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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고추가루 [2004년 10월 12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129



▶ 지난 5월 필자 부부는 경기도 용문의 정두화씨 농원을 찾아가 정씨(오른쪽에서 셋째)와 담소를 나누었다.


1957년 가을에 맡은 국방부 인사과장직은 내겐 따분하고 지긋지긋한 자리였다. 국회의원.고위 공무원.부유층의 청탁이 줄을 이었지만 나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장관을 따라 국회에 나가 대변인 노릇 하기도 지겨웠다

1년 만에 풀려나 부임한 곳은 1군에서 전투 서열이 꼴찌였던 25사단의 참모장. 그곳에서 나의 첫 임무는 사단 장병의 월동(越冬)을 위한 김장 준비였다. 현장에 나가보니 이미 김장에 필요한 각종 재료가 납품돼 김장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산처럼 쌓인 고춧가루 자루에서 매운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옆에 있는 병참부 장교에게 고춧가루와 물 양동이를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넣어봐." 빨간 고춧가루 한 사발이 말간 물통에 풀렸다. 양동이에 팔을 담갔다. 그러나 내 손에 잡힌 것은 한 움큼의 톱밥이었다.

나는 부식 조달 장교와 하사관(현 부사관)부터 혼을 내고 군납업자를 교체하기로 했다. 그날 밤 가짜 고춧가루를 납품한 업자가 몰래 관사로 찾아왔다. 당연히 봉투를 내밀었다. "뒤를 봐주겠다"는 소리도 했다. 나는 그 얼굴에 대고 내 인생에서 가장 험한 욕설을 퍼부었다. 이튿날 여기저기 높은 데서 압력이 내려왔다. 그 놈이 뒤를 봐주고 있을 상관들임이 분명했다. 모두 "조용히 덮고 각서를 받는 선에서 마무리하라"며 몰아세웠다.

그러나 나는 콧방귀를 날렸다. 나는 진짜 고춧가루를 구해올 새 업자부터 찾기 시작했다. 모든 정보를 종합한 결과 생전 본 적도 없었던 정두화란 인물로 낙점됐다. 즉시 부하 장교가 동대문으로 달려갔고, 정두화가 몇 시간이나 밤길을 달려 내 앞에 나타났다. 첫눈에 호감과 믿음이 갔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는 다른 부대에 납품하다가 500만원의 상납을 거절해 바로 직전에 쫓겨난 처지였다. "진짜를 구해 오시오. 거래도 정확하게 합시다." 내 말에 그는 득달같이 동대문 시장으로 달려갔다

다음날 진짜 고춧가루를 실은 트럭이 부대로 들어섰다. 연병장은 매운 냄새로 눈이 따가울 정도였다.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날 1군 참모장 박정희 장군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 회의에 올라왔던데, 시끄러웠다며?" "김장을 했을 뿐입니다."

우리는 한참을 웃었다. 오랫동안 끊겼던 박 장군과 나와의 관계를 가짜 고춧가루 사건이 다시 연결시켜준 셈이었다. 이때부터 박 장군과 나는 가끔 만나 술잔을 기울였다. 당연히 우리 술잔에는 부패와 빈곤이 전염병처럼 창궐한 조국의 현실에 대한 통탄이 담겼다.

이 사건은 또 나에게 정두화라는 일생의 친구를 선물했다. 젊은 시절에 백범 김구 선생을 모셨던 그는 현재 고향인 경기도 용문에 칩거하며 소리없이 좋은 일도 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내가 그에게 잊지 못할 신세를 졌던 것은 58년 겨울이다. 포천에서 연대장을 하던 시절, 수색에서 첫 아이를 잃은 아내는 둘째 딸을 얻어 기력을 회복해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딸이 또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이때 근처에서 부식공장을 하던 정두화가 트럭을 몰고와 아내와 아기를 태우고 서울의 유명한 소아과 의원까지 밤길을 달려갔다. 군대 지프를 사적으로 쓸 수 없다는 나의 못난 망설임에 그가 나서 내 딸을 살려낸 것이다.

그는 참으로 묘한 친구다. 93년엔 나의 북아현동 집에 차압 딱지가 붙자 자기 농장에 조그마한 집을 지었다는 친구다. 외국에서 떠돌다 언젠가 귀국할 나에게 줄 선물로-.


2004년 10월 12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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