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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 녹화 [2004년 10월 18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851



▶ 박정희 대통령의 현장 방문을 기념해 경북 포항시 흥해읍 오도리 주민들이 세운 오도리 기념비.


1962년 2월이었나 보다. 처음 유럽 순방을 다녀온 나는 그곳에서 본 울창한 숲을 잊을 수 없었다. 그때 한국의 산은 벌거숭이 민둥산이었다. 우리 땅에도 푸른 숲을 가꾸고 싶었다. 훗날 포스코가 '숲 속의 주택단지'를 만든 것도 그 염원의 또다른 발로였다.

가난한 나라의 산에 나무가 자라게 하는 길은 무엇인가? 물론 많은 나무를 심어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심어봤자 나무를 땔감으로 쓰는 나라에서 그 나무가 남아나겠는가? 그렇다면 연료정책부터 바꿔야 했다.

이런 생각을 가다듬은 나는 서울 남영동 국립지질광물연구소를 방문했다. 신임 소장은 이정환이었다. 그런데 그가 바로 나의 심중을 꿰뚫어본 듯한 해답을 마련해두고 있었다. '산림 녹화를 하려면 국내 자원을 개발해야 한다. 무연탄을 쓰면 자원도 되고 산림 녹화도 된다'. 나는 지음(知音.자기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친구)을 얻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나는 군복 차림이어서 표정도 말씨도 엄숙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그는 유머도 모르는 딱딱한 사내라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다.

"자세히 브리핑해 보시오."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동안에 지질조사 사업의 중심목표를 무연탄 조사로 정할 것을 건의 드립니다."

브리핑과 질의응답에 1시간30분이나 바쳤다. 국립광물지질연구소의 획기적인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데는 무엇보다 예산 조달이 문제였다. 당시 연간 3000만t에 불과한 무연탄 발견량을 15억t으로 늘리려면 연구소 인원을 기존 25명에서 10배 수준으로 늘려주고 연간 3억원씩 5년간 모두 15억원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공짜로 받는 미국 잉여농산물을 팔아 예산을 충당하는 나라 살림에 비춰보면 적지않은 부담이었다.

"상공부에 보고됐나요?" "벌써 한 달 됐습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가타부타 언질도 주지 않았다. 그저 무표정하게 일어섰다.

이제 국토 녹화를 위한 나의 임무는 이정환 소장의 훌륭한 계획이 성공하도록 도와주는 일이됐다.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의 결심을 받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나는 국토 녹화와 무연탄 개발의 상관관계를 건의했고, 박 의장은 얼른 이해했다. 곧바로 박 의장을 모시고 남영동을 다시 찾았다. 이정환은 최고 권력자를 에워싼 군복 차림의 최고위원들 앞에서 주눅 든 표정이었다. 내가 그에게 조용히 일렀다.

"저번에 브리핑한 내용을 있는 그대로 자세하게, 그리고 소신껏 보고하시오."

박 의장은 곧바로 모든 건의를 흔쾌히 수용했다. 국토 녹화가 곧바로 국책사업이 된 것이다. 그리고 5년 뒤 드디어 우리나라의 무연탄 발견량이 16억t으로 늘었다. 예상보다 1억t을 초과 달성한 셈이다.

무연탄으로 만든 십구공탄. 이 연탄은 우리 사회에 숱한 애환을 낳았다. 달동네의 연탄 리어카는 소외와 빈곤의 상징이었고, 가스중독 사고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 꼬리를 물었다. 그런 고통을 딛고 우리의 산엔 해를 거듭할수록 녹음이 우거졌다. 73년 해외 순방에서 돌아온 박정희 대통령이 웃는 목소리로 포항으로 전화했다.

"오면서 내려다보니 영일만 북쪽 야산이 아직도 벌겋더군. 녹화사업은 까맣게 잊었나. 자네가 관심을 가져봐."

그로부터 5년에 걸쳐 포항 칠포해수욕장 인근 야산엔 연인원 360만명이 참여한 대규모 국토 녹화사업이 벌어졌다. 박 대통령은 75년 4월 직접 현장까지 내려오는 등 관심을 보였고, 경북 포항시 흥해읍 오도리 주민들은 이를 기념하는 비를 세웠다.


2004년 10월 18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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