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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과 화가 [2004년 10월 10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925



▶ 일본 도쿄의 한국문화원 전시장에서 44년 만에 다시 만난 화가 한인현(左)과 필자.


21세에 군복을 입은 나는 36세에 군복을 벗었다. 노래 가사대로 '푸른 옷에 실려간 꽃다운 내 청춘'의 15년. 그중에 어찌 전쟁 3년이 잊혀지랴.

불쑥 김웅수 장군이 떠오른다. 포항 형산강에 배수진을 쳤을 때 그분은 대령이었다. 작은 체구에 지혜와 용기를 갖춘 장교였다. 인천상륙작전과 더불어 북진이 시작되고 나는 김 대령의 보좌관으로 뽑혔다. 1950년 겨울의 원산.흥남, 그리고 청진. 우리는 청진 시청에 태극기를 꽂자마자 곧 밀려내려 왔다. 원통하고 서럽고, 그래서 후퇴의 행군길은 더 추웠다. 흥남이었나. 화학공장을 수색하다 카바이드 술통을 발견했다. 그걸 지프 뒤에 싣고 고무 호스를 꽂아 줄기차게 빨아 마셨다. 울분도, 추위도 함께 마셨다.

흥남 철수 하루 전, 나는 맹장염에 걸렸다. 야전병원 수술대 밑에는 동상으로 잘라낸 젊은 병사들의 손가락과 발가락이 가득 널려 있었다. 나는 꿰맨 자국이 아물 새도 없이 들것에 실려 양륙함(LST)에 눕혀졌다. 김 대령의 배려와 나를 따라다니던 학도병(강릉상고 3년 조규기. 육사 12기로 장교가 됐으나 한탄강에서 사고로 아깝게 숨졌다)이 겨우 얻어낸 자리였다.

5.16 당시 김웅수 장군은 군단장으로서 반대파에 섰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대에 자리를 잡았다. 63년 말 공직에서 물러난 내가 유학을 가려 했던 곳도 바로 그분이 계신 대학이었다.

현재 아흔 살을 바라보는 김 장군은 워싱턴 D.C.에 살고 있다. 70년대부터 가난한 동포2세나 유학생을 위해 장학재단을 만들어 부지런히 인재를 키워냈다. 나는 미국 출장길에 가끔 찾아뵙기도 하고, 장학재단에 봉투를 보태기도 했다.

1.4 후퇴 직후 나는 강릉에 주둔하고 있다가 5사단 사령부로 이동됐다. 여기서 네 살 밑의 특별한 청년 문관을 만났다. 한인현. 1.4후퇴 때 할아버지를 모시러 간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아 혼자 배를 탔다는 함경도 청년. 거제도까지 실려갔다 뽑혀 나온 그는 차트 만드는 솜씨부터 남달랐다. 나는 첫눈에 그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봤다. 파리로 유학이나 보냈으면 딱 좋았을 청년. 나는 그가 쓴 시(詩)의 유일한 독자였고, 그를 친동생처럼 돌보려고 애썼다.

휴전 직후 그와 소식이 두절됐다가 일본 유랑생활의 막바지 무렵인 97년 1월 중순 다시 연락이 닿았다. 한인현이 도쿄 한국문화원에서 열리는 자신의 전시회를 보러 오라고 연락을 띄운 것이다. 무려 44년 만의 상봉이었다. 그는 "(당신이) 너무 유명해져서 보고 싶어도 참고 또 참았다가 야인으로 돌아온 뒤에야 소식을 전한다"고 했다. 휴전 직후 순천의 어느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친 뒤 소식이 끊어졌던 그였다.

그림을 안 파는 재야화가 한인현. 그의 그림에는 육친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배어 있었다. 도쿄에서 우리는 '만남'이란 그림을 배경으로 상봉기념 사진을 찍었다. 그의 인생은 마침 그 무렵에 방송인 이계진(현 국회의원)이 쓴 '바보 화가 한인현 이야기'로 세상에 알려지고 있었다.

내가 총리로 있던 2000년, 한인현은 인사동에서 고희 기념전을 열었다. 그는 '다시 유명해진' 나에게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지만, 나는 신문에서 보고 내 발로 찾아갔다. 그를 이계진씨와 함께 총리 공관에 초대해 한턱도 냈다.  
 
 2004년 10월 10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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