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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사광가속기 [2004년 10월 06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044



▶ 1994년 완공된 방사광가속기를 항공촬영한 모습.


유능한 교수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한 1986년 여름과 가을, 우수한 신입생을 유치하려는 포항공대 앞에는 세 개의 난관이 놓여 있었다. 전기냐 후기냐. 과연 학력고사 280점 이상(당시 학력고사 성적 상위 2.4% 이내)으로 지원 자격을 제한할 수 있느냐. 마지막으로 캠퍼스 완공 시기를 1개월 단축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당시 문교부는 신설 대학을 후기모집에 배당했다. 포항공대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학력고사 280점 이상도 양보할 수 없었다. '소수 정예의 연구중심대학'이란 설립 목표가 걸린 문제였다. 나는 배수진을 쳤다. "학생이 안 오면 교수들만으로 연구를 합시다." 고맙게도 문교부는 막바지에 포항공대 입장을 받아들여 주었다.

12월 30일로 잡혔던 대학 준공 날짜를 11월 30일로 앞당긴 것은 홍보를 위해서였다. 다음해 1월 초에 원서를 받자면 학교를 둘러볼 수험생과 학부모들에게 '완성된 실물의 포항공대'를 보여줘야 우수한 학생을 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생이 걸린 수험생이나 학부모를 이해시키려면 어쩔 수 없이 우리 직원들을 몰아붙일 수밖에 없었다.

포항공대는 다행히 12월 3일 개교식을 했다. 신입생 모집도 대성공이었다. 87년 3월에는 첫 입학식을 했다. 포스코는 불과 2년 만에 최고의 공대를 완성해낸 것이다. 나는 "미래를 내다보고 용기있게 선택해준 신입생들에게 감사하다"며 아낌없는 지원을 다짐했다.

나의 약속에는 김호길 총장이 건의한 방사광가속기 설립도 포함돼 있었다. '조상의 핏값으로 일으킨 포스코의 아들이 포항공대다. 한국 이공계 분야를 이끌 수 있다면 무엇이라도 해 주겠다'는 각오였다. 그리고 생명공학.의학 등에서 우리나라가 첨단 과학기술의 기초를 다지려면 방사광가속기는 꼭 필요했다.

나는 과기처 장관 등을 상대로 "건설비 대부분은 포스코가 감당할 테니 과기처는 건설 예산 일부와 운영자금을 대달라"고 부탁하고 다녔다. 이렇게 한참을 밀고 당긴 끝에 91년 4월 1일 방사광가속기 공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방사광가속기의 부지는 18만9000평. 나중에 포철처럼 커질 것에 대비해 아예 터를 넓게 잡았다.

94년 4월 하순 나는 프랑스 니스에 머물고 있었다. 1년 넘게 계속된 일본 유랑생활에 갑갑증을 느껴 모처럼 유럽으로 나간 것이었다. 그런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김호길 총장 별세. 친선체육대회에서 야구 선수로 뛰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뇌를 다쳐 숨졌다는 것이다. 기가 막힐 일이었다.

그런 불행을 딛고 그해 12월 초 드디어 우리 손으로 만든 세계 다섯 번째 방사광가속기 준공식이 포항공대에서 열렸다. 김영삼 대통령이 국무위원들과 함께 참석했다. 이동녕.남궁원.한경섭 교수 등이 훈장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국내에 없었고, 김호길 총장은 이승에 없었다. 국가 원수까지 참석한 이 성대한 잔치는 그날 저녁 TV의 9시 뉴스를 타지 못했다. 서울 아현동 가스폭발 사고가 TV 화면을 온통 뒤덮었기 때문이다.

요즘엔 한국 과학의 총아인 방사광가속기를 사용하려는 대기업 연구소와 대학 연구원들의 예약이 밀리고 있다. 지난 8월엔 노무현 대통령이 방문해 "제4세대 가속기 설립"을 약속했을 정도다. 앞으로 미국.독일.일본과 경쟁할 텐데 우리는 잡아놓은 부지가 넓어 기존 가속기를 계속 업그레이드하면 되는 게 참으로 다행이다. 덕분에 예산도 많이 절약될 것이다.


2004년 10월 06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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