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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이거야" [2004년 10월 05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436



▶ 포항공대 기공식이 끝난 뒤 필자(右)와 김호길 초대 포항공대 총장이 악수하고 있다.


큰소리를 치고 돌아간 김호길 박사는 1985년 6월 중순 포스코가 문교부에 포항공대 설립 인가 신청서를 낸 뒤에도 포항으로 옮겨오려고 하지 않았다. 포항공대를 세울 환경은 최적이었다. 11대 국회에 진출해 정치에 한 발을 걸쳤던 나는 이땐 국회의원도 아니었다. 정치에서 완전히 발을 뺀 상태였다. 12대 총선에서 집권당 권익현 사무총장이 '포항 4년제 대학 신설'을 공약했다. 4년제 대학 설립은 포항 시민의 숙원사업이었다.

7월 초 포항공대 설립 승인이 난 뒤에도 김 박사는 포항으로 이사하는 것을 망설였다. 이번에는 럭키금성(현 LG) 측에 미안해 했다. 나는 그의 그런 태도가 좋았다. 유가(儒家)의 신의를 존중한 그는 다른 인물을 천거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신이 조국에서 실현하려는 이상과 포항공대가 일치하지 않느냐"라는 나의 설득에 김 박사는 결국 포항으로 왔다. 그의 첫 직책은 '포스코 대학건설본부 고문'이었다. 이때만 해도 회사의 모든 임직원이 제복을 입고 안전화를 신었다. 그는 군 제대 이후 처음 제복을 입었지만 불평하지 않았다.

첫 대면에서 그가 요구했던 대로 나는 재단 이사장의 법적 권한을 양보했다. 교수 인사권과 대학 운영권은 온전히 그의 몫이었다. 이리하여 87년 3월 첫 신입생을 받아들일 포항공대의 개교 추진 일정은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진짜 거절하기 어려운 인사가 아들을 포항공대 교수로 보내고 싶어했다. 도리 없이 나는 이력서를 김 총장에게 보냈다. 그랬더니 '점수 미달로 불가'라는 딱지를 붙여 돌려보냈다. 그 뒤부터 나는 그런 청탁이 들어오면 아예 "우리 총장에게 알아보라"고 발뺌했다.

85년 8월 중순 포항공대 기공식이 열렸다. 다음 차례는 해외에 있는 우수한 교수를 초빙하는 일이었다. 김호길과 이대공은 9월 중순 재외동포 교수요원을 스카우트하기 위한 한 달간 장정에 올랐다. 미국.영국.독일.프랑스를 돌며 450명의 동포 교수요원을 상대로 설명회를 했다. 김호길은 "한국에서 일류 대학 설립은 이번이 마지막이니 이민온 게 아니라면 돌아가자"고 호소했다. 이런 설명회를 거치면서 말이 빠른 김호길에게는 '속사포', 말씨가 분명한 이대공에게는 '대공포'란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그해 10월 초 나는 세계철강협회 회의 참석차 런던에 갔다가 독일에 있던 이대공에게 전화를 걸었다. 성과가 있느냐, 어떤 질문이 많더냐, 이런 걸 궁금해 하자 이대공이 "회장님이 교수들에게도 '쪼인트'를 깔 거냐는 질문까지 나왔다"고 했다. 이렇게 회장과 상무가 허물없는 농담을 나누며 전화하는 장면을 본 김 총장은 "That's it(바로 이거야)"이라고 했단다.

86년 1월 나는 뉴욕으로 날아갔다. 이정묵.염영일.함인영.변종화.김동환.최상일.장수영 등 포항공대의 주임급 교수 초빙 대상자들을 부부 동반으로 최고급 호텔에 모시게 했다. 아무래도 최종 결정은 결국 부인들의 결심에 달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근무조건.아파트.학교수준.건학 이념 등 모든 것을 솔직히 밝혔고, 반응은 좋았다. 이때부터 대학건설본부는 이 모든 소식을 담은 '포항공대소식'을 전국의 과학영재와 학부모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2004년 10월 05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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