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 영상
  • 연구결과물
  • E-카다로그
  • 발전기금
  • HOME
  • 박태준의삶
  • 쇳물은 멈추지않는다
  • 인쇄
  • 글자크기
  • 확대
  • 초기화
  • 축소

게시판 List
폐 밑 물혹 [2004년 09월 29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969



▶ 국무총리를 지낼 당시 박지원씨(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필자(右)


YS를 피해 1993년 3월 빈손으로 일본에 내렸을 때, 세지마가 나를 맞아주었다. 나보다 십수년 연상인 그는 우리나라에도 널리 읽힌 '불모지대'란 소설의 실제 주인공이다. 일본 대본영(大本營) 참모이자 만주 관동군에서 활동하던 그는 러시아군에 잡혀 시베리아에서 10년 유형생활을 했다. 그 뒤 건강하게 귀환하여 일본의 종합상사를 이끈 발군의 경제인이자, 막후에서 일본의 최고 전략가로 활동해 왔다. 그런 세지마가 맨 먼저 나를 도쿄여대 부속 아오야마병원에 입원시켰다.

폐 밑에서 종양이 찍혔다. 내 몸 속에 종양이 있는 것을 처음 안 것은 1980년. 제2제철소 건설을 앞두고 체력적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 처음으로 종합검진을 받았을 때였다. 그 놈이 아오야마병원 검진에서 직경 9㎝가 넘게 자란 것으로 밝혀진 것이다. 포항과 서울에서는 내가 암에 걸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

2년 뒤인 95년 3월, 나는 미국 플로리다에서 독한 감기에 걸렸다. 한국전 참전용사인 늙은 의사가 "옛 전우를 만났다"며 정성을 다해 보살펴 주었지만 증상이 악화됐다. 결국 뉴욕 코넬대병원 응급실로 후송됐다. 각혈이 계속됐다. 살아나려면 폐에 가득 찬 피를 내 힘으로 다 뱉어내든지, 아니면 기계를 넣어야 한다고 했다.

숨을 거둘지 모른다고 생각한 아내는 맏사위에게 한이라도 남지 않게 최고의 병실로 모시라는 부탁까지 했다고 한다. 나는 밤새 피를 토하면서 빈사 상태에 빠졌다. 내 의지와의 싸움이었다. 그렇게 간신히 피를 다 뱉어내고 나는 급성 폐렴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2000년 5월 총리에서 낙마할 무렵, 폐밑 물혹이 또 다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나는 2001년 7월 유서를 쓴 뒤 코넬대병원에 누웠다. 옆구리를 32㎝나 가르고, 갈비뼈 하나를 잘라 빼내고, 폐 밑에서 물혹을 적출했다. 수술 시간만 4시간30분, 물혹 무게가 무려 3.2㎏. 그러니까 일흔을 넘긴 노인이 신생아 몸무게 하나를 폐 밑에 넣은 채로 이리저리 뛰어다닌 셈이었다. 다행히 수술 결과는 좋았다.

나는 유서를 찢어 휴지통에 버리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포스코 현장에서 숱하게 마신 모래들, 정치하면서 쌓인 온갖 먼지들이 물혹에 다 들어 있었을텐데, 이제 그 혹을 떼어냈으니 새로운 인생이 열릴 것 같은 느낌이야…." 무슨 팔자인지 나는 병원에서 퇴원해 뉴욕에서 요양하면서 9.11 테러를 바로 곁에서 지켜보았다. 세기의 비극인 6.25와 9.11 테러의 참혹한 모습을 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셈이다.

수술 후 6개월 만인 2002년 1월 초, 나는 건강을 되찾고 귀국했다. 김해공항 귀빈실에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이 한쪽 발에 깁스를 하고 인사하러 나왔다. 그는 당시 '소통령'으로 불렸다. 나는 포철 창업기에 부정한 정치자금 요구와 싸우면서 '소통령'이란 별명이 붙은 일화를 들려주었다. "당신이 소통령으로 불린다면, 깨끗한 처신으로 그런 별명을 얻으라"는 뜻이었다.


2004년 09월 29일 [중앙일보 연재]


첨부파일 첨부파일 :
No File!
게시판 List
이전글 숲 속의 주택단지 [2004년 09월 30일]
다음글 총리 낙마 [2004년 09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