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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의 선물 [2004년 10월 13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964



▶ 1954년 12월 20일 부산 백화당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린 필자 부부. 양가 친척.친구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21세에 군복을 입고, 23세 때부터 3년간 전쟁의 포연 속에서 청춘을 지새운 나는 이성(異性)에 한눈 팔 틈조차 없었다. 그래도 한번은 나를 사위로 삼겠다는 사람을 만났다. 1951년 봄 강릉에 주둔했을 때 전직 수학교사였다는 한 어른이 장교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에게는 여고를 졸업하고 간호부대에 자원한 딸이 있었다. 아버지의 청으로 가끔 우리를 위해 가곡을 불러준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가진 처녀였다.

어느 날 저녁 그 어른과 나는 술상을 마주했다. 가물가물하지만 안주가 초당두부였던가. 그러나 그날 대화 내용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내 딸과 결혼하게. 자네를 사위로 삼고 싶네." "전쟁 중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그럴 수 없습니다." 그녀의 이름도 기억한다. 명란. 속으로 '명랑인가 명태알인가'하고 생각했었다.

휴전 뒤에 내 혼사 문제는 어머니 손으로 넘어갔다. 고향 근처 경북 감포에 친척 어른이 계셨다. 그분은 나에게 8촌 뻘이었고, 내 아내가 된 처녀에겐 고모부였다. 두 사람의 성장 과정을 잘 아는 그 댁이 중매를 섰다.

어느 날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그때까지 내가 신부감에 대해 아는 정보는 겨우 세 가지였다. 이름은 장옥자, 인동 장씨, 이화여대 정외과 졸업. 그녀도 나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육군대학을 수석 졸업했으며 곧 대령으로 진급할 육사 교무처장이란 것뿐.

나는 몰랐지만 어머니는 안사돈 될 분에게 "시집살이 안 시킨다"고 단단히 약속하셨다고 한다. 문명과 먼 갯마을 집안의 7남매 맏이에게 섣불리 귀한 딸을 내놓으려 했겠는가.

54년 11월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부산으로 가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형제가 많은 집안에는 맏며느리의 역할이 중요하다. 집안의 화목이 그 손에 달렸다." 당신이 보아둔 규수는 그런 후보로 손색이 없다는 암시였다.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집의 안채 안방으로 안내됐다. 신부감의 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먼저 나타났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 예뻐 보였다. 이윽고 신부감과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왔다. 청년 장교와 갓 대학을 나온 처녀가 서로 들키지 않게 틈틈이 시선을 날리는 동안 어른들은 사라지고 둘만 남았다. 우리 사이에는 화롯불이 놓여 있었다. 30분쯤 마주보고 앉아 있었나. 그날 대화를 아내는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며 이따금 한 마디씩 한다.

"육사에는 생도가 몇 명이나 됩니까?" "그건 군사기밀이어서 알려줄 수 없습니다."

아내는 신랑감의 키에 관심이 많았는데, 그날 군용 트렌치 코트를 입고 간 나를 찬찬히 본 처제가 "언니, 키는 큰 것 같아"라고 잘못 전해준 것도 큰 도움이 됐다.

태릉으로 올라온 나는 편지를 보냈다. 나는 그 내용이 희미한데, 아내의 증언에 따르면 완곡한 고백을 섞어가며 '매우 긍정적'으로 썼다고 한다. 부산에서 올라온 답장도 긍정적이었다.

그래서 맞선을 본 지 달포 만에 결혼 날짜가 잡혔다. 12월 20일, 부산 백화당예식장. 신랑 27세, 신부 24세.

신혼여행도 없는 짧은 신혼 휴가가 끝나자 나는 신부를 며칠 시댁에 남겨두고 혼자 기차를 타야 했다. 이때 신부가 나에게 최초의 선물을 건넸다. 최호준 교수의 '경제학원론'. '군대와 전쟁' 밖에 모를 것 같은 신랑의 '경제적 무식'을 염려해 은사의 저서를 건넸을 텐데, 그것이 내 인생에서 '경제'와의 첫 만남이었다.


2004년 10월 13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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