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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우선 [2004년 09월 14일]
등록일 : 2014-07-25 작성자 : 관리자 조회수 : 828



▶ 1969년 1월 17일 완공된 제철연수원에 현판을 걸고 있는 필자.


1969년 이른 봄에 '하와이 구상'으로 대일청구권 자금을 포철로 끌어들인 나는 곧바로 대졸 사원 공채에 들어갔다. 포철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 엘리트들을 뽑는 중대한 일이었다. 그해 1기, 2기, 3기생이 잇따라 입사했다. 현재 포스코를 이끄는 이구택 회장(1기)과 강창오 사장(3기)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보다 한 발 앞서 대한중석팀이 주축을 이룬 창업 요원들과 나중에 포스코 경영진을 이루는 백덕현.박득표.이대공.유상부 등이 일하고 있었다. 포철은 차관을 못 구해서 망할 것이란 소문이 퍼져 있었지만 이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정열을 바쳐 일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막막한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았던 그들 모두가 고맙다.

걸음마 시절의 포철은 자금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도 나는 무모해 보일 만큼 과감하게 기술연수에 투자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포철은 된다'는 신념을 불어넣으려면 기술력 확보가 무엇보다 급선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단기적 목표는 첫 가동 단계부터 우리 손으로 돌리자는 것, 장기적으론 기술 식민지를 극복하고 세계 최고기술을 보유하자는 것이 우리 목표였다.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은 차관 제공에 대한 확답도 없이 "초기 몇 년 동안은 외국 전문기술 용역단과 공장 운영계약을 맺으라"는 요구부터 내놓았다. 우리를 얕잡아보는 주제넘은 간섭이었다. 나는 그들의 요구와 정반대로 나갔다.

68년 10월 최우선 순위로 제철연수원을 착공해 이듬해 1월 완공했다. 68년 11월 아홉명을 일본 가와사키제철소로 파견한 것을 시작으로 72년까지 600명이 일본.서독.호주 등 철강 선진국에 기술연수를 다녀왔다. 그때 돈으로 500만달러나 들었다. 나는 그들에게 늘 당부했다.

"무슨 수를 쓰든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배워오라. 연수 규정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그 규정까지 어겨도 좋다."

연수생들에겐 일화가 많았다. 안 보여주는 도면을 보려고 상대를 술자리로 유인하거나, 못 들어가게 하는 공장에 기막힌 기지를 발휘해 들어가기도 했다. 그런 얘기들이 포철 사보에도 실렸다. 산업스파이나 된 것처럼 얼마나 가슴을 졸였겠는가. 그들의 뜨거운 애사심과 애국심이 뒷받침됐기 때문에 포철은 우리 손으로 가동을 시작했다. 지금이야 환히 웃어가며 추억담으로 얘기하지만 사실 참으로 눈물겨운 일이었다. 돈도 기술도 경험도 없었지만 가슴만은 뜨거웠던 시절이었다. 


2004년 09월 14일 [중앙일보 연재] 

공장이 돌아가고 제품이 나오기 시작할 무렵 나는 '목욕론'을 줄기차게 강조했다. "나의 청결은 공장의 청결이고, 공장의 청결은 제품의 완벽성으로 이어진다"라는 이야기를 포철 직원들은 귀가 아프도록 들어야 했다. 모든 현장마다 최신 샤워시설을 갖추도록 했다.

기술력이 쌓이고 제품의 질이 높아지자 포철엔 자신감이 붙었다. 이게 미래를 위한 얼마나 큰 재산인가. 광양제철소는 레이아웃부터 완공까지 포철의 기술력이 집대성되었다. 그 저력 위에서 포스코는 92년부터 파이넥스 공법 개발연구에 몰입했다. 내가 포스코 경영에서 물러나 있을 때도 포철은 12년간 이 공법 개발에 끈질기게 매달렸다. 마침내 2004년 8월 포스코는 세계 최초로 포항에다 150만t 생산 규모의 파이넥스 설비 공사에 들어갔다. '기술 우선=포스코'의 전통을 이어나가는 후배들의 노고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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