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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길 박사 [2004년 10월 04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620



▶ 필자는 1985년 6월 15일 김호길 박사 가족을 포스코 영빈관인 백록대에 초청했다. 사진 외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필자, 이대공 대학설립추진본부장, 권봉순 여사(김 박사 부인), 김호길 박사, 김 박사의 딸.


1985년 5월 나는 영화 '스파이더 맨' 촬영 장소로도 유명한 미국 캘리포니아공과대(칼텍) 31동 건물에 들어섰다.

"칼텍 같은 대학을 한국에도 하나 세우려고 합니다.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칼텍 재정담당 부총장은 처음엔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한국 대학들의 공학과 과학 전통은 일천합니다. 매우 늦었지만 대기업이 나서서 21세기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이어진 나의 진지한 설득에 부총장이 마음을 열었다. 이미 포스코에선 이대공 상무를 책임자로 하는 대학 설립 추진반이 넉달째 실질적 업무를 추진하고 있었다.

칼텍은 연구중심 대학으로, 엑슨연구소와 더불어 산.학.연 협조체제가 모범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이것이 내가 칼텍을 포항공대(포스텍)의 모델로 잡은 이유였다. 오스트리아 레호벤공대, 스위스 취리히공대, 독일 아헨공대.베를린공대, 영국 임페리얼공대.버밍엄공대.셰필드공대, 미국 MIT.일리노이공대.버클리공대…. 긴 탐색 끝에 나는 칼텍을 찍었다. 나의 칼텍 방문은 세계적 일류 공대 설립을 꿈꾸는 마지막 현장 답사였다.

칼텍 부총장과 이런 대화도 나눴다. "포스코의 지배주주가 정부라면 정권이 바뀌어도 당신이 포스코의 리더로 남아야 대학을 키울 수 있을 텐데, 그게 보장됩니까?" "하느님이 나에게 포항공대를 세울 시간은 허락하실 거라고 믿습니다." 나는 환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런 기우(杞憂)는 버려도 좋다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슬아슬했다. 93년 내가 포스코에서 쫓겨날 때 다행히 포항공대는 막 본궤도에 진입해 있었다.

모델도 찾았고 대학 설립을 전담할 조직도 갖췄으니, 다음은 유능한 초대 총장을 구할 차례였다. 마침 한 인물이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김호길 박사. 52세(1933년 생), 경북 안동 태생, 안동사범과 서울대 졸업, 버밍엄대 유학, 미국 로렌스버클리연구소 근무, 미국 메릴랜드대 물리학과 교수, 전자고리가속기 권위자, 재미과학기술자협회 간사장과 회장 역임. 게다가 매력적인 일화의 주인공이기도 했다.

이대공의 전언은 이러했다. "김 박사는 원래 럭키금성(현 LG)이 설립한 진주의 연암공전을 4년제 대학으로 만든다는 약속에 따라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했는데, 정부가 인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전두환 대통령 앞으로 '대한민주공화국이라 하지 말고 대한사기공화국으로 하라'는 진정서를 냈다고 합니다."

나는 김 박사를 일단 포항으로 모셔오게 했다. 이대공이 거의 '십고초려'한 끝에 김 박사가 85년 6월 초 포철을 방문했다. 그때까지도 그는 '포항공대'에 반신반의하는 상태였다. 포도주 몇 병을 곁들인 첫 만남에서 그가 던진 큰소리들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제가 만약 포항공대로 온다면 처음에는 포항제철의 포항공대로 출발하지만 나중에는 포항공대의 포항제철이 됩니다. 또한 캠퍼스 배치는 회장님 마음대로 하시더라도 교수 채용이나 대학 운영은 저에게 일임하셔야 합니다."

포철 임원들이 들었으면 펄쩍 뛸 소리였다. 자리를 함께 한 이대공도 가슴을 졸이며 좌불안석이었다.

나는 원래 김 박사 외에도 여러 총장 후보를 면접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일은 심사숙고하지만 어떤 일은 육감으로 단박에 결정한다. 그날 밤 나는 이대공에게 전화했다. "김호길을 무조건 잡아!"


2004년 10월 04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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