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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받아온 문서 [2004년 09월 15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1020



▶ 1969년 12월 3일 한.일 기본협약 체결식장의 필자(맨 오른쪽 앉아 있는 사람). 이 협약으로 포철은 제철소 건설을 위한 자금 마련에 성공했다.


1969년 여름, 잊지 못할 일 두개를 겪었다.

하나는 국내 정치의 태풍의 눈인 박 대통령의 3선 개헌이었다. 7월 하순, 서울에서 고위 인사가 예비역 장성들의 3선 개헌 지지 서명을 받으면서 육군 소장 출신인 내 이름을 얻으러 왔다. "제철소 일만 해도 바빠요. 정치에선 빠지겠소." 나중에 보고받은 박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친구 원래 그래. 제철소에 빠져 있으니 건드리지 마."

또 하나는 대일협상의 마지막 고비였다. 일본 내각회의가 '포항제철 프로젝트'에 긍정적 결론을 내린 8월 22일, 이나야마 회장의 일본철강연맹은 '한국제철소건설협력위원회'를 구성했다. 나는 기분 좋게 서울로 돌아왔다. 그러나 김학렬 부총리가 딱딱하게 나왔다. "일본 철강회사 대표들의 협력의사를 문서로 받아오세요."

난감했다. 상대방의 약속을 서류로 다시 확인해 달라는 요구는 일본 문화에서는 상대의 신의를 의심하는 무례한 행위였다. 그래도 김 부총리는 양보하지 않았다. 화가 났지만 도리가 없었다. 다시 도쿄로 가 이나야마 회장의 사무실을 찾아갔다. 내친 김에 후지제철과 니혼강관 사장의 승낙까지 받아 달라는 나의 요청에 이나야마 회장이 한참을 망설였다. 다른 사장들이 휴가를 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일단 두 분께 연락해볼 테니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려 주세요."

속이 타는 10여분이 흘렀다. 다행히 후지제철과 니혼강관 사장은 도쿄에 있었다. 나는 천금보다 귀중한, 3명의 사장 사인이 든 서류를 품고 오후 5시 서울행 노스웨스트 오리엔트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기뻐할 줄 알았던 김 부총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이 서류에 '100만t 포철 건설계획을 검토한 결과 일응(一應) 타당성이 있다고 판단되며…'라고 돼 있어요. '일정 정도'라는 이 '일응'의 느낌이 안 좋아요." "그건 아무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김 부총리는 '일응'을 뺀 서류를 새로 받아오라고 우겼다. 그래야 확실하다는 거였다. 기가 막혔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며 다시 도쿄로 건너갔다. 그러나 이나야마의 비서는 사장과의 연락을 거절했다.

할 수 없이 야스오카 선생을 또 찾아갔다. 휴가 중인 사람에게 연락하려니 그도 주저할 수밖에 없었으나 나의 간절한 요청을 매몰차게 물리치지는 못했다.

야스오카 선생의 주선으로 이나야마의 비서가 전화로 사장의 허락을 받아 '일응'을 뺀 서류를 새로 만들어 보내왔다. 이젠 내가 마라톤에 나설 차례였다. 이나야마 사장은 하코네에, 후지제철 나가노 사장은 히로시마에, 니혼강관 아카사카 사장은 도쿄에 각각 흩어져 있었다. 나는 하루 반 동안 세 곳을 돌아다니며 사인을 모두 받아냈다.

드디어 도쿄에서 열린 한.일 각료회담 사흘째에 포철 프로젝트가 상정되었다. 일본 정부는 일본철강협회와 상의한 뒤 자세히 검토하자고 했다. 한번 더 미루려는 눈치였다. 바로 이 순간, 김 부총리가 일본 제철소 사장들이 서명한 문서를 꺼내 들었다. 내가 어렵사리 받아낸 '일응'까지 뺀 협력 약속 문서였다. 그쪽의 쟁쟁한 제철소 사장 3명이 "100만t짜리 포철은 타당성이 있다"고 확인해준 마당에야 일본 정부도 더 이상 뒤로 뺄 수 없었다.

마침내 그해 12월 3일 종합제철 건설을 위한 한.일 기본협약이 체결되었다. 이나야마의 전폭적 지원이 없었다면 협상하느라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허비했을지 모를 일이다.


2004년 09월 15일 [중앙일보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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