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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가 단장 [4년 10월 24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959



▶ 포항제철 건설 당시 필자(맨 왼쪽)가 아리가 일본기술단장(오른쪽에서 둘째)과 설비구매. 기술문제는 협의하고 있다.


포철 건설기에는 일본기술단이 현지에서 기술자문을 하고 있었다. 아리가 단장은 유능하고 정직한 인재였다. 설비 구매 때나 기술 자문에서나 자기 나라, 자기 회사 일처럼 열심히 해줬다.

아리가에 대한 나의 신뢰는 두 가지 사례만 들어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70년 국제 브로커들이 아리가를 단장 자리에서 쫓아내려고 농간을 부린 적이 있다. 1억달러가 넘는 설비를 구매하는 과정에서 양심적으로 일하는 아리가가 그들에겐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나는 즉시 도쿄로 건너가 신일본제철의 이나야마 사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아리가가 단장으로 계속 일하게 했다.

또 하나는 73년 '김대중 납치사건'의 여파로 일본이 포철과의 협력을 중단시켰을 때였다. 내가 유럽으로 날아가 유럽 업체들을 포철 설비 입찰에 끌어들이자, 궁지에 몰린 일본 업체들이 부랴부랴 입찰에 다시 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사정했다. 그때 일본이 사자(使者)로 내세운 사람이 바로 아리가였다.

"박 사장님, 저희가 잘못한 일이라도 있습니까?" "불행한 정치적 사건의 여파로부터 포철을 지키기 위한 자구책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입니다." 나는 두말하지 않고 일본에도 길을 터 주었다.

그런 아리가 단장에게 나는 단 한 번 섭섭함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는 까맣게 모를 일이다. 따지고 보면 정직한 눈을 가진 아리가의 잘못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 가난하고 기술도 없던 포철의 딱한 형편을 탓할 일이다.

착공식 직후인 70년 4월 어느 날이었다. 나는 일본기술단이 그린 '공장위치 계획도'를 살펴보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놈들이 이거, 엉뚱한 생각을 하는군." 도로 하나만 봐도 기껏 300만t 규모의 제철소에나 어울리는 것이었다. 나는 연필로 설계도면의 도로부터 두 배쯤 더 넓혔다.

다음날 아침 아리가 밑에 있는 요시다케 차장이 내 앞에 나타났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있었다. "박 사장님, 이렇게 하시면 일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 내가 도면에 손을 댔다고 항의하러 온 것이었다. 그를 앞에 두고 내가 거꾸로 하나씩 따졌다. "자네들의 몫은 자문이고, 최종 결정하는 책임자는 바로 나야. 자네들은 계약에 따라 일을 끝내고 돌아가면 그만이겠지만 여기서 평생 쇳물을 뽑아내야 할 사람은 바로 우리일세." 요시다케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돌아갔다.

그날 낮이었다. 포철부지 앞의 연관업체 부지에다 내화벽돌 공장을 세울 조선내화 이훈동 사장이 나를 찾아왔다. "제철소 최종 규모가 어떻게 됩니까? 그게 확실해야 저희도 공장 규모를 결정하지 않겠습니까?" 이훈동은 요시다케의 도면을 직접 본 사람처럼 굴었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우리 계획이 미심쩍다는 얘긴데, 나름대로 생각하시오. 지금은 850만t 예정이지만 그때 가봐서 1000만t 하게 될 겁니다."

며칠 뒤 도쿄에 가 아리가 단장을 만나고 온 이훈동이 마치 귀한 정보를 얻어낸 듯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났다.

"아리가는 잘하면 300만t을 할 거라고 했습니다."

아리가의 정직한 눈에는 포철이 기껏해야 300만t에서 나가떨어질 거라고 예측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말을 믿지 않고 좁은 부지로 출발한 조선내화는 나중에 포항 바깥 지역에 제2공장을 따로 지어야 하는 낭패를 겪었다. 그래서인지 이훈동은 광양제철소를 지을 때에는 연관 단지 내에 엄청나게 널찍한 부지부터 물색했다. 아예 2000만t짜리 제철소가 생겨도 지장이 없을 만큼의 땅을 차지했다.


4년 10월 24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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