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 영상
  • 연구결과물
  • E-카다로그
  • 발전기금
  • HOME
  • 박태준의삶
  • 쇳물은 멈추지않는다
  • 인쇄
  • 글자크기
  • 확대
  • 초기화
  • 축소

게시판 List
빈의 두 친구 [2004년 11월 11일]
등록일 : 2014-07-28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118



▶ 포스코 작업복 차림의 아팔터 사장(右)이 필자에 신입사원 선서를 하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포스코(포철) 1기의 종자돈이 대일청구권 자금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때 제선.제강.압연 등 모두 19개의 공장을 지었다. 그중 유일하게 일본의 도움 없이 지은 것이 압연분야의 중후판 공장이다. 중후판은 제강공장에서 나온 굵은 철판을 조선소 납품용으로 넓고 두껍게 가공한 철판이다.

이 공장은 원래 재일동포가 대표로 있는 아사히제철이 짓기로 했으나 국제 브로커들이 농간을 부리는 바람에 도중에 무산됐다. 할 수 없이 포스코가 직접 새로운 투자자를 찾아 나서야 했다.

나는 오스트리아의 푀스트사를 파트너로 찍었다. 대한중석 사장 때 유럽을 오가며 푀스트사의 실력을 눈여겨 봤기 때문이다. 이 협상은 공장이 세워지기도 전에 우리 힘으로 첫 상업차관을 끌어오는 시험대이기도 했다.

내가 맡아야 할 상대는 두 사람이었다. 영일만에 중후판 공장 설비와 기술지원을 담당할 푀스트사의 아팔터 사장과, 여기에 들어갈 돈줄을 쥐고 있는 오스트리아 국립은행의 헬무트 하세크 총재였다.

그들도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허허벌판의 포스코에 그때 돈으로 5300만달러나 되는 거액을 빌려줬다가 날리면 어쩔 것인가. 나는 모든 게 불리한 여건에서 꾸준히 설득하면서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두 사람은 결단을 내렸다. 나중에 헬무트 하세크가 "당시로선 매우 큰 규모의 차관 제공 결정을 놓고 주변 사람들은 자살행위로 간주했다"는 글을 남겼을 정도였다.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중후판 공장이 준공된 때는 1972년 6월. 영일만에서 가장 먼저 완공된 공장이다. 나는 포철 단지에서 가장 먼저 제품을 생산하고, 가장 먼저 수익을 올려준 이 중후판 공장을 잊을 수 없다. 준공식에는 푀스트의 아팔터 사장이 빈에서 영일만까지 날아와 함께 감격을 누렸다.

이렇게 사귄 두 사람은 나와 절친한 친구가 됐다. 포스코가 휘청거릴 때마다 든든한 바람막이가 돼 주었다.

광양제철소를 준비하던 80년대 초 일본 철강업계가 교묘하게 방해 공작을 벌였다. 그들은 '부메랑 효과'를 내세워 미국.유럽 철강업계를 상대로 "포스코에 돈도 기술도 주지 말라"며 압력을 넣었다.

그때도 나의 두 친구는 광양제철에 가장 먼저 차관과 설비를 제공했다. 그것도 연 6.75%라는 금리로…. 당시 미국의 우대금리나 영국의 리보금리보다 4%포인트나 낮은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이 기준은 포스코에 두고두고 도움이 됐다. 포스코가 그 뒤 차관을 도입할 때마다 연리 7% 이하로 자금을 끌어쓸 수 있는 지표(指標)금리가 된 것이다.

그러면 이들은 포스코와의 거래에서 얼마나 벌었을까. 헬무트 하세크는 자살행위 같은 첫 차관 제공에 대해 "손해 보지 않을 수준으로 영업이 됐다"고만 했다. 그러면서 그는 "인간에게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정신적 영역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살벌한 국제 금융계에도 이처럼 가슴과 가슴이 통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아팔터 사장 역시 포스코의 성공을 진심으로 축하해줬다. 그의 애정은 80년대 초 포스코 명예사원이 되는 열성으로 이어졌다. 그는 우리 회사 작업복을 선물받더니 곧장 갈아입고 나에게 '신입사원 선서'를 하겠다고 우겼다. 기념식장은 온통 웃음바다가 됐다. 내 앞에서 그는 아이처럼 웃으며 입사 선서를 하는 자세로 사진을 찍었다. 포스코와 푀스트사의 오랜, 그리고 깊은 신뢰를 상징하는 사진이다.


2004년 11월 11일 [중앙일보 연재]


첨부파일 첨부파일 :
No File!
게시판 List
이전글 진정한 친구들 [2004년 11월 14일]
다음글 내 친구 고어 [2004년 11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