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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과 나 [2004년 09월 19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945




▶ 1997년 2월 필자는 포항시로부터 1호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오른쪽 옆은 집사람.


1989년에 나는 포스코 회장이자 민정당 비례대표 의원이었다. 어느 날 국회 사무실로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이 찾아왔다. 충남 당진에 제철소를 세우려고 한다면서 자문을 부탁했다

철강에 대해 이것 저것 물어봤더니 그는 제대로 공부가 안 되어 있었다. 나는 적극 말렸다. "제철소에 실패하면 기업도 기업이지만 국가에 엄청난 피해를 주게 됩니다. 그만두는 게 좋겠어요."

그러나 93년 3월 내가 일본 유랑 길에 오른 뒤 김영삼 정부는 한보의 제철소 건설을 허가했다. 이왕 벌어진 일이니 잘 되기를 바랐지만 '불행한 미래'는 어쩔 수 없었다. 한보는 97년 엄청난 말썽을 일으켰다.

그해 2월 초 나는 김포공항에 내렸다. 포항시의 '명예시민 1호증'을 받기 위한 일시귀국이었다. 기자들이 따라붙었다. '한보 비자금 1000억원설'을 파헤치는 국회 청문회를 앞두고 언론들은 '한보철강이 왜 실패했는지'를 철강 전문가의 입을 통해 듣고 싶어했다. 기자들은 집요했다. 드디어 나는 '철'문제로 4년 만에 처음 입을 열었다.

"한보 부도는 철강 정책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던 결과다. 한보의 코렉스 공법은 대량 생산에 문제가 많은데도 정부 당국과 철강협회가 이 방식의 대형화를 승인했다. 명백한 잘못이다."

나의 발언은 파장이 컸다. 권력층은 '괘씸한 발언'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이 때문인지 YS가 발탁했던 포스코 김만제 회장은 한보 위탁경영팀을 즉각 교체했다. 원래는 나와 함께 포스코에서 쫓겨났던 박득표.이대공 등이 가기로 내정됐는데, 하루 아침에 현직 임원들로 바꿨다고 했다. 언론들은 이를 "TJ(필자 이름의 영문 이니셜) 사단의 부활을 경계한 조치"라고 풀이했다.

포항시민회관에는 축하객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명예시민증을 받아든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 인생에서 포항은 한국전쟁 때 형산강 전투로 첫 인연을 맺은 곳이었다. 이 전투에서 사촌형이 포탄 사고로 숨져 형산강에 뼈를 묻었다.

재일동포로 와세다대 대학원에 다니던 사촌형은 전쟁이 터진 조국으로 건너와 지원 입대해 병기 장교로 근무 중이었다. 68년부터는 내 인생을 다 바친 곳이었다.

온갖 회한과 추억이 명예시민증을 받아든 나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바로 그 자리에서 나는 한가지 결심을 했다. 원래 김영삼 정권이 끝날 때까지 절대 귀국하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그 시기를 앞당기기로 한 것이다.

정치권은 그보다 한 해 전부터 나의 귀국을 둘러싸고 맞섰다. 제15대 총선을 앞둔 96년 2월 중순 새정치국민회의의 DJ와 자민련의 JP 측에서 앞다투어 영입 의사를 밝혀왔다. 당시 도쿄에 머물던 나는 공소 취하로 이미 자유로운 몸이었다. 나중에는 여당인 신한국당과 YS까지 사람을 보내왔다. YS가 보낸 사람은 대통령의 뜻이라며 "국세청이 가압류한 북아현동 자택을 풀어주겠다. 이번 총선에는 제발 들어오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나는 모든 제의를 물리쳤다. YS 심부름꾼에게는 "먼저 황경노부터 포스코로 복귀시키라"고 말했다. 그쪽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조건을 단 것이다. 옆에서 듣고 있던 집사람도 버럭 화를 냈다. "북아현동 집을 돌려준다고요…. 당신들이 25년 일한 사람한테 공로주 한 주라도 줬어요? 그걸 계산해서 몇천억원이라도 줘야 하지 않나요." 아내는 나중에 너무 분해서 그랬다고 했다.


2004년 09월 19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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