 있었다. 마치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했다. 포스코가 탄생한 68년 당시 세계은행(IBRD)의 철강산업 담당자였던 자페. 그가 포스코를 '생존 불가의 미숙아'라고 판정하는 바람에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이 해체됐다. 그 바람에 한국에 올 차관이 브라질 차지가 됐다.

자페는 런던에서 컨설팅 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와 나는 오후 6시 '팡스'라는 중국식당에서 만났다. 즐거운 식사를 하다 끝 무렵에 내가 목에 걸린 가시를 끄집어냈다.

"국제차관으로 세운 브라질 제철소는 현재 400만t 수준이고, 포스코의 생산 능력은 곧 1200만t을 돌파합니다. 18년 전 당신이 내린 판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페는 미소를 머금었다. "나는 성실하고 공정하게 보고서를 썼습니다. 지금 다시 쓰더라도 결론은 똑같을 것입니다." 잠시 말을 끊은 그가 생각에 잠겼다. "…다만 그때 간과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당신입니다. 나는 포스코에 박태준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나는 잔을 들며 그에게 말했다. "아니요. 당신은 한국을 몰랐습니다. 한번 순수한 의지로 뭉치면 상식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이 포스코맨이고, 한민족입니다."

18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시원한 느낌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그를 서울올림픽에 초대했다. 자페는 88년 9월 서울에 왔다. 그는 포스코가 당당히 두 표를 행사하는 IISI 총회를 지켜본 뒤 포스코도 방문했다.


2004년 11월 15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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