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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2004년 11월 03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298



▶ 필자(오른쪽에서 넷째)의 안내로 포항공대 여학생 기숙사를 방문한 일본의 나카소네 전 총리(왼쪽에서 셋째). 그는 필자와 경주 요석정에서 '특별한 법주'로 대작했다.


 시절 각별한 인연을 맺었던 박병권 전 국방장관은 내게 '주호(酒豪)'라는 별명을 선사했다. 그만큼 나는 술을 좋아했다. 1965년 '한.일협정 비판 성명' 발표에 동참하기도 했던 박 선배는 "맑은 정신으로 경영하려면 뇌세포가 온전해야 한다. 과한 술은 피하라"면서도 마주치면 꼭 한잔하자는 사인을 보내왔다.

내가 언제부터 술잔을 잡았는가. 웬만큼 술을 마시기 시작한 것은 49년 경기도 포천에서 중대장으로 근무할 때였다. 당시 만주에서 막 돌아온 대대장은 꿩 사냥을 즐겼다. 그 덕분에 꿩고기 샤부샤부를 안주로 그 유명한 포천 이동막걸리를 자주 맛볼 수 있었다. 한반도에 전쟁을 불러들인 '애치슨 라인'이 발표된 날 저녁에도 청년 장교들끼리 막걸리잔을 돌렸다. 이때 맛 들인 꿩고기 샤부샤부를 포철에 근무하던 외국인 기술자들에게 한턱내는 술자리에서도 종종 선보였다.

한국전쟁 중에 접한 정말 '기막힌 술'은 소개(疏開)된 경주 시가지를 수색하다가 발견한 '경주 법주'였다. 큰 술통에 든 경주 법주는 북진을 앞둔 우리의 총반격 전야 진군 파티를 얼큰하게 만들어 주었다.

99년 가을이었나.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와 경주의 전통 한식집 '요석궁'을 찾은 적이 있다. 요석궁 주인이 진객(珍客)을 맞았다며 '특별한 법주'를 내왔다. 나는 50년 전 전쟁 통에 맛보았던 법주를 생각하며 찬찬히 음미해 보았다. 아무래도 그때 그 맛에는 못 미쳤다.

나는 지금까지 담배는 멀리했지만 술은 늘 지척에 두고 살아왔다. 까짓, 노래할 자리에선 한 곡 부르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노래를 부를라치면 친구들과 아내는 "철의 사나이라는 이미지에 안 어울리는 저음의 미성"이라고 놀렸다. 그래도 나는 얼큰한 취기 속에서 호방한 덕담이 오가는 술자리 분위기를 즐겼다.

이런 내가 68년 11월 박정희 대통령이 황량한 포항 모래벌판을 찾아온 이후 한동안 술을 딱 끊었다. "이런 데서 제철소가 되긴 되겠나"라는 박 대통령의 독백을 들은 나는 그날부터 포철 제1고로에서 첫 쇳물이 나온 73년 6월까지 한 모금의 술도 마시지 않았다. 포철을 제대로 세우려면 나부터 정신을 꼿꼿이 차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 뒤에는 다시 밀린 숙제하듯 즐겨 술을 마셨다. 지금까지 나는 술로 인해 딱 두 번 업무에 지장을 초래한 적이 있다.

74년 어느 날 포항에 내려온 박 대통령 앞에서 브리핑을 하다가 구토를 할 것 같아 후닥닥 자리를 떴다. 평생 딱 한 번 박 대통령 앞에서 저지른 큰 실수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불호령을 내리는 대신 "저 친구 좀 돌봐주라"며 대통령 주치의를 사흘이나 내 곁에 머물게 해줬다.

90년에는 술병이 들어 꼬박 하루를 누워 지낸 적이 있다. 여당 최고위원으로서 언론사 정치부장들과 함께 술을 했는데, 결과는 비참했다. 63세의 내 몸은 그 다음날 숙취로 하루종일 말을 듣지 않았다.

2001년 대수술을 받은 뒤 나는 가끔 와인이나 막걸리를 한두 잔 마실 뿐이다. 여전히 막걸리 잔을 놓지 않는 것은 희뿌연 술에 담겨 있는 젊은 날의 추억들 때문이다. 물론 철강 비즈니스를 하면서부터 상대방에 맞추기 위해 온갖 종류의 양주와 와인도 마셔보았다. 하지만 전쟁과 빈곤의 시대에 즐겼던 막걸리를 잊을 수 없다. 그래서 얼마 전 어머니 제삿날에도 모처럼 막걸리 몇 잔을 마셨다.


2004년 11월 03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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