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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철과 수녀원 [2004년 10월 19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074



▶ 포철 건립 과정에서 철거된 예수성심수녀원.


나이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고 한다. 나도 세 번을 울었다. 가장 최근에는 포철 때문에 오래 집을 떠나 있던 나에게 결혼을 앞둔 맏딸이 보내온 "신문이나 TV를 보고서야 아빠의 소식을 전해 들을 수 있었어요…"라는 두툼한 편지를 읽고 나서 눈물을 흘렸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소식에 또 한번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으며, 철이 든 뒤 처음 눈물을 흘렸던 곳은 벌건 쇳물을 처음으로 콸콸 토해내던 포철 용광로 앞이었다. 이제 내 인생의 원형질이라 할 수 있는 포철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야겠다.

돌이켜 보면 포항제철의 입지 선정은 그야말로 비정치적이고 객관적으로 결정됐다.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가 용역을 맡았던 후보지는 다섯 곳이었다. 영일만 북쪽의 월포와 포항.울산.삼천포.보성 등이다. 포항과 삼천포가 마지막까지 각축을 벌였다. 최종 발표는 1967년 6월 하순으로 잡혔다.

항간엔 삼천포가 유력하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그해 6월 총선에서 공화당 중진의원인 삼천포의 김용순 후보는 제철소 유치를 제1공약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보름 뒤 부지조성.공업용수.항만.전력 등에서 1위를 차지한 포항으로 결정되자 김 의원은 삭발 소동까지 벌였다.

일찍이 찬란한 신라문화의 젖줄이었던 남한 10대 하천 중 하나인 형산강. 그 하구의 오른쪽, 한반도에서 해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영일만(迎日灣) 안쪽의 아늑한 모래벌판은 '연오랑 세오녀' 설화의 무대다. 이곳이 포철이 들어설 자리라고 예언한 오래된 시(詩)가 있다. 조선후기 풍수지리의 대가인 이성지가 남긴 시다.

竹生漁龍沙(어링불에 대나무가 나면)

可活萬人地(수만 사람이 살 만한 땅이 된다)

西器東天來(서양문명이 동쪽 나라로 올 때)

回望無沙場(돌아보니 모래밭이 없어졌구나.)

포항 사람들은 백사장을 '불'이라 한다. '어룡사'란 포철이 들어선 백사장의 이름인데, 이곳 사투리로는'어링불'이라고 불렸다. 시에 나오는 대나무는 포철의 굴뚝이고, 서기(서양문명)란 물론 제철소다. 과연 틀림없는 예언의 시인 것이다.

그러나 거대한 제철소를 세우는 과정에서 순박한 사람들의 둥지가 철거되는 아픔도 있었다. 68년 가을엔 숱한 철거 일화들이 생겨났는데, 나는 특히 예수성심수녀원과 당산나무를 잊을 수 없다.

당시 수녀원엔 180명의 수녀가 500명 넘는 전쟁고아와 무의탁 노인을 돌보고 있었다. 철거에 늑장을 부리던 일부 주민은 수녀원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수녀원이 반대하면 자신들도 버틸 수 있겠다는 계산이었다.

수녀원은 포철이 들어선다는 소식에 당황해 청와대로 진정서를 냈다. 나는 프랑스에서 귀화한 길 신부님과 원장 수녀님을 직접 찾아뵈었다. 제철소 건립의 필요성을 설명하고, 이주 문제에도 성의를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두 분은 우리를 이해해주었다. 길 신부님은 18년간 정든 수녀원 건물을 폭파할 때 그 도화선에 직접 불을 붙였다.

또 하나의 일화를 남긴 당산나무는 현재 포철의 중앙도로 근처에 있었다. 주민들 사이에는 "당산나무를 훼손한 사람은 재앙을 받아 죽는다"는 미신이 떠돌아 누구도 나무를 철거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나는 궁여지책으로 "작업 수당을 두둑하게 주고 나중에 건설인부가 사망하면 어마어마하게 보상하겠다"고 약속했다. 그제야 작업인부들이 움직였고 불도저가 동원됐다. 물론 현장인부들에게 어떤 후환도 없었다. 이제는 전설 같은 이야기다.


2004년 10월 19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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