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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선거구제 [2004년 09월 22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040




▶ 1999년 10월 국회 3당 대표연설에서 자민련 총재인 필자는 중선거구제 도입을 주장했다.


1997년 여름 포항 보궐선거에서 나는 명예 회복과 재기에 성공했다. 이를 발판으로 DJT 연합을 이뤘고 '국민의 정부' 산파역도 맡았다. 그러나 당시 정치는 지역분할 구도였다. 요즘보다 더 심했다. 지역 맹주로 나선 적이 없던 내겐 그만큼 정치적 기반이 허약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98년 4월 경북지역 보궐선거에서 나는 '지역 정서'라는 괴물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문경-예천과 의성의 보궐선거에 온힘을 쏟았다. 그러나 아슬아슬한 석패였다. 특히 내 경제특보로 일한 신국환(국민의 정부에서 산자부 장관을 두 번 지낸 뒤 올해 문경-예천에서 무소속으로 당선) 후보의 패배가 무척 아쉬웠다. 그해 6월 지방선거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공동여당은 대구.경북과 부산.경남에서 완패했다.

7월 부산 해운대-기장을 보궐선거 때 다시 기회가 왔다.

나는 한때 YS 사람이었던 김동주 전 의원을 공천했다. 나와 김 후보의 고향인 기장에서 '고향론과 발전론'이 먹혀들어 어렵게 이겼다. 간신히 체면을 세웠지만 지역 정서는 여전히 공동여당에 불리했다.

11월 공동여당 안에서 '내각제 합의 이행'이 불거져나왔다. 분열의 신호였다. 이때는 외환위기 와중이라 나는 "경제에 전념할 때지 분열할 때가 아니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99년 여름 다시 '내각제 연내 개헌 포기' '선거구제 개편' 이야기가 튀어나와 정국은 혼란했다. 공동여당의 합당설도 솔솔 흘러나왔다.

이때부터 나는 중선거구제 도입을 구상했다. 내각제 개헌은 DJ 쪽이 난색을 표하는 데다 국민여론 열세와 야당의 반대로 무산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그렇다면 차선책인 중선거구제라도 관철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론조사기관에 조사도 의뢰했다. 소선거구제와 중선거구제에 대한 여론은 비슷하게 나왔다.

중선거구제는 자민련의 미래에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선거구제는 3당이 모두 지역정당을 넘어 전국정당으로 갈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

DJ, JP, 나, 김영배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 등 공동여당 수뇌부 네명은 청와대에서 만나 중선거구제에 합의했다. 이때 DJ는 "자민련을 위한 겁니다. 박 총재의 노고에 대한 선물입니다"라는 덕담을 했다. 나는 10월 중순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중선거구제 지지 입장을 분명히 했다.

"보스체제는 지역주의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지역주의를 극복해야 보스체제가 청산됩니다. 중선거구제를 도입해야 두 고질병을 한꺼번에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역구가 없어질 여권 일부, 특히 충청권 의원들이 극심하게 반발했다. 11월 중순에는 소선거구제를 고집하던 자민련 총무가 덜컥 여야 총무회담에서 중선거구제를 포기하는 합의 문서에 서명해 버렸다. 나는 진노했다. 그러나 그래봤자 지역 기반이 없는 '핫바지 총재'였다.

정치판에서 그 한계를 벗어나기란 어려웠다. 12월 초 JP는 남미로 떠나기 앞서 공항에서 "중선거구제는 그만하면 됐다"고 했다. 청와대 합의를 무산시킨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JP와 정치적 선을 그었다.

그 직후 DJ는 JP의 후임 총리로 나를 찍었다. DJ는 내게 "끝까지 같이 가자"는 말도 했다.

정치판에 신물이 난 나는 행정부로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실제로 국무총리 재임 기간에 나는 DJ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애썼다. DJ에게도 경제 쪽을 열심히 챙기는 내가 편해 보였을 것이다.


2004년 09월 22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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