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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 낙마 [2004년 09월 23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831



▶ 2000년 5월 19일 필자는 부동산 명의신탁 문제로 총리 직에서 물러났다. 사진은 이임식을 마치고 서울 세종로 정부 중앙청사를 떠나는 모습.


2000년 새해, 나는 주변의 웅성거림 속에서 총리에 취임했다.

"지역적 기반이 허약한 TJ로는 안된다. 4월 총선에서 여당은 영남에서 필패할 것이다. JP와 TJ는 사실상 결별 상태인데, 왜 DJ가 TJ를 중용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수군거림을 모를 내가 아니었다. 그러나 워낙 DJ가 강력히 요청했고, 나도 그를 도와주고 싶었다. 건강에 문제가 있어 한 해쯤 열심히 하고 물러날 생각이었다. 당시에도 폐 밑의 물혹이 나를 괴롭혀 중국 한의사가 비밀리에 다녀가곤 했다.

나는 취임 일성으로 '국가에 대한 마지막 봉사'를 다짐한 뒤 총리실에 국제 유가와 환율 변동을 담은 상황판을 내걸었다. 각 부처 업무도 꼼꼼히 챙겨나갔다. '일하는 총리''잔소리 심한 총리'라는 말이 떠돌았다.

그해 4월 나는 총리 업무에 매진하기 위해 정당 정치를 접었다. 4월 총선에 국회의원 입후보도 포기했다.

총선 직전 중국 베이징을 다녀온 박지원 문화부장관은 '남북 정상회담'이란 엄청난 발표를 했다. 집권당은 그러나 총선에서 완패했고, 자민련은 교섭단체에도 미달했다. 남북 정상회담 카드를 DJ 노벨 평화상과 연계시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역풍을 맞은 것이다.

위기에 몰린 DJ는 다시 JP를 원했다. 이 무렵 국무회의에서 내가 언성을 높인 적이 있다. 경제 부총리.경제수석.금융감독위원장이 내놓는 경제 수치가 저마다 달라 국민이 헷갈리니 사전에 조율하라는 주문이었다. 그러나 갑자기 DJ가 언짢은 표정으로 자리를 떴다. DJ의 신경이 예민해진 까닭을 알아보기 위해 나름대로 이곳저곳을 짚어보는 과정에서 나는 대북 송금의 낌새를 채게 됐다. 하지만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섣불리 발설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어느 날, 느닷없이 나의 '부동산 명의신탁' 파문이 일었다. 내가 YS를 피해 93년 봄 일본으로 떠난 직후 국세청 조사를 받았던 사업가 조 모씨가 "20억원 증여세는 부당하다"며 행정소송을 냈는데, 원고의 변호사도 모르게 갑자기 선고가 내려진 것이다. 법원이 "8억원은 돌려주라"고 했으니, 나머지는 나의 명의신탁이라는 판결이었다. 세무서가 피고인 데다 현직 총리 이름까지 거론됐을 이 재판에 대해 나는 국세청장한테서 어떤 보고도 받은 게 없었다. 더구나 명의신탁이나 증여세 문제는 이미 93년에 다 다뤄진 일이었다.

1988년 6월, 포철 주식을 공개할 때 나는 종업원들에게 총 주식의 10%인 920만 주를 배당했으나 나와 임원은 공모주에 한 주도 손대지 않았다(이 점에 대해서는 특히 창업동지들에게 미안하다). 이런 남편을 둔 집사람은 나름대로 노후에 대비해야겠다 싶어 조씨의 도움으로 한때 재테크를 했다고 한다. 그것도 '명의신탁 금지법' 훨씬 이전의 과거사였다. 그러니 법률적으로는 문제가 없었다. 최종현 대법원장이 내용을 챙겨봤는지 전화로 "나라를 위해 지금 그만두면 안 된다"고 만류했다. 고마웠다. 그러나 나는 구질구질한 게 질색이었고, DJ도 'TJ 총리'를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내가 사표를 내자 DJ는 즉시 수리했다. 길어야 5분 만났나. 나는 "국정 전반을 공부할 기회를 줘 감사합니다. 이헌재는 꼭 쓰십시오"라고 얘기하고 DJ와 작별했다. 그러나 얼마 뒤 이헌재 부총리는 물러났다. 이런 와중에 나는 폐가 말썽을 부려 새벽에 이따금 각혈을 하고 있었다. 이젠 나의 건강과 투쟁해야 할 차례였다.


2004년 09월 23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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