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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날리는 태극기 [2004년 11월 09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471



▶ 로데릭 USS회장(왼쪽)과 필자(오른쪽에서 둘째)가 기술협력 양해 각서에 서명하고 있다.


로데릭 USS 회장과 양해각서를 교환한 뒤 포스코와 USS의 합작투자는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1985년 12월 중순 USS와 포스코가 '피츠버그 냉연공장 합작운영 협정'을 발표했다. 합작비율은 50 대 50, 자본금은 1억8000만달러. 철강 후발주자인 포스코가 세계 최고 전통의 USS와 어깨를 나란히 한 것이다.

86년 4월 1일 UPI(USS-POSCO Industries)라는 이름의 합작회사가 공식 출범했다. 이날은 포스코 창업 18주년이기도 했다. UPI 창립식장에는 태극기와 성조기가 나란히 휘날리고 있었다. 첫 미국 여행에서 받은 그 엄청난 충격을 30년 만에 극복해 냈다는 생각에 가슴이 뭉클했다.

나는 현지 사정을 고려해 사장은 USS 측에 양보하는 대신 포스코 창업요원인 여상환을 수석부사장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UPI의 첫걸음은 가파른 오르막길이었다. 합작사업 추진 사실이 처음 공개된 85년 12월부터 미국 철강노조는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합작이 성사되면 값싼 철강 반제품이 수입돼 수많은 미 철강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는다"고 주장했다. 철강노조의 반대시위는 86년 6월까지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USS는 합작을 철회하라는 노조의 압력을 물리쳤다. 오히려 사명을 USX로 바꾼 뒤 경영 혁신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했다. 드디어 미 철강노조가 그해 8월 총파업에 돌입, 양측 대결은 전면전 양상으로 치달았다.

내가 여상환을 UPI로 보낸 이유 중의 하나는 노조 파업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포스코에서 언변이 좋기로 첫 손가락에 꼽혔다. 오죽하면 그의 성(姓)과 입담을 묶어 '여포'라는 별명이 붙었을까. 나는 친화력과 설득력이 탁월한 그를 강경한 노조 대표와 상대할 적임자로 판단했다.

적자에 허덕이던 피츠버그 냉연공장은 30년 묵은 낡은 설비들로 가득했다. 처음 공장을 방문해 받은 인상은 '마구간 같다'는 느낌이었다. 정리정돈을 강조하는 나의 '목욕론'에 비춰보면 그런 공장이 잘 될 리 없었다. 내가 갓 태어난 UPI에 설비 현대화부터 하라고 지시한 것도 이 때문이다.

한쪽에선 여상환이 UPI 노조 대표들과 끈질기게 접촉하며 노사 분규의 원인을 조사했다. 피츠버그 시장 등 지역 지도자들과도 만나 여론 정지작업을 벌였다. 여섯 달의 진통 끝에 87년 2월 노사협약을 맺는 데 성공했다. 이 협약에서 특별한 것은 'USX 노조와 연대투쟁을 하지 않는다' '어떤 경우에도 조업은 계속한다'는 두 가지였다.

노조와 대화 물꼬가 트이면서 포스코는 동양적 가치관의 접목을 시도했다. 사원 생일을 가족의 날로 정하고, 모범사원 부부는 해외여행을 보내주었다. 여상환이 UPI 직원들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을 상의해 왔다. 나는 고민하는 그에게 "고급 운동화 두 켤레와 운동복 두 벌을 주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 부부가 다정하게 운동하며 건강을 지키라는 뜻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더디지만 서서히 애사심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에 비해 UPI의 경영은 빠른 속도로 호전됐다. 포스코가 UPI에 보낸 철강 반제품은 촘촘한 덤핑 그물을 무사히 빠져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피츠버그 냉연공장이 만든 최고급 철강은 미 자동차공장으로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85년 1200만달러 적자였던 피츠버그 냉연 공장은 86년 340만달러, 87년 1500만달러의 흑자로 돌아섰다.


2004년 11월 09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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