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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완의 화해 [2004년 09월 21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363



▶ 1997년 10월 23일 열린 고 박정희 대통령의 저서 '국가와 혁명과 나' 출판기념회에서 필자가 박지만씨(左)와 악수하고 있다. 한 달 보름 후 당시 김대중 대통령 후보는 필자의 제안으로 박 대통령 생가를 방문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1997년 11월 30일, 30개 종금사 중 12개의 즉각 폐쇄를 요구했다. 이날 오후 나는 부랴부랴 도쿄로 떠났다. 사카키바라 재무관부터 움직여야 했다. 대장성에 도착하면 오후 6시가 넘을 거라 했더니, 정문이 닫히니까 후문에 사람을 대기시키겠다고 했다. 사카키바라는 이미 한국 상황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IMF가 100억달러를 구해줘도 나머지 100억달러가 문제요. 일본은 G7과 의논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너무 늦어요." "선생님께서는 묘안이 있습니까?" "G7만 믿다가는 한국이 먼저 파산해요. 그러니 일본이 필요자금의 3분의 1을 내겠다고 먼저 선언해 주면 일이 쉽게 풀릴 수 있지요."

사카키바라가 미소를 지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오야붕을 만나 주세요." 다케시타를 지칭한 말이었다. 그와는 약속이 되었다고 알려줬다.

일본의 정.재계엔 '대장성파'가 막강하다. 당시엔 다케시타가 '오야붕'이었다. 나는 다음날 오전 10시에 다케시타를 만났다. 그러나 한국에 대한 일본의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주겠다"는 YS 발언의 앙금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런 시각을 돌려놓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급박한 외환위기를 풀기는 쉽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 운동이 막바지로 치닫는 고비에서 나는 이렇게 도쿄에서 눈코 뜰 사이 없는 2박3일을 보낸 뒤 귀국했다. 귀국 이틀 뒤인 12월 5일엔 아주 귀중한 행사가 준비돼 있었다. 나의 제안에 따라 DJ가 구미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하기로 한 것이다.

DJT 연대를 하면서 나는 진심으로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영남과 호남의 화합'을 바랐다. 나는 DJ가 박 대통령의 생가에서 고인과 화해하기를 기대했다. 박 대통령 생가 방문이 득표에 도움이 될지, 손해가 될지는 미지수였지만 나의 뜻은 김민석 전 의원을 통해 DJ에게 전달됐다. 나는 박지만씨에게 DJ와 동행하도록 부탁했다. 고맙게도 그가 용기를 내줬다.

DJ는 나에게 "그곳에서 무슨 말을 하면 좋겠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고인이 경제에 7할을 바치고 민주주의에 3할을 썼다면, 나는 민주주의에 7할을 바치고 3할을 경제에 썼다. 이제 그 차이를 넘어 화해한다"는 내용의 발언을 주문했다. 실제로 DJ는 고인의 생가에서 "한 시대를 경합했던 사람으로서 이곳을 찾게 돼 감개무량하다. 박 전 대통령은 경제개발을 먼저 생각했고 나는 민주화를 말했지만, 이는 순서의 차이일 뿐이며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면서도 어렵게 생각했다"는 연설을 했다. DJ의 국정 슬로건인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은 상식 같아도 이처럼 깊은 고뇌의 반영이었다.

지금 고구려 역사까지 넘보는 중국을 보자. 문화혁명 때 고초를 겪었던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에 대해 "7할은 잘했고, 3할은 못했다"고 정리했다. 문화혁명의 참혹한 억압과 폐해만 따졌다면 마오쩌둥의 사진은 벌써 천안문 광장에서 치워졌을 것이다.

이제 '경제와 민주주의가 기반 위에 오른 2004년의 한국'에는 달라진 리더십이 필요하다. 절대 빈곤과 극단적 냉전체제가 지배하던 1960년대식 리더십으론 제대로 나라를 이끌기 어렵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오늘의 한국엔 '피차의 겸손'이 절실하다. 유신체제까지 포함해 박 대통령의 재임 18년 전체의 공과(功過)를 중국처럼 통쾌하게 정리했으면 좋겠다.


2004년 09월 21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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