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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구두약 [2004년 10월 14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129



▶ 말표 구두약의 정두화 전 회장은 요즘 전통장맛을 살리는데 관심이 많다.


1961년 7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로 한 노인이 들어왔다. 다짜고짜 박정희 의장을 만나겠다고 우겼다. "함경북도에 살다가 남하했는데 한국전쟁에서 아들 여섯을 잃었다. 제주에서 혼자 작은 이발소를 하는 나를 조국이 이렇게 내버려둬도 되는 거냐." 투박한 함경도 사투리에 섞인 그의 분노와 원망에 나는 가슴이 찡했다. "이승만이나 장면은 안 만나줬지만 당신네는 군인 출신이니까 다르지 않으냐"는 읍소도 그냥 흘리기 어려웠다.

노인의 하소연을 들은 박 의장도 내게 "최대한 편의를 봐드리라"고 했다. "무조건 먹고 살게 해달라"고 조르던 노인은 며칠 뒤 다시 나타나 굴레방다리 근처 풍전아파트가 적산가옥인데 그걸 불하받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즉시 조사를 시켰다. 세계 어느 전사(戰史)에도 없을, 아들 여섯을 조국에 바친 노인을 위해 그깟 적산가옥은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건물은 관세청이 관할하고, 국방부가 임대해 미8군 독신장교 숙소로 쓰고 있어 '불하 불가'라고 했다.

방법은 임대계약 권리를 노인에게 주는 것뿐인데 문제는 계약금이었다. 보증금.화재보험료 등으로 줄잡아 350만원이란 큰돈이 필요했다. 나는 정두화 사장과 의논했다. '가짜 고춧가루 사건'으로 나와 인연을 맺은 정 사장이 노인을 만났다. 가슴이 여린 그는 당장 거금을 구해 노인 이름으로 계약서를 썼다. 정두화와 노인은 머리를 맞대고 그 건물을 호텔로 개조할 궁리를 했다. 이듬해 경복궁에서 세계산업박람회가 열린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이었다.

그런데 호텔 계획이 알려지면서 노인의 스토리가 언론에 오르내렸다. 그러던 어느날 박 의장 앞으로 진정서가 날아왔다. 당연히 내가 먼저 읽었다. 아뿔싸! 그 노인에겐 원래 아들이 없고, 고향에서 행실이 안 좋았다는 내용이었다. 알아보니 진정서는 사실이었고, 그게 언론에도 보도됐다. 나.박 의장.정두화 세 사람이 차례로 속아넘어간 것이다.

나중에 정두화는 원금을 찾았지만 나는 미안했다. 그것을 갚을 기회가 65년에 왔다. 나는 대한중석 사장이었고, 그는 국방부 요청으로 '태양사'를 세워 구두약을 만들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구두약, 여기에도 빈곤한 나라의 아픈 사연이 담겨 있다. 휴전 뒤 우리 군인들은 미국이 제공한 군화를 신었다. 미제 군화는 민간에서도 인기가 높았다. 그런데 한국군의 군화 소모량이 엄청났다. 미군은 우리 군대가 빼돌려 그런 줄 알고 조사까지 했다. 그러나 결과는 '구두약을 칠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나왔다.

이런 배경에서 탄생된 태양사는 한동안 기술과 설비 부족에 허덕였다. 65년에도 가마솥에서 삶아낸 구두약을 손으로 깡통에 퍼담는 수준이었다. 모욕적인 '국산'이란 비아냥이 따라붙었다.

정두화의 딱한 사정은 곧 한국의 딱한 사정이었다. "일본 구두약으로 유명한 게 뭐요?" "3H예요. 치약처럼 튜브에 든 것도 있어요."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얼마 뒤 일본 3H사 간부 네명이 서울로 날아왔다. 나의 청에 따라 일본 정.재계 거물들이 중소업체인 3H사 대표에게 한국의 태양사와 기술 제휴하라고 부탁한 것이다.

정 사장과 만나는 그들의 가슴도 두근거렸지 싶다. 내가 자존심 때문에 태양사를 한국의 굉장한 구두약 제조업체라고 말해놓았기 때문이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태어난 것이 '말표 구두약'이다. 그 후 미제도, 일제도 한국에 발을 못 붙이게 만든 그 유명한 국산 구두약이다.


2004년 10월 14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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