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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의 주택단지 [2004년 09월 30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325



▶ 숲에 쌓여있는 포스코의 지곡주택단지와 포항공대.


1950년 8월, 나는 대위로 형산강 전투에 배치돼 있었다. 포항 시가지는 폐허였다. 9월에 북진을 시작했을 때, 평생 못 잊을 두 장교를 만났다. 나를 보좌관으로 발탁한 김웅수(5.16에 반대해 미국으로 이민)대령과 재일동포 학생으로 자원입대한 한 살 밑의 김수용 중위다

우리가 원산에 닿은 50년 가을, 형산강 하구 모래 밭엔 건물이 하나 들어섰다. 전쟁 고아와 무의탁 노인을 돌보는 예수성심시녀회 수녀원이었다. 바로 이곳이 68년 포철이 제철소를 올려야 할 자리였다. 당시 수녀원에는 신부 두 분과 160명의 수녀가 500명 넘는 고아와 노인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나는 성직자들을 만나 "최대의 복지는 절대 빈곤을 벗어나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꼭 제철소를 지어야 한다"고 간곡하게 설득했다. 성직자들은 결국 길을 비켜주었고, 불도저가 고아들의 둥지를 밀어냈다. 나는 그때부터 복지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장 급한 것이 사원복지였다.

사원 복지의 핵심은 의식주와 교육일 것이다. '의.식'은 급여로 해결하더라도 주택과 교육은 경영자의 철학이 필요한 항목이다. 나는 먼저 사원주택 부지를 매입하기 위해 은행에 돈을 빌리러 다녔다. 아무리 통사정해도 담보가 없으니 은행장마다 퇴짜를 놓았다. 단 한 사람, 한일은행(현 우리은행)의 하진수 행장만 나의 열정을 믿어주었다(이에 대한 보은으로 지금도 포스코는 우리은행을 주거래은행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포철은 공장 말뚝도 박기 전인 68년 11월, 사원주택 부지 20만평을 매입했다. 그러자 국회에서 난리가 났다. 정치권은 나를 부동산 투기꾼으로 몰아세웠다. 미쳤다고 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유럽에서 본 숲 속의 주택단지를 구상했다. 당장 조경과 녹화를 책임질 전문가가 필요했다. 홍대원 사원이 내 눈에 띄었다. 그는 70년부터 미친 듯 포항과 광양을 오가며 거대한 숲을 만들어 냈다. 현재 포항주택단지는 약 50%, 광양주택단지는 약 65%가 녹지대다.

81년 봄, 도쿄 포스코 사무실에 들른 나에게 한 사내가 "형님!"하며 다가와 부둥켜 안았다. 전쟁터에서 만난 김수용이었다. 무공훈장을 두 개나 받으며 중령까지 진급했던 그는 휴전 뒤 일본으로 돌아가 28년 만에 굴지의 조경회사 대표로 변해 있었다. 도쿄 황궁의 소나무도 자신이 심었다고 했다.

"형님, 내가 다시 조국에 기여할 길은 조경밖에 없습니다." "그래, 포스코에 와서 도와라."

옛 전우인 김수용은 톱과 온도계까지 챙겨 날아왔다. 그는 자신의 돈을 써가며 포항과 광양에서 조경기술을 자문했다. 포스코의 녹화를 위해 몇 년을 자원봉사했던 그는 안타깝게도 재작년에 숨졌다. 일본에 귀화하지 않았던 그는 현재 대전국립묘지에 묻혀 있다.

92년 여름, 모스크바대학 사도브니치 총장이 포스코를 방문한 적이 있다. 그는 "숲속 주택들은 누구 소유냐" "어떻게 이런 예쁜 주택을 지었느냐"며 꼬치꼬치 캐물었다. 사원들이 장기 저리로 융자받아 소유한 자가 주택들이란 설명을 듣고 빅토르 총장이 눈시울을 붉히며 이렇게 말했다.

"레닌 동지가 추구한 사회주의의 이상향이 포스코에서 실현되었군요."

사도브니치 총장과 나는 올해 6월 모스크바에서 재회했다. 그는 나를 뜨겁게 포옹했다. 아마 12년 전 포스코 주택단지에서 받은 감동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2004년 09월 30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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