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 영상
  • 연구결과물
  • E-카다로그
  • 발전기금
  • HOME
  • 박태준의삶
  • 쇳물은 멈추지않는다
  • 인쇄
  • 글자크기
  • 확대
  • 초기화
  • 축소

게시판 List
첫 원료구매 [2004년 10월 31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203



▶ 호주 블랙워터 광산측과 제철소 원료 구입 계약에 서명하고 있는 필자(右)


'자원은 유한(有限), 창의는 무한(無限)'- 포스코 정문에 붙어 있는 슬로건이다. 이 슬로건은 지난 36년간 디자인은 몇 번 바뀌었지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포철 건립 당시 한국은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 자원 빈국이었다. 팔아먹을 자원이래야 텅스텐이나 오징어밖에 없었다. 당연히 제철 원료도 부족했다. 1971년 국내의 철광석은 포철에 쓰일 물량의 20%에 불과했고, 코크스용 무연탄은 전량 수입해야 했다.

포철은 먼저 호주에 관심을 기울였다. 나는 일본 미쓰비시상사의 한국지점장 미야모토에게 의견을 구했다.

"광산업자들은 잘못될 경우부터 먼저 따집니다. 무연탄이나 철광석은 미리 채굴해 두어야 하니까요. 한국처럼 준(準)전시상태에 있는 국가의 신용장을 받아줄지 의문입니다."

미야모토는 아마 나의 자존심을 헤아려 '빈곤한 국가'대신 '준전시 국가'라고 표현했을 것이다. 그는 위탁수수료를 내면 미쓰비시상사가 괜찮은 조건으로 위탁판매를 해주겠다고 제안했다.

나는 웃으면서 거절했으나 새삼 우리 처지가 서글펐다. 물론 미야모토의 의견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포철 외국계약팀이 호주와 접촉한 결과가 그것을 증명했다. "귀사가 제철소를 성공적으로 건설할지 누가 보장하느냐? 미리 투자했다가 잘못 되면 누가 책임지느냐?"라는 핀잔만 들은 것이다.

나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어떻게 해서든 일본 제철소와 같은 조건으로 원료를 구매해야 했다. 원료값을 더 물면 그만큼 포철 경쟁력이 약해지기 때문이다.

71년 여름, 사진이 가득 든 가방을 들고 시드니로 갔다. 'Blast Furnace(제선공장)' 'Steel-Making Plant(제선공장)' 'Hot Strip Mill(열연공장)'…. 포철 부지에 큼직한 영문 간판을 세워놓고 찍은 사진들이었다. 아직 제철소가 세워지기 전이라 보여줄 것이라곤 간판 사진뿐이었다.

원료부장 주영석과 나는 해머슬러.마운트뉴먼.벨람비 등 호주의 손꼽히는 광산업체 대표들과 만났다. 그들은 우리 사진은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한결같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설 제철소와 계약이 제대로 이행된 사례가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해할 만했다. 광산 개발에는 철도.컨베이어 벨트.채굴장비 등 엄청난 선행투자를 해야 한다. 또 미리 캐놓아야 한다. 내가 사장이라도 거절했을 것이다.

서울에 전화를 넣었다. 나의 '비장의 무기'인 주한 호주대사관의 케리 상무관이 한걸음에 날아왔다. 한국 여자와 결혼해 오랫동안 한국에 근무했던 그는 나와 허물없는 사이였다. 포철 진행상황도 꿰뚫고 있었다. 케리는 우리 정부의 포철에 대한 관심과 포철이 확보한 건설자금 등을 설명하면서 자기 나라 광산업자들을 열성적으로 설득해줬다. 시드니의 우리 대사관도 열심히 뛰어다녔다.

드디어 호주 광산업자들의 귀가 뚫렸다. 나는 말했다. "일본과 똑같은 조건으로 장기 구매계약을 합시다. 우리 실수로 손해가 나면 대한민국 정부가 손해배상 책임을 진다는 각서라도 써주겠소."

이렇게 해서 쇳물 구경도 못한 포철은 연간 1억t을 생산하는 일본 제철소들과 똑같은 조건의 장기 구매계약에 성공했다. 이 계약은 73년 하반기의 제1차 석유파동 때부터 엄청난 효과를 발휘했다. 비싼 돈을 내고도 원료를 구하지 못해 쩔쩔매는 제철소들이 속출했지만 갓 태어난 포철은 장기 구매계약 덕분에 느긋하게 조업할 수 있었다.


2004년 10월 31일 [중앙일보 연재]



첨부파일 첨부파일 :
No File!
게시판 List
이전글 "당장 폭파해!" [2004년 11월 01일]
다음글 덩사오핑 일화 [2004년 10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