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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 출하 [2004년 10월 26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115



▶ 포철 첫 제품인 중후판을 실은 트럭들이 직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호남정유(현 LG칼텍스정유) 여수공장으로 떠나고 있다.


쇠를 다룬 사람치고 나는 의외로 섬세한 구석이 많은 편이다. 결재한 뒤에는 항상 부하 직원에게 "이런 저런 이유로 이 서류를 결재했다"는 배경을 설명해줬다. 그래서 포철 직원들은 "'효자사 주지'(가족과 떨어져 포항에서 혼자 살던 나에 대한 별명)는 생각보다 잔소리꾼"이라고 수군대기도 했지만 나는 나름대로 원칙이 있었다.

첫째가 정보 공유다. 가끔 호통치고 닦달도 했지만 위.아래 조직원들은 끊임없이 생각을 나눠야 한다. 그것이 목표 달성의 지름길이다.

또 하나는 '포철맨'다운 포철맨을 하루 빨리 키워내고 싶었다. 나는 군 장교로 잔뼈가 굵었다. 장교의 가장 큰 임무 가운데 하나가 부하를 제대로 키우는 것이다. 내가 아는 철강 지식, 내가 파악한 세계시장의 흐름을 모두 전수해 주고 싶었다.

나는 즐겨 슬로건이나 상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이를 군사문화의 잔재라거나 전시행정이라고 삐딱하게 보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핵심적인 단어에 자신의 핵심적인 철학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제철보국(製鐵報國)' '우향웃 정신'(포철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오른편 영일만에 모두 빠져죽자는 각오) '품질로서 세계 정상' 등은 내가 만든 구호들이다. 물론 슬로건이 정해지면 행동과 실천으로 뒷받침해야 한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말 따로 행동 따로'다. 지금도 나는 어느 조직이나 '조직원이 리더의 말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성공의 제1조건이라고 믿는다.

포스코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흔히 포철의 첫 제품을 '용광로에서 나온 쇳물'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포스코의 첫 제품은 압연공장에서 나왔다. 상식을 뒤집기 위해 나는 포철 착공 전에 중대한 결심을 해야 했다.

종합제철소 건설방식엔 '제선-제강-압연공장' 순으로 세우는 전방 방식과 '압연-제강-제선공장' 순으로 세우는 후방 방식이 있다. 포철은 용고로(제선공장)를 맨 나중에 세우는 후방 방식을 택했다. 그래야 반제품 상태로 수입한 '슬래브'를 가공해서라도 하루 바삐 완제품을 생산해 철강 부족에 허덕이는 나라 경제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후방 방식은 쇳물 생산 전에 수익을 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세계 철강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포철이 조업 원년부터 흑자를 냈던 배경에는 후방 방식을 선택한 발상의 전환을 빼놓을 수 없다.

압연 쪽의 중후판 공장은 1972년 7월 4일 오전 11시 준공됐다. 예정 공기를 한 달 단축시킨 포철 최초의 공장이었다. 공교롭게도 이날 준공식은 '7.4남북공동성명'보다 딱 한 시간 늦었다. 가동 스위치를 누르자 롤러 테이블 위로 미끄러져 나온 시뻘건 슬래브가 4중 회전식 압연기를 거쳐 후판(厚板)으로 태어났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기념 휘호를 썼다. '품질로서 세계 정상'. 꿈에서도 놓지 않은 나의 염원이자 기필코 도달해야 할 포스코의 미래였다.

이 공장은 20일간의 시험조업을 거친 뒤 7월 31일 호남정유(현 LG칼텍스정유) 여수공장의 유류저장 탱크 제작용으로 쓰일 중후판 62t을 출하했다. 최초의 쇳물이 나온 것은 그보다 11개월 뒤의 일이다. 중후판이 실려나갈 때 내 심정은 덜 자란 맏딸을 시집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이었다. '포항제철 제품 첫 출하'라는 플래카드를 붙인 대형 트럭 세대에 시동이 걸리자 내 심장은 트럭엔진 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뛰었다.


2004년 10월 26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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