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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사오핑 일화 [2004년 10월 28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012



▶ 1978년 12월 포철 제 3고로 화입식에서 필자가 기념사를 하고 있다.


1978년 11월 나는 모처럼 보람과 함께 한가한 여유를 맛보고 있었다. 현대와의 제2제철 경쟁이 어느 정도 마무리됐고, 연 550만t 조강 규모의 포철 3기 완공도 눈앞에 둔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시 내가 한눈을 팔아서인지 현장이 엄청나게 지저분했다. '목욕론'을 강조해온 내가 아니던가. 나는 즉시 '정리정돈 별동대'를 조직해 '현장 목욕'을 시작했다. 160명이 각종 장비 28대로 10t 트럭 4000대분(하루 평균 830t)의 건설폐자재와 쓰레기를 처리했다. 아마 현장 청소 기록으로는 세계 최단기일 것이다.

포철 3기 준공식은 그해 12월 8일로 잡혔다. 포철이 단일제철소로 세계 17위에 오른 날이다. 68년 4월 태어난 포철이 2년 뒤 첫 고로 착공식을 했으니 '포철 탄생 10년, 고로 착공 8년' 만에 세계적인 제철소로 웅비한 셈이다.

나는 준공식에 은인들을 초대해 감사의 예를 갖추고 싶었다. 외국인으론 누구보다 먼저 신일본제철의 이나야마 회장을 모셔야 했다. 나는 만사를 제쳐놓고 초대장을 품고 도쿄(東京)로 날아갔다. 포철의 승승장구를 진심으로 축하해준 이나야마 회장이 문득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박 사장님, 중국에 납치되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자라 보고 놀란 가슴은 솥뚜껑 보고도 놀라는 것일까. 8년 전 '저우언라이(周恩來) 4원칙' 파문이 떠올랐다. 한국.대만과 교류하는 기업과는 거래하지 않겠다는 이 원칙 때문에 막 첫삽을 떴던 포철은 큰 곤경에 빠졌었다.

"지난 8월 덩샤오핑(鄧小平)이 우리 제철소를 다녀갔습니다. 죽(竹)의 장막에도 문이 열리는 모양입니다." "조그마한 탁구공(74년 시작된 미국과 중국의 '핑퐁외교')이 이미 구멍을 냈으니까 시간문제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라며 이나야마 회장이 말을 이었다. 덩샤오핑이 뜻밖에 포철 이야기를 꺼내더니 중국에도 포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부탁하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한국전쟁 때 만주 공격을 주장한 미국 맥아더 사령관의 논리가 생각났다. 당시 맥아더 사령관은 "중국은 무기를 생산할 시스템이 없어 현대전을 치를 능력이 없다"고 했는데, 그것은 중국에 현대적 제철소가 없다는 사실까지 염두에 둔 발언이라고 전해들었다.

이나야마 회장의 설명은 이렇다. "내가 덩샤오핑의 제의에 대해 불가능하다고 했더니 '그게 그렇게 불가능한 요청인가요?' 하고 되묻더군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어요. '제철소는 돈으로 짓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짓습니다.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습니까. 박태준 같은 인물이 없으면 포철 같은 제철소를 만들 수 없습니다'고 했더니 덩샤오핑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그러면 박태준을 수입하면 되겠군요'라고 합디다."

우리는 떠들썩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 일화는 널리 알려졌다. 이나야마 회장이 한국.일본.중국 인사를 만날 때마다 즐겨 화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 뒤 중국은 나에게 늘 호의를 보였다.

2003년 1월엔 중국발전연구기금회 고문으로 초빙됐다. 내가 외국을 떠돌던 93~94년에는 이따금 나를 찾아와 묘한 뉘앙스로 초빙의사를 내비친 중국의 베이징(北京)과학기술대 교수가 있었다. 94년엔 그가 뉴욕까지 찾아와 "덩샤오핑의 별장이 있고 사계가 뚜렷한 고장으로 모시겠다"는 제안을 했다고 한다. 이 말을 전하는 아내에게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조국이 나를 버려도 나는 조국을 버릴 수 없어!"


2004년 10월 28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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