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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자와 고로 [2004년 10월 21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083



▶ 일본 현지 조사단의 아카자와 단장(右)이 필자의 안내로 허허벌판인 포철 건립 부지를 둘러보고 있다.


한.일각료회담 직후인 1969년 9월 중순 일본은 포철 프로젝트의 타당성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현지 조사단을 파견했다.

단장은 일본 경제기획청 조정국장 아카자와 쇼이치. 도쿄(東京)대 법학부를 나온 정통 엘리트 관료였다. 포철이 당초 일정에 따라 무난하게 착공될 수 있느냐, 아니면 새로운 요구 조건에 휘둘리며 시간을 더 잡아먹게 되느냐의 문제는 아카자와의 펜 끝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나와 그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다. 서울에서 열린 경제기획원 공식회의에서 처음 악수를 나눴다.

그런데 아카자와 일행이 서울에 도착한 이튿날 묘한 일이 벌어졌다. 일본조사단은 서울에서 특별전세기를 타고 포항 해병사단 비행장에 내리기로 계획돼 있었는데 그날 초가을에 보기 드문 큰 비가 영일만을 비롯한 전국에 내리기 시작했다. 비행기 운항이 취소됐다. 날씨가 개기만 기다리다간 일정에 쫓기는 조사단의 포항 현장방문을 다음 기회로 미뤄야 될 판이었고 그만큼 포철 착공도 늦어질 형편이었다. 우리 정부는 전격적으로 경주까지 가는 세 칸짜리 특별열차를 냈다. 그들도 열차 여행을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지 반기는 눈치였다.

한 칸은 한국인, 가운데는 식당칸, 또 한 칸은 일본조사단. 나는 아카자와 단장과 마주앉았다.

"본국의 일에 쫓겨 이번엔 그냥 돌아가야 하는가 했는데 호우 덕분에 낭만적인 여행을 하게 되는군요."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이렇게 대화의 물꼬를 텄다. 특별열차는 빗속을 다섯 시간 달렸다. 우리는 잠시도 쉬지 않고 얘기했다.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내가 마음대로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감사한 시간이었다. 서러운 식민지 소년으로 태어나 어쩔 수 없이 배웠던 일본어가 아카자와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경주에서 하룻밤을 묵은 일본조사단은 이튿날 버스로 영일만에 닿았다. 하지만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딱 하나 있었다. 황량한 모래벌판에 세워진 볼품없는 현장사무소인 '롬멜하우스'가 전부였다. 조사단원들의 얼굴이 예사롭지 않았다. 탄식과 경악을 속으로 감추느라 애쓰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러나 일본으로 돌아간 아카자와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매우 긍정적인 보고서를 써냈다. 내 입으로 말하기가 무척 쑥스러운 노릇이지만, 그는 그 이유를 어느 글에서 이렇게 회고한 적이 있다.

"(그날의 큰 비는) 신의 섭리라고나 할까, 사바세계의 인연이라고나 할까. 경주까지 가는 다섯 시간의 대화를 통해 나는 '박태준이 지휘하면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란 확신을 얻었다. 그는 참으로 솔직했으며 제철에 목숨까지 걸겠다는, 순수하고 박력 있는 사람임을 느꼈다."

당시 내가 '철에 목숨을 건다'고 각오한 것은 사실이었다. 열차 안 대화에서 그 비장한 심정이 아카자와에게도 자연스럽게 전해졌던 모양이다.

16년의 세월이 흐른 85년 4월 한.일 민간합동경제위원회가 경주에서 열렸다. 한국 측 회장인 나는 손님들을 포철로 초대해 성대한 환영연을 베풀었다. 그 자리엔 관직에서 물러나 민간 경제인으로 변신한 아카자와도 참석했다. 나는 아주 늦었지만 진심으로 그에게 헌사를 바쳤다.

"우리 포스코는 제1고로를 '아카자와 고로'라고 부릅니다."

박수 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메웠다. 아카자와는 눈물을 글썽이며 나를 껴안았다. 그날의 비는 정녕 포철을 위한 신의 섭리였을까.


2004년 10월 21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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