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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 전야 [2004년 09월 20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750



▶ 외환위기 직후 자민련 총재인 필자(현판 오른쪽)가 조세형 국민회의 총재권한 대행과 함께 'IMF환란' 원인규명과 경제위기 진상조사특별위원회 지원본부'현판을 달고 있다.


"어느 쪽으로 가실 생각이에요?" "서울이 고향도 아니고…. 내 인생이 있는 포항으로 갈거야."

"포항에 가봤자 당신 인생은 딴 사람 차진데, 속만 상하잖아요?" "그래도 갈거야. 보궐선거에 나가기로 결심했어."

1997년 5월 5일, 귀국을 앞두고 나는 도쿄의 13평짜리 아파트에서 아내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

유랑생활 4년을 마감하고 귀국길에 오르던 날, 항공편에 문제가 생겼다. 오사카를 거쳐 김해공항으로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기상 악화로 취소됐다. 도리 없이 김포공항으로 바꿨다. 그러나 김포에서 포항공항으로 가자면 포철을 지나 시내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게 싫었다. 유랑에 지친 내 모습을 포철에 보여주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김포에 내린 나는 동대구까지 열차로 가서 다시 승용차로 포항시내에 닿았다. 내가 돌아온 날, 오랜 가뭄에 시달리던 포항에는 비가 내렸다.

보궐선거 경쟁자인 이기택 총재의 저력은 만만치 않았다. 만 70세의 나에겐 더위도 강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승리했다. 지쳐 피곤함 속에서 이른바 DJT연대까지 이뤄냈다.

자민련 총재로 취임한 11월 22일, 청와대 저녁자리에 초청받았다. 초청된 사람은 김대중.이회창.임창열 경제부총리 그리고 나. 저녁을 기다리는 동안 내가 주로 임 부총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현재 외환 보유고가 50억달러인데, 연말까지 갚아야하는 빚이 200억달러고 내년 1월까지 100억달러가 더 있어야 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임 부총리는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IBRD)에 100억달러 지원을 요청하고, 나머지는 G7에 부탁해야 한다고 보고했다. 국가부도나 다름없었다. 기가 막혔다.

"종금사를 22개나 늘렸다는데, 거기서 외환관리도 하는 거요?" "예. 권한을 줬습니다."

속에 쌓인 분노를 참기 어려웠다.

"보시오. 우리가 경제개발을 시작할 때 외환관리의 중요성 때문에 외환은행을 따로 만들었소. 무역에 절대 의존하는 경제는 외환관리가 핵심이오. 그런데 종금사들에게 그 권한을 줬으니 무슨 외환관리가 됐겠소?"

그러나 구원투수로 투입된 임창열 부총리에게 무슨 책임이 있으랴. 커피가 나올 무렵 YS가 안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들었다.

"지금부터 IMF 관리 요청에 관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점잖게 굴던 DJ가 쏘아붙였다.

"박 총재가 다 지적하셨는데, 회의는 무슨 회의입니까?"

"절차는 남겨야 합니다."

YS가 원고를 읽었다. 한국이 IMF 관리체제로 간다는 통고였다. YS가 이틀 뒤 열리는 캐나다 밴쿠버의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 참석하겠다고 하자, 이회창 후보가 발끈했다. 무슨 염치로 외유를 하느냐, 이런 반박 같았다. 하지만 나와 DJ는 반대하지 않았다. 누구든, 어디서든 달러를 구해야 했다.

김 대통령은 곧바로 밴쿠버로 갔다. 며칠 뒤 임 부총리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고대하던 달러 보따리를 갖고 오지는 못했다. 임 부총리는 일본 대장성 장관실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는 수모까지 당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 대장성의 실무책임자는 사카키바라 재무관(차관급). 그는 IMF에서 10년 근무하고 G7 차관회의 간사를 맡던 국제금융계의 핵심인물이었다. 대장성 장관은 미쓰즈카. 그러나 그들의 최고 선배는 바로 나의 도쿄 유랑생활을 알뜰히 챙겨줬던 다케시타 전 총리였다. 이제 내가 도쿄로 가야 했다.


2004년 09월 20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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