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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리와 수색 [2004년 10월 11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273



▶ 1956년 가을 국방대학을 졸업한 뒤 수색의 교정에서 필자(앞줄 왼쪽에서 둘째)가 국방대학 교수들과 함께 찍은 사진.


지난 2월 부산에서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를 보았다. 주책없이 눈물이 흘렀다. 전투 장면에선 죽어간 전우들의 희미한 얼굴이 눈앞을 가렸다. 영화가 끝난 뒤 나는 국방대학 시절에 새긴 어느 영국인의 금언(金言)을 떠올렸다. '전쟁에 관한 기본적 이해가 없는 민주정치는 독재자의 명예욕과 매한가지로 평화의 가장 큰 적(敵)이다.'

사람에겐 '운'이 있다. 누구든 운을 깡그리 부인하진 못할 것이다. 나 역시 '요행'을 거부한다. 그러나 54년 전 그 전쟁에서 멀쩡히 살아남은 것은 아무리 돌이켜봐도 '운 좋게 총알이 피해간 덕분'이다.

1950년 6월 25일 아침. 외출을 나와있던 나는 서울 청파동 선배 집에서 한국전쟁을 맞았다. 시가지에 귀대 촉구 방송이 흘러나오기도 전에 나는 트럭을 몇 번이나 얻어 타고 포천의 부대로 돌아갔다. 우리 부대는 소련제 T-34 탱크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일본 군대에 끌려간 경험이 있는 하사관들이 탱크는 옆구리가 약하다며 수류탄을 들고 육탄으로 덤볐다. 우리 중대도 두 대를 잡았다. 그러나 인민군의 진격 속도를 잠시 늦췄을 뿐이었다.

6월 27일 밤. 비가 쏟아지는 미아리 고개에서 우리 부대는 괴멸 상태에 빠졌다. 연대장과 대대장은 전사하고, 중대장 12명 중 10명이 목숨을 잃었다. '요행'히 생존한 나와 김동혁 대위(그는 유능한 장교였으나 뒷날 부친이 이승만 대통령 암살사건에 연루돼 군복을 벗었다)는 질척한 미아리 고개에 청춘을 묻기로 했다. 그때 육군본부 전령이 도착해 내게 작전명령서를 전달했다. '잔존 병력은 즉시 철수하여 시흥에 집결할 것'. 그는 저승사자가 아니라 구원의 천사였다.

살아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전찻길을 따라 안암동을 거쳐 광나루에 닿았다. 한강 다리는 이미 끊어진 뒤여서 피란민이 북적거렸다. 나는 공포를 두 방 쏴 질서부터 잡았다. 그날 배 곯은 후퇴길에서 맡았던 시흥의 국밥 냄새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전쟁 막바지의 화천 949전투. 나는 부연대장으로 중공군과 격렬하게 맞붙었다. 적의 포격에 대대장과 참모들이 탄 보트가 뒤집혀 모두 북한강에서 익사하는 참극도 겪었지만, 우리 부대는 끝까지 화천 수력발전소를 사수했다. 이 전투에서도 무지막지한 중공군의 총알과 대포 파편은 요행히 나를 피해갔다.

휴전이 됐다. 내 가슴에는 무공훈장이 몇 개나 걸렸다. 하지만 살아남은 자의 채무보증서 같이 느껴졌다. 머리 또한 텅 빈 듯했다. 그래서 대구의 육군대학에 들어가 몇 년 만에 공부를 시작했다.

육군대학을 수석 졸업한 나는 육사 교무처장으로 나갔다. 내 나이 27세. 54년 12월에 결혼해 관사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56년 1월 수색에 있는 국방대학에 들어가면서 다시 문간방 셋방살이 신세로 밀려나게 됐다. 아침이면 머리 맡에 놓아둔 물그릇에 얼음이 어는, 낡고 초라한 셋방에서 우리 부부는 첫 딸을 폐렴으로 잃었다. 아내와 나의 가슴은 찢어졌다. 소식을 들은 육사 동기생들이 위로금 1만원을 들고 왔다. 우리는 첫 아이를 그렇게 수색 야산에 묻었다.

나는 마음을 새로이 다잡았다. 다시 한번 공부에 열중했고, 교수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국방부 장관의 명으로 국방부 인사과장으로 옮겼다. 국방부 장관을 수행해 국회에 나가 이철승.김영삼 등 '의원 나리'들을 난생 처음 보게 되었다.


2004년 10월 11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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