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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친구들 [2004년 11월 14일]
등록일 : 2014-07-28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202



▶ 다케시타 노보루 일본 총리(右)와 필자. 1970년 처음 만난 우리는 30년동안 가슴을 터놓는 친구로 지냈다.


1993년 3월 우리 부부는 도쿄(東京) 미나토구 시바고엔의 13평짜리 좁은 아파트에 둥지를 틀었다. 일본 유랑 생활을 결심하면서부터 나는 일찌감치 예감하고 있었다. YS가 청와대를 떠난 뒤에야 비로소 귀국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장장 25년 계획으로 포스코를 건설했는데, 어찌 5년을 못 참겠는가"라며 오기를 세웠다. 문제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나는 은퇴한 노인처럼 일과를 짰다. 오전엔 독서, 점심은 왕복 1만2000보를 걸어야 하는 식당에서 했다. 돌아오는 길에 책방에 들렀다가 다시 독서, 저녁은 집이나 초대받은 자리에서 해결했다. 아카사카 거리의 '일용설렁탕'은 점심 때 자주 들른 단골집이었다. 여기서 젊은 한국인들의 깍듯한 인사를 받기도 하고, 그들은 종종 우리 내외 모르게 밥값을 대신 내기도 했다. 그런 날은 뿌듯한 포만감을 느꼈다.

하루는 붓을 잡는데 갑자기 손이 떨렸다. 내면에 감정의 파문이 있다는 뜻이었다. "글씨가 잘 안 되네…."

이 독백이 아내의 귀에 가시로 박힌 것일까. 저녁식탁에서 아내가 차분하게 말을 걸어왔다. "우리 결혼해서 신혼여행도 못 갔잖아요? 군대든 포철 25년이든 절반은 집에서 나가 계셨고…."

아내는 짐짓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때늦게 신혼생활 몇 년 해보라는 기회를 줬다고, 나는 그렇게 마음먹었어요. 당신도 같은 생각을 해보세요. 집이 좁으니 오히려 당신과 이렇게 붙어 지내 더 좋고요…."

'늙은 신랑'이 결혼생활 39년 만에 덥석 '늙은 신부'의 손을 잡았다.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나의 체면을 세워준 일본 친구가 적지 않았다. 그들은 나의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게 애쓰면서 인간적인 우정을 아끼지 않았다.

미쓰비시상사를 일본 최고기업으로 키운 뒤 은퇴한 우쓰미 기요시. "더티한 정치판에서 당신의 성품이 통하겠느냐"던 그는 자신의 염려가 현실로 나타나자 마치 자신의 일처럼 억울해 했다. 우쓰미 내외는 가끔 우리 내외를 여행에 초대했다. 우리 도시락까지 손수 마련해오는 정성을 보였다. 아내 말로는, 우쓰미 부인이 퇴직금 일부를 쪼개 우리 생활비로 들고오기도 했단다. 우리 내외는 요즘 도쿄에 가면 반드시 우쓰미와 사별해 혼자된 그 부인을 만나고 돌아온다.

93년 당시 일본 총리는 다케시타 노보루였다. 그는 나보다 세 살 위였다. 70년 초, 처음 만남에서 그는 "야스오카, 이나야마 선생이 당신과 사귀어야 한다고 충고했다"며 가슴을 열었다. 이때부터 우리는 속말을 숨기지 않는 막역한 친구가 됐다.

한때 나는 한.일의원연맹 한국 측 대표였고, 그는 일본 측 대표였다. 국가적 이해가 걸리면 한치 양보 없이 맞섰지만, 그래도 우리는 항상 손발이 맞았다. 그 무렵 그는 곧잘 이런 말을 던졌다. "내가 죽으면 당신이 우인(友人) 대표로 조사(弔辭)를 해 주시오."

누구보다 바쁜 현직 다케시타 총리는 은퇴한 노인처럼 지내는 나를 세심하게 배려했다. '정기적'으로 배달해준 '여행 티켓'에서도 그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그 티켓만 들고가면 어느 곳이든 반드시 안내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교통.숙식.일정이 다 해결되었다. 당시 다케시타의 대리인은 마쓰모토였다. 자위대 정보국 책임자에서 전역한 뒤 일본 경시청 고문으로 있던 그는 경호든 안내든 내가 조금도 불편하지 않게 처리해 주었다.

도쿄 친구들의 그 따뜻한 우정…. 가끔 울화가 치밀던 도쿄 시절에 내 마음을 다스리는 아주 좋은 보약이 되었다. '어려운 시절의 친구가 진정한 친구'라는 격언을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다.


2004년 11월 14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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